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궁극이
  • 900
  • 0

첨부 1


8장 38절-9장 8절.

8장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장 1절-8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낼 자들이 누구냐? 그냥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 말이냐? 하나님의 성품화 되지 않으면 자기 속에 증거는 없다.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화 되었다면 그게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또한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화 된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됐음을 알게 되니 그게 곧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화된 신앙은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사역적으로 남다른 일을 했으면 그걸 놓고 영광을 받으라는 식이다. 그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속성 성품화 된 것이 영광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좋은 뜻으로 ‘야, 저 사람 교회 다니더니 전혀 딴 사람이 되었네’ 하는데 사람 된 그게 영광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을 자기가 느끼니까 그 자신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는 게 영광이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다.


사람이 고차원적 도덕성적인 참 사람으로 안 만들어졌으면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찬송을 해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저질회로 돼 있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만한 게 못 된다. 기독교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슨 사역을 크게 한 걸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존영스러워진 것이 영광이다.


그런데 주님을 부끄럽게 하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주님을 부인하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를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을 주지 못하고, 좁은 길 영생 길 생명 길로 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그 의사단일을 부인하고, 또 ‘이단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나’ 하며 세상 넓은 길을 가는 속회된 기독자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간다. 이런 자들은 전부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주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많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인정을 해야 하는데 인정을 안 한다.


요한일서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그랬다. 그 앞뒤로 보면서 ‘무슨 뜻으로 육체라고 했나’ 그걸 읽어야 한다. ‘노아 당시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로 사니 성령이 떠나더라’ 라고 했는데 요한일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라고 표현을 했다. 여기서 ‘육체’라고 하는 두 말이 용어와 글자소리는 똑같지만 쓰는 의미가 다르다.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육신으로 오신 도성인신의 그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은 다 시인을 하는데 무엇을 부인한다는 말인가?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우리의 기본구원과 성화구원 이룰구원의 터를 다 닦아 놨는데, 그 구원을 닦아놓은 주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부인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33년의 전 인격 전 삶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리는 언행심사의 삶을 사셨다.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의 소원과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사셨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은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그 구원을 위한 삶의 정신은 모른 채 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갖고 와서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은 하지만 그 가르침들을 봐라. 세상 속회된 교회를 거짓된 교회요 비진리 교회라고 하는데 이들은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 것을 요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33년 삶이 세상 것을 요구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셨다. 영육 결합체로 된 나를 구원하려고 일점일획도 그르치지 않고 흠과 티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그 속의 은밀한 뜻까지 전부를 지키며 사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삶 속에는 우리의 기본구원과 이룰구원의 이치가 정신 사상 영적으로 다 들어있는 것인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는 그것을 전부 부인을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주님과의 대적자들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이다. 아니다’ 하고 정반대적인 표현을 할 수 있으나 마귀는 겉으로는 시인을 하면서 속으로는 곪아터지고 죽게 만든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마귀가 이방 불신자들만 잡는 게 아니다. 마귀의 이런 수법이 교회 인도자들로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마귀가 목사를 잡고 성경구절을 일반적인 사고방식에다 붙여놓으면 구별 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안다. 이렇게 되면 영인성장 면에서 깡그리 망한다. 전부 다 병들고 죽고 망해버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걸 구별 분별하는 눈을 가져라.


우리는 사람을 구별 분별하는 그 이전에 그 속사람으로 들어가서 ‘이 사람이 어떤 영을 받은 건지, 그 사고방식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건지’ 하는 영적 면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영적 이치에 눈이 밝으면 남에게 절대로 속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어두우면 어두운 그만큼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고, 그 다음에 남에게 속는 거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으면 남에게 속는 것은 자동적이다. 내부에서 썩으면 외부에서 쳐들어오기 전에 그냥 내주는 거다. 예수 믿을 바에야 왜 그렇게 사느냐? 인간 자기가 어떤 존재가치인데 그렇게 사느냐? 이걸 하나님과 일대 일로 생각하면 자기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우주만물 천체까지 다 만들어 놨는데, 그런 자기의 위치 신분 존귀성인데 왜 그런 자기를 함부로 내동댕이치느냐?


