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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벼랑에 매달려 딸기를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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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매달려 딸기를 맛보다

(마태복음서 6:25-34)

 

2014년 4월 6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공중의 새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십니다. 여러분은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습니까? 또 여러분은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십니까?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합니까?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여러분이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십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 마태복음서 6:25-34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성찰하면서 지금 이 순간 예수를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동안 주로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번 사순절에 새길 공동체가 함께 읽고 있는 복음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가 하시는 말씀은 당신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요약하면 예수는 모든 생명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며, 모든 걱정을 내려 놓고, '현재'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충만하게 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처럼 현재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다시 살고 미래를 미리 사는 병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눕니다. 과거는 살았던 시간이고, 현재는 살고 있는 시간이고, 미래는 살아갈 시간입니다.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가 실제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교묘해서 마치 과거와 미래를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마음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다시 살고re-live' 미래를 '미리 사는pre-live' 병을 앓게 됩니다.

 

물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미래를 계획함으로써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거와 미래를 사는데 너무 집착하느라 정작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지나치면 병이 됩니다.

 

우선, 과거를 다시 사는 병에는 두 가지 증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아름다움에 눈이 팔려 오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아름다움에 너무 집착하느라 오늘의 삶을 비루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다시 사는 과거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지나간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지금 이 순간에서 보면 모두 죽은 것입니다. 과거를 다시 사는 병에 걸린 사람은 죽어있는 과거의 꽃을 사랑하느라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소담하게 피어있는 꽃을 보지 못합니다. 그 향기를 맡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삶의 '최고의 순간'은 늘 과거에 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은 흥미진진한 변화와 진보의 과정이 아닌 한탄스러운 쇠락의 과정일 뿐입니다.

 

과거를 다시 사는 병의 두 번째 증상은 어제의 잘못을 후회하는데 너무 집착하느라 오늘 선한 삶을 사는데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과거지향적이지만 앞의 증상과는 반대로 그 기억이 부정적 경험에 묶여 있습니다. 물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계속 후회하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은 병입니다. 중국의 사상가인 왕양명에게는 설간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설간은 마음공부를 하면서도 늘 후회가 많았습니다. 어제의 잘못을 후회하느라 오늘 너무 괴로워하는 제자가 안쓰러웠던 양명이 말합니다. "뉘우쳐 깨닫는 것은 병을 고치는 약이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후회가 가슴속에 응어리진 채 남아 있다면 다시 약 때문에 병이 생기게 될 것이다." 약은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되어 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과거를 다시 사는 병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미래를 미리 사는 병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십니다. 걱정은 주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런 걱정에도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 덕분에 미래의 잠재적 위험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이 불안은 미래를 미리 사는 병의 원인균일 뿐만 아니라 숙주이기도 합니다.

 

불안이 일으키는 병의 가장 치명적 희생자는 청소년과 청년입니다. 청소년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죽자사자 공부만 해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청년이 되자마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밤낮없이 '스펙'을 쌓아야 합니다. 취직한 다음에는 승진을 위해 쉼 없이 자기개발을 하며 남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좋은 조건으로 결혼하고, 좋은 집을 사고, 아이들에게 좋은 사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발버둥쳐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의 안락한 노후까지도 스스로 챙겨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도무지 쉴 틈이 없습니다. 잠시라도 쉬거나 멈추면 뒤처지고 밀려날 것 같아 불안해 몸서리를 치며 앞으로 달려 갑니다. 그렇게 전력질주하듯, 전쟁하듯 미래를 준비해야 하니 오늘을 즐기며 살 여유가 없습니다. 늘 고단하고 불안하고 불행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안전하고 안락한 내일이 보장된다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을 아주 비합리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치밀하고 철저하게 미래를 준비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알 수 없음'의 리스트 가장 위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길희성 선생님은 죽음은 '곱하기 제로'라고 표현하십니다. 아무리 큰 숫자라도 제로로 곱하면 제로가 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도 죽음 앞에서는 제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계획과 준비도 죽음을 만나면 예외 없이 제로가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죽음은 우리가 예상하고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티벳 사람들은 "내일보다 내세가 먼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곡식과 재물을 쌓아 둘 곳간을 크게 지어 인생을 즐기며 살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날 밤 그의 영혼을 되찾아 가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겠냐는 예수의 비유입니다 (누가 12:16-21).

 

과거를 다시 사는 병과 미래를 미리 사는 병의 원인과 증상은 다르지만 그 후유증은 같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아름다움과 아픔 때문에 오늘 불행하고,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오늘 불안합니다. '자살율 세계 최고'와 '출산율 세계 최저'의 현실은 현재를 상실한 이들의 불행과 불안 때문에 생긴 비극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맛

 

그렇다면 현재를 산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선불교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산속을 지나는데 갑자기 뒤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쫓아옵니다. 기겁을 해서 달아나는데, 가파른 벼랑이 앞에 나타납니다. 다행히 가느다란 넝쿨이 있어 그것을 잡고 벼랑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아래에는 다른 호랑이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 넝쿨을 갉아대기 시작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 사람, 문득, 가까이 바위틈에서 탐스럽게 익어 있는 딸기를 발견합니다. 한 팔을 뻗어 그 딸기를 따서 입 안에 넣습니다. 아, 달콤합니다!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깟 산딸기에 현혹되어 엄혹한 고통의 현실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니,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딸기 같은 구원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벼랑에 매달린 그 사람은 자기가 처한 곤경을 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호랑이들과 쥐들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딸기도 있는 그대로 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호랑이들과 쥐들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딸기를 맛보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 있는 것이 인생의 실상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로움을 망각하는 낙관주의나 즐거움을 부정하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입니다. 그 사람은 지혜롭고 용기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현실주의는 또한 '현재주의'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벼랑 위의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했고, 쥐들 때문에 벼랑 아래로 떨어져 다른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지금 이 순간 딸기를 맛볼 수 없다면, 그는 아직 살아 있음에도 이미 과거와 미래의 호랑이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딸기를 따서 맛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다면, 호랑이들도 쥐들도 그의 현재를 빼앗지 못합니다. 그는 딸기를 따먹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삶의 가장 존엄하며 중심적인 주인입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달콤한 순간, 최고의 순간, 구원의 순간을 맛보고 있습니다.

