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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빛으로 가득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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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으로 가득한 죽음

(빌립보서 3:7-12)


2014년 4월 13일 주일예배

차옥숭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 빌립보서 3장 7절-12절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내려놓고 의를 행하며,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분의 십자가만 바라보며 달려가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이번 주는 종려주일이고 월요일부터 40일 고난주간 마지막 주일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1년 동안의 모든 행사가 그리스도교의 절기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주간 40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Fasching(사육제, 카니발)이라고 해서 참회의 수요일(재의 수요일) 이전 3일 동안 진행됩니다. 라인 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하는 축제로, 마인츠, 쾰른,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하는데 쾰른에서는 1234년부터 했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을 풍자한 가장행렬, 가면무도회 연극 등, 이 기간 동안은 일상의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나 무질서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길에서 춤추고 소리 지르고 술 마시는 등등 무질서한 난장을 보여줍니다. 축제는 정확히 참회의 화요일에 끝이 납니다. 그리고 40일 동안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면 차분히 가라앉은 질서의 시간으로 이어지지요.

  

저는 그곳에서 가톨릭기숙사에 있었습니다. 평소에 교회나 성당에 잘 나가지도 않던 학생들도 고난주간이 되면 40일 동안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던 것들 중 하나 정도 금기로 정하고 그 금기를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바나나를 매 식사 때마다 쨈 대신 빵에 발라먹던 남학생은 바나나를 먹지 않고, 담배를 열심히 피워 대던 사람은 담배를, 또는 즐겨 마시던 술 등을 금기로 정하고 지켰습니다. 나름 고난에 동참하는 몸짓이겠지요. 몇 주 전에 와서 설교했던 최혜영 수녀님도 예배 끝난 후에 함께 찻집에 갔는데 커피는 고난주간이어서 마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성삼일 마지막 토요일 밤에는 기숙사 공동부엌 식탁에 모여 앉아 촛불도 켜놓고 부활절 빵도 구워 놓고, 그동안 바나나를 못 먹었던 친구는 바나나 큰 덩어리를 식탁에 올려놓고 12시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12시가 딱 되면 샴페인도 터트리고 서로 볼에 키스를 하면서 부활을 축하합니다. 준비한 것들을 서로 나누어 먹고 나면 부활절 계란을 찾으러 나간다고 산책을 나갑니다. 저는 학생들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새벽 2시가 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걷고 있는지 깜작 놀랐습니다. 평소에 독일은 저녁 9시, 10시면 시내가 깜깜합니다. 늦게까지 여는 가게도 없고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활절 휴가가 이어지지요. 학교도 관공소도 1주일 정도 쉽니다.

  

저는 그곳에서 40일 동안의 고난주간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금기를 통해 예수의 수난을 돌아보고 참여하는 기회를 갖는 학생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첫날입니다. 오늘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의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군중의 목소리는 곧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변합니다.

  

성주간과 부활시기를 통하여 가장 큰 날은 바로 성삼일입니다.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파스카 거룩한 밤(토요일 밤)이고 바로 부활 주일로 이어집니다. 이 성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경축한다 하여, 성삼일을 파스카 성삼일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파스카(유월절, 과월절)는 중동 목축업자들의 축제였습니다. 파스카는 가정 축제였지요. 춘분이 지난 보름 밤, 유배 이후 니산(Nisan)이라 부르는 달 14일, 양들에게 복 주시기를 신께 기원하기 위해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1년 된 어린 짐승 (양, 염소로서 수컷)을 신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사건이 이 축제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즉 목축업자의 파스카가 히브리인의 파스카가 된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이 밤에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허리에 띠를 띠고 서서 쓴 나물과 누룩 안 든 빵을 급히 먹습니다. 이들은 그 밤에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건너감’에서 파스카(Pasca)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어 하느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파스카는 개인적 의식이 아니다. 이스라엘인 전체의식이 되었고 그들은 이 밤을 지금까지도 기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파스카에서 신약의 파스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파스카입니다. 성삼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삼일에 걸쳐 새로운 건너감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파스카 축일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결정하기를, 춘분 후의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내도록 명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은 성목요일 저녁 주님만찬 저녁 예배로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을 정점으로 해서 부활 주일 저녁기도로 끝납니다. 성삼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성삼일의 시작인 성목요일은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께 일어날 일,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셨지요. 단순한 일상 식사나 고별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죽으실 때가 이르러 당신이 사랑하던 제자들과 나누는 ‘최후만찬’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잔을 드시고 “여러분을 위해 흘릴 계약의 피”라고 하셨고, 빵을 드시고 “내어주는 당신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찬 끝에 예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십자가상의 제사를 뜻한다고도 하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오랜 교회전통에서는 최후의 만찬사화와 예수께서 본을 보이시고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 13,1-15을 연결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에 예수께서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지극한 사랑과 섬김을 드러내는 상징행위로써 그분을 본받아 제자들도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행해지던 관행은 유대인이 아닌 종이 유대인 주인의 발을 씻어주고 부인이 남편의 발을, 아이들이 아버지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세족례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지극히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여러분이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3:34-35).”