일반 이치적으로도 아버지를 무시하면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한다. 순종을 안 한다. 이런 자식은 효자노릇을 못한다. 믿는 자식이라면 주 안에서 순종을 못한다. 이런 자식이 시집장가를 가면 다 제 복장 챙긴다. 그러나 아버지를 사랑하면 말씀에 순종한다.


우리 각 개인이 각자 소원성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거 이전에 아버지 말씀순종으로 들어가 봐라. 네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다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질적인 머리를 가지고는 이것을 따질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은 구별하고 분별하고 취할 수 있는 가치판단의 능력이 저질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해도 저질로 선택을 하는 거다. 인간의 시각성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죄다 꼬아놓고 틀어놓는다. 그러면 무슨 수로 자기가 펴겠느냐? 하나님이 죄다 흩어놓으면 어떻게 할 참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주님의 그 공력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주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도 부모가 피땀 흘려 애써 일해서 번 돈으로 너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학교에 보냈는데 네가 네 마음대로 놀았다면 부모가 너를 훌륭하게 되라고 한 그게 전부 헛 투자고, 부모로 하여금 헛된 삶을 살게 만드는구나.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당신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딱 들어가 있다.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 왜 거룩한 천사들과 대동을 하느냐? 당신 혼자 일대 일로 오는 것보다 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오면 내가 죄 가운데 살았다면 그걸 보는 자기의 얼굴이 어떻겠느냐? 자기 얼굴이 똥이 된다는 그걸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리라.’ 부끄럽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부끄럽게 대해주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낯이 뜨거울까?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다. 인격적인 존재이면서 희로애락도 못 느낀다면, 인격의 수치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짐승이 아닌가? 짐승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도덕성 인격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줄을 안다. 존귀 영광성도 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다 땅의 것을 주장하고 땅의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데 순교를 각오하고 영원히 변치 않고 불타지지 않는 하늘의 것을 증거하는 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증거한 자들 전부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는데 그 때 나만 쏙 빼놓았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가령 학교에 다닐 때 다 이런 저런 상을 받는데 나만 그 반에서 아무 상도 안 받았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인격에 민감한 사람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안다. 모두가 면류관을 썼는데 자기 혼자만 쓰지 않았다면 그 인격적 부끄러움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보다 더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다 받았는데 왜 나는 못 받았나?


주님으로부터 기본구원을 받은 그게 그렇게 부끄럽더냐? 이룰구원을 온전히 잘 이루라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받고, 성령을 주시고, 사건 환경 속에 살게 하신 것이 그렇게 부끄럽더냐? 직장에 들어가서 예수 믿는다는 소리하기가 그렇게 부끄럽더냐? 육신생명에다 영의 생명을 하나 더 받은 것이 그렇게 부끄럽더냐? 생명 하나보다 생명 두 개를 받은 것이 그렇게 부끄럽더냐? 세상 비진리의 세대들이 즉, 족속들이 자기를 위해주니 그것이 그렇게 좋더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 사람 즉, 꼭 집어서 개인적으로 그런 너를 부끄러워하리라.


임시적인 현 세상에서는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사람도 바뀌고, 자리도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신분이 바뀌고, 대우가 바뀌고, 처신이 바뀌고, 세상 마지막 그날에는 우주적 통치자가 바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 때 요셉의 꿈 해석으로 요셉이 바로 왕 다음의 총리대신이 됐다. 말하자면 바로 왕은 허수아비라. 요셉이 워낙 지혜로우니까 ‘내 대신 네가 다 다스려라. 그러나 내 마누라는 내 소관이니까 건드리지 말아라. 딴 거는 네가 다 다스려라’ 했다. 그 바람에 애굽생활 초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호강하며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이 생활이 천국이려니’ 하며 눌어붙게 생겼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이걸 떼어놓아야 하겠기에 떼어놓는 그 방편이 애굽의 통치자를 싹 바꿨다.


