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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과 이스마엘

  • 이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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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이삭과 이스마엘                       

창21:8-13


  예수 믿고 나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주일 지키는 문제입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함께 만나고 놀러 가는데, 이제 꼼짝 없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 힘듭니까? 술 담배 끊는 것이 힘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에 장사 잘되는 가게를 닫고 쉬는 일이 힘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가장 힘든 일은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팎으로 죄의 유혹을 받으며 시달립니다. 믿음이 자라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죄를 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버리고 이겨야만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정말 선한 삶을 살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번번이 죄에 빠지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이러한 갈등과 싸움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육신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만큼 단호한 결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이 싸움을 이기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젖을 떼는 이삭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건강하게 잘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3-4세 때 젖을 떼었습니다. 지금은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에만 모유를 먹이고, 우유를 먹이다가 이유식을 먹이면서 젖을 뗍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젖을 먹였습니다.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젖을 먹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건강하게 자라서 젖을 떼던 날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서 이렇게 자랄 때까지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3-4년 동안 젖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자란 것은 정말 축하해야 할 기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이가 백일이 되면 잔치를 하고, 첫돌을 맞으면 또 잔치를 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아이가 태어나 그 때까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행해졌던 관습이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삭을 괴롭히는 이스마엘


  이삭이 태어난 후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자기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을 아들이 언약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드디어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이 독차지했던 사랑과 관심은 온통 이삭에게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삭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대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첫째 아이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가 받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괴롭힙니다. 동생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밉기도 합니다. 부모가 보고 있을 때는 동생을 예뻐하다가도, 부모가 안볼 때는 동생을 타고 깔아뭉갭니다. 머리카락을 잡고 끌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이런 일과는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몸종 하갈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는 여종의 아들이라 해도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처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여종의 아들은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한 채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후에 생긴 율법에도, 여종이 주인에게서 낳은 아들의 유일한 특권은 종으로 팔리지 않고 자유인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이스마엘은 17-18세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삭을 더 미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9절) 여기서 놀린다는 말은 단순히 놀린 것이 아니라 멸시하고 핍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한 데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어린 동생을 멸시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내쫓으라고 단호하게 요구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10절)


이스마엘을 내쫓으라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한 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라가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지만 않았어도, 사라가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존재하는 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기업을 하나도 물려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기업은 물론 아브라함의 재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족장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족장은 왕과 같아서, 그 집안의 모든 일들을 재판했습니다. 집안사람들의 생사도 족장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족장이 되는 권리를 물려받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기업이 가리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상속받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한하신 은총을 힘입는 것, 큰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 만민의 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물려받을 이 특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이 모든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기업을 물려받는 데 방해가 될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다.


  사라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도 그의 아들이었으며, 하갈도 종이기 이전에 그의 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내어 쫓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일로 깊이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답은 분명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12절) 아브라함은 인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갈등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라가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의 걱정도 덜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절) 이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사람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사람의 큰 약점 중의 하나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별히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자기주장을 꺾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 다시 확인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은 것은 그가 공처가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남편들이 아내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개 신앙적으로는 아내가 앞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도록 세워주신 배필입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부부가 이렇게 서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조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부부가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두 사람이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가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문제에 대해서 대놓고 지적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의 문제는 누가 지적해주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저에게 가장 공포의 대상은 아내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잘한다고 하는데도, 제 아내는 잘못된 것을 여지없이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생각대로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충고라면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유다.


  신약성경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라고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4:22-24)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은 단순히 이복형이 이복동생을 희롱한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8-29)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당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해 순교했으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도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일을 당할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우리가 어떻게 약속의 자녀입니까? 혈통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이삭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인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큰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업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특권과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옛 사람을 내어 쫓으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핍박을 당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이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핍박보다 훨씬 이기기 힘든 싸움입니다. 이 싸움 가운데서 부르짖는 성도의 탄식이 바로 로마서 7:24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이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라가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옛 사람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30)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내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옛 사람을 내쫓는 것입니까?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이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이제 문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은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약속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을 가리키며, 우리 안에 있는 영과 육의 갈등을 가리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내쫓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주장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만 나를 다스리십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육신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세상적이고 죄악된 습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내 생각과 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축복과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을 내쫓으십시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복된 기업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며 죽이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축복을 바라보십시오. 이 영광과 축복에 비하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힘입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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