  

세족례를 연결한 성만찬의 의미는 서로 받아들임, 서로 나눔, 형제적 친교와 봉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힘든 봉사를 하면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성금요일은 겟세마니 동산에서부터 십자가 처형과 무덤 안치까지 이어집니다.(요한 18,1-19,42)

  

로마 역사에서 볼 때 십자가형은 오직 대역 죄인에게만 행해진 처형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자기 비움의 극치입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숙명처럼 죽음을 만나지 않는 유일한 인간 존재로서의 예수를 소개합니다.

  

공관복음에서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가 26,42) 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저를 구원해 주소서’ 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왔습니다.” 라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인간의 고뇌를 그대로 드러내시면서 피 흘리듯 땀방울을 떨어트리며 절규하듯 기도하신 마가복음 내용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리고 체포되고 법정에 서고, 조롱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의 처형으로 이어집니다.

  

율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간음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억울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랑의 예수님의 모습은 처형을 통하여, 자기 비움(케노시스), 곧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삶은 죽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통해 죽음을 묻고 또 죽음을 통해 삶을 묻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또한 새로운 생명의 빛 아래서 이해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으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사형집행인의 용서를 하느님께 구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루가 23,46)라고 “스스로 내어놓고” 숨을 거두는 그분의 모습에서 사랑의 신비,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찬 죽음, 죽음을 생명으로 뒤바꾸는 사랑의 신비를 봅니다.

  

초월 신학자 칼 라너(K. Rahner)는 인간 “자신은 항상 스스로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서는 하나의 신비이며”, 신인(神人: Gottmensch)인 예수는 “우리의 현존(現存: Dasein)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신비를 우리에게 나누어준다. 예수의 신비는 형언할 수 없고 무한하고 고갈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거리낌 없이 내어줄 수 있는 힘을 예수의 신비 속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비에 참여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예수는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을 유일회적으로 또 온전하게 내어주는 삶을 살아간 인간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예수가 하느님에게 자신을 이와 같이 내어준 것은 인간 예수에게 “하느님이 온전하게 자기를 알리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하느님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인간과 인간들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하느님이 신인(神人)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 사건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도리어 빛나는 은총의 사건으로 변화됩니다.

  

성토요일,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신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요한 19,41). 그 무덤에 예수를 모셨습니다. 이 날은 파스카를 준비하는 큰 날인 안식일(토요일)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심을 공경하는 날입니다. 침묵과 적막이 흐르는 날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토요일 밤은 빛나는 밤, 낮으로 바뀐 밤, 새 창조의 날, 새 해방의 날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여인들은 향료를 가지고 아침 일찍(루가 24,1)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에서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 가운데서 찾고 있소?”(루가 24,5) 라고 여인들은 예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부활은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감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장벽과 죽어야만 하는 시간의 장벽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이제 그분에게 생명의 빛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날,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세례는 생명을 뜻합니다.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낡은 인간성에서 새 인간성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베드로 사도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는 베드로가 세 번째 “Non novi illum, 나는 그를 모릅니다.” 라고 말을 할 때 닭이 울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주친 서로의 눈빛이 어떠했을까요? 입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스승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빛은 고뇌에 찬 처절하게 슬픈 눈빛이었을 것이고, 그 눈빛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수도 없이 마음으로 되 뇌이면서 사랑하는 제자를 위로 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연민으로 가득 찬 슬프면서도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래서 더욱 베드로 사도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 지요.

  

독일 출신의 바흐가 만든 ‘마태오 수난곡’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바이올린 독주를 타고 애절하게 노래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의 하느님!’(Erbarme dich, mein Gott!)입니다. 이 곡은 바로 베드로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저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아프게 통곡하는/ 저의 이 심장과 이 눈을 보소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언제 들어도 슬픈 곡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애절하게 눈물 흘리는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나를 성찰하고 나를 내려놓는 의미 있는 고난주일이 되시기를! 그렇게 온전히 비워진 마음속에 생명이 가득한 부활의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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