그 동안 요셉을 아는 통치자는 요셉을 생각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잘 해 줬다. 그러나 이제 통치자를 고약한 자로 바꿔놓으니 다른 바로 왕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억압 강압 핍박 통치를 막 한다. 나중에 두 살 아래 남자아이를 다 죽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정들이면 안 된다. 조만간에 다 버리고 간다. 눌어붙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 동안에 모든 면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속성을 입는 쪽으로 지혜를 쓰고, 일도 그렇게 계산을 하고 해야 한다. 그게 자기에게 복이다. 딴 생각을 하면 자기 마음부터 고통이요 정신면에 고통이다. 그 얼마나 힘이 드느냐?


힘들게 예수 믿지 말라.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을 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말씀의 이치대로 순종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지혜가 있고 지식이 들어간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이 되는 거다.


세상 마지막 그 날에는 우주적 통치자가 바뀐다. 각 나라의 통치자들은 다 없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이다. 그 날에는 주님이 존귀영광과 거룩한 심판자로 나타나실 텐데 그동안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 좋다고 따라간 자들, 주님을 밀치고 부끄럽게 한 자들,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친구야, 반갑다’ 하면서 얼싸 앉아줄까? 아니면 ‘네가 나를 안다고?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해서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마귀시험을 다 이겨주고, 모든 시험을 다 이겨주고, 모든 핍박을 다 이겨줬는데 네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지 않았느냐? 너는 평소에 나와 인격적 관계성을 짓지 않았으니 나는 너를 모르겠구나’ 하시겠느냐?


그 때 내가 불속에서 그을려 나온 얼굴로 주님을 보면서 ‘주님, 나를 모르십니까?’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장면, 부끄러운 구원, 불에서 그슬리다가 나온 불탈 구원을 생각해 봐라.


그래서 우리가 롯을 분석해 보면 이 롯이 각자 자기를 많이 닮았을 것이다. 롯이 성 중에서 왕 노릇하려고 했던 것처럼 각자 자기 속에 다 왕이 들어있지 않느냐? 또한 롯처럼 남이 만들어 놓은 천국과 같은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고, 그런 곳에서 왕이 되려고 했지 않았느냐? 그러면 그런 곳으로 가면 그게 천국이냐? 아니다.


한국사람들도 보면 자기 사는 위치에서 개발 개혁하며 들어가면 그 나름대로 자기 노력도 들어있고 땀도 있어 있고 한 건데 게으른 사람은 남이 천국처럼 만들어 놓으면 그 안에 쏙 들어가서 천국처럼 살려고 한다. 정말 그거 못 쓴다.


일반적으로 사는 것도 정신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아닌 말로 자기 사는 집이 망가지면 고치면서 살아야지 그러지 않고 다 내버리고 또 새 집으로, 조금 살다가 또 헌 집이 되면 또 새집으로. 자꾸 그런 계산 그거 못 쓴다.


9장

1절-8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그러니까 그 앞의 8장 끝에서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 그 사상을 가지면 그 정신을 따라 내려가는 거다. 사건은 보면 전혀 다른 사건인데 그러나 이런 정신이라야, 이런 예수 믿는 믿음이라야 이걸 볼 수 있다고 하는 게 들어가는 거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시간적 시대적으로는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8장 마지막 절까지의 말씀의 뜻을 알고 내가 그 사상을 가졌다면 ‘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 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러면 자기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란 8장 끝에서 말한 ‘주님께서 어디다 두고 말씀을 하시느냐’ 하는 그 의사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게 꼭 지나간 말 같으나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몇 사람이나 볼 수 있을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이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일까? 물론 당시에는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날 계시적으로 보면 이게 남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자가 볼 수 있겠느냐? 오늘날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 그 사람들인가, 말 잘하는 사람인가, 장기 잘 살리는 사람인가? 누가 권능으로 임하는 그 장면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 갈 수가 있을까?


그 말씀을 하신 후 엿새가 지났는데, 엿새가 지나는 그 날까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제자가 몇이나 될까? 세 제자만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랐다. 높은 산은 신앙의 높은 차원을 말한다. 주님께서 권능으로 임하는 그 장면을 보여주실 수 있는 높은 차원.