 

깨어 있음

 

그렇다면 현재를 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 구원을 맛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깨어 있음'입니다.

 

며칠 전에 교회 홈페이지에 한 형제님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는 바울의 권면을 언급하시면서, 길게 기도하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냐고 묻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물음이지요. 수도원에서도 매일 24시간 기도만 하며 지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세상 속에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서 일하고, 이웃과 관계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바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을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예수께서 자주 하신 "늘 깨어 있어라" 혹은 "늘 깨어 기도하라"( 마태 24:42, 25:13,  26:41, 마가 13:33; 37, 14:38, 누가21:36)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늘 깨어 있음'입니다. 즉 매사를 제쳐 놓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를 기도하듯 늘 깨어서 하는 것입니다. 늘 깨어 있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기도가 됩니다. 성 베네딕트의 "기도는 노동이요, 노동은 기도다"라는 가르침이나 성 이냐시오의 "활동 중 관상" (contemplation in action)은 늘 기도하듯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을 바꿔 표현하면 "우리가 깨어 하는 모든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잊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잊을 수 있겠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해서 하루에 두 세 잔은 꼭 마십니다. 그런데 커피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마시게 될 때가 많습니다. 하루는 커피를 한 잔 탄 후 책상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 마시려고 잔을 드니 빈 잔이었습니다. 심지어 바닥에 남은 커피가 말라 붙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생각에 몰두하느라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커피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저는 커피를 마신 게 아니라 생각을 마셨습니다.

 

이처럼 잠시만 방심하면 우리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망각하기 쉽습니다. 매 순간 기도하듯 깨어 있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를 일으키고 지속시키기 위해 제가 하는 간단하면서도 쉬운 수행법이 하나 있습니다.

 

What is this?


뉴욕에서 살 때 제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할 때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What is this? 이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기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빠나 잘 하라면서 What is this?를 써서 제 컴퓨터 키보드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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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공부할 때, 글을 쓸 때, 일할 때, 대화할 때, 지금처럼 말씀증거를 할 때, 잠깐잠깐 멈추고 What is this?를 물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물음의 목적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제 자신에게 상기시켜주는 물음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숨을 쉴 때 What is this?를 통해 내가 숨을, 숨이 나를 쉬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들숨과 날숨을 코로, 가슴으로 느낍니다. 딸기를 먹을 때 What is this?를 통해 내가 딸기를 먹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 맛과 향을 입 안 가득히 느낍니다. 화가 날 때 What is this?를 통해 내가 화내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 화가 남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분별합니다.

 

이렇게What is this?를 통해 우리의 몸과 생각과 느낌과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일상 속에서 반복하게 되면 사회적 관계에서도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대화를 할 때 더 집중해서 경청하고 더 명료하게 말하게 됩니다. 정의를 위해 행동할 때 더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됩니다. 이런 깨어 있음은 사회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예수따르미들의 삶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깨어 있을 때 사회적 고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우리가 긴급하게 사랑하고 함께 해야 할 고통 받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한 실천이 자기를 비우는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자기를 부풀리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게 되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이 기도가 되고 예배가 됩니다.

 

십자가 위의 수행자

 

깨어 있음의 힘,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사는 것의 힘이 어떤 것인지 예수는 벼랑보다 더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십니다. 끔찍한 고통과 고통 사이의 순간, 아니 고통이 너무 커서 고통이 정상으로까지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 주변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사랑으로 챙겨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함께 죽어가는 이에게 "오늘 당신이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누가 23:43)이라며 소망을 줍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몸과 마음이 다 부서져 버렸을 어머니 마리아를 돌봐 달라고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요한 19:26-27). 그뿐인가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23:34). 예수는 지금 평화로운 갈릴리 언덕 나무 아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지금 처참한 골고다 언덕 나무 위에서 죽어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남 걱정하고, 남 배려하고, 남 돌볼 때가 아닙니다. 도대체 세상에 어떻게 이런 분이 계실 수 있을까요?

 

사순절에 예수의 삶을 묵상하면서, 저보다 열 몇 살 어린 '청년 예수'가 제 평생의 스승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저는 제 고통이 없을 때에야 겨우 이웃을 사랑할 마음과 힘을 내는데, 예수께서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이웃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벼랑에 매달려 부들부들 떨면서 바위틈 딸기에 손을 가져가는데, 예수께서는 용기 있게 그 딸기를 따서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의 그런 용기와 사랑을 초월적이고 신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늘 깨어서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셨던, 하느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며 사셨던 '수행자 예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감으신 수행자 예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깨우쳐 주십니다. 깨어 있다면 벼랑에 매달려서도 딸기를 맛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은 '최초'의 순간이며, '최고'의 순간이며, '최후'의 순간입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구원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늘 깨어 있어서, 벼랑 같은 현실에서 딸기 같은 구원을 맛보며,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지금 여기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저 또한 다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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