그런데 왜 또 거기에 다른 제자들은 안 따라갔을까? 그게 참 답답하다. 그 날을 기억하고, 또한 그 날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주님이 어디로 움직이느냐’ 하고 눈여겨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왜 다른 제자들은 안 따라갔을까? 오지 말라고 한 것일까? 아홉 제자 스스로가 안 간다고 했을까? 아니면 세 제자만 살짝 데리고 가셨을까? 그 면에 대한 이유가 성경에 없는 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성이 있는 것인데, 따라가지 않은 제자들은 신앙의 차원이 영적으로 높이 올라가는 차원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앙의 높은 차원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나 따라가자’ 하는 지명이 없다. 영적 면에 눈치가 빠른 사람은 스스로가 그 차원을 따라 붙는다. 지금 그런 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평지에 계실 때는 따르기가 쉽다. 그러나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아이고, 다리야, 평지에서 하지 왜 구태여 올라갑니까’ 하며 힘들다 귀찮다 변명이 많은 거다.


이걸 실질적으로 우리 생활로 가지고 와서 보자. 주님이 성도 개개인마다에게 어련히 알아서 사건 한경을 주시는 건데, 자기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은 말하자면 높은 산에 올라가자고 하시는 것이고, 올라가서 신비한 장면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은 편하게 살려고만 하고 그런 걸 싫어한다. 다 편하고 자기를 왕처럼 대해주는 걸 좋아한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기가 좋다. 그런데 비바람 불고 번개 치는 밤에 심부름을 가라고 하면 되게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내일 가면 안 될까요? 비 좀 그치고 가면 안 될까요’ 한다. 왜 그렇게 변명이 많으냐?


그러면 날씨가 좋은 날 심부름을 한 게 순종의 마음이 진할까, 비바람 불고 번개 치고 할 때 갖다 오는 게 순종이 진할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어느 때 순종한 것이 순종의 신앙정신이 더 진하냔 말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상황을 주더라도 그걸 주는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의 그 주권을 알아라. 그리고 그 상황에 있어서 그걸 자기가 이길 수 없는 건지, 이길 수 있는 건지를 자기 쪽에서 계산해야 한다. 진리에 순종도 아니면서 ‘더 좋은 걸 주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거겠지’ 하며 백날을 기다려도 안 주신다.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선생님이 시험을 잘 못 봤다고 때릴 때 왜 때리는 거냐? 공부를 못했다고 때리는 거냐, 잘하라고 때리는 거냐? 매를 맞는 자기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희망이 있는 생각일까?


말이 경주할 때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말에 탄 사람이 자꾸 말의 엉덩이를 때린다면 이 말이 사람 같다면 기분 나빠서 안 뛴다고 할 것이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왜 때리느냐? 세상만사가 다 우리에게 깨달을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구원의 주님은 우리로 항상 최고의 높은 경지의 믿음을 갖게 해 주시려고 한다. 지극히 높은 존귀 영광성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누구에게든지 이 소원을 다 갖고 계신다.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입힌 그 자체가 그게 들어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비교해서 보면 거짓된 인도자들은 이건 없이 충성봉사만 시킨다.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추측컨대 베드로는 반석이라. 그러니까 반석 같은 믿음 소유자라야 데리고 가시겠구나 이런 느낌이 온다. 또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이니 장자의 믿음을 갖고자 하는 자를 데리고 가신다는 의미이고, 또 요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라는 뜻을 가졌듯이 여호와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믿음을 가졌다면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주님이 영광중에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자동적으로 스스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가고 못 따라가는 것은 자기 수준에서 된다는 말이다.


주님이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간다는 것은 높은 차원의 신앙의 수준으로 올려주려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모르면 자기 스스로가 가기가 싫은 것이다. 마치 학생이 공부하기 싫으면 놀고만 싶은 것처럼.


목회자들 중에도 말씀의 이치는 깨닫기 싫고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유치하게 목회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인생 나그네 길에서 많은 세월을 낭비하고도 이방인들처럼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걸하는 거지같은 목사들이 많다. 이방인들처럼 세상을 구하는 차원 이게 거지라. 자기가 영적 소경이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옷을 입지 못하고 있는 건지, 옷을 벗고 있는 건지,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주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올라왔더니 능력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주신다. 마지막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능력적으로 맛을 보여주는 것. 우리의 깨달음은 말씀을 이치적으로 따라 올라가서 깨달음이 되면 그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거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