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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나라를 일구는 경제활동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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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0장 1절~16절

설교제목 : 하늘나라를 일구는 경제활동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또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났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이 되어,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러니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 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1~16)】

 

  <가난한 삶 이야기>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일”, 그것의 쉽지 않음을 생각해 봅니다. 물론 요즘 시대에 하루 세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절대적 가난상태’를 걱정하지는 않지만, 우리 시대의 상대적 다수들에게 가난은 여전히 인생을 옥죄는 거대한 슬픔인 것입니다.


  아니 그런 식의 이야기는 우리 한국사람, 즉 소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려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 땅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아프리카의 백성들, 혹은 제3세계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인류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서 죽어가는, 또는 가벼운 질병에도 죽음으로 내몰리는 ‘우리들의 벗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지금 휴전선 너머의 북한 백성들이 겪는 고초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 있습니다. 제3세계의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울부짖는데, 제1세계의 국가들은 살빼기 열품에 휩싸여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불평등이죠. 또또 있습니다. 제1세계 국가들 중에서 가난한 계층은 저질 인스턴트 식품으로 배불리며 ‘비만’을 걱정하고 있는데,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은 깔끔한 유기농 식품으로 배를 채우며 ‘얼짱 몸매’를 자랑하며 다닙니다. 불평등의 변주곡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귀한 집 자손들이고, 저 아름답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아들딸들인데, 왜 인류는 이런 불평등의 질곡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책 이야기>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었고, 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장이었던 한국전쟁의 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입장이라 그랬는지, 저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왠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부터 소위 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 이래저래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서 커다란 호응을 하지 못했었지요.

  그런데 최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류동민 지음, 위즈덤 하우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조금 달리해 보았습니다. 아니 조금 더 세밀하게 말씀드리자면, 과거에 신문사나 잡지사 류의 ‘안정된 직장’을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그런 정규직 직장에서 떨어져 나와서 소위 수입이 불안정한 ‘막노동 시장’을 경험해 보니까, …… 그런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읽다보니까, 예전과는 사뭇 다른 감흥이 느껴졌습니다.


  그 책의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는 “갖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배분 받는다”라고 주장한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예컨대 능력이 부족하여 일을 많이 못하더라도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는 지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71쪽)】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발전 방향 : 마르크스의 사상>

  마르크스의 사상에 따르면, 인류는 현재 3가지의 사회적 틀 속에 처해져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capitalism, 資本主義], 사회주의[socialism, 社會主義], 공산주의[communism, 共産主義].


  마르크스의 사상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구성원들이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위 자본가들이 독식하는 - 아니 독식하지는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불평등하게 많이 차지하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뭔가 크게 잘못된 사회이지요. 사회주의 사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즉 “각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의 실적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 받는” 사회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이지요. 그런데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가 인류의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 것”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되, 수익의 배분은 ‘능력’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합니다. 기술이 좋은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좋은 젊은이가 더 많이 버는 체제가 아닙니다. 부양해야할 가족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갑니다. 치료해야할 환자가 있는 집은 더 많이 가져갑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적게 가져갑니다. 돈 쓸 일이 없는 사람은 안 가져 갑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상적 사회를 공산주의[communism, 共産主義] 사회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닙니다. 뭐랄까요. 그냥 무슨무슨 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공부하는 차원에서 이런 저런 주의와 사상을 폭넓게 혹은 세심하게 배우려 할 뿐입니다.

 

  <성경 이야기 : 그리고 결론>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포도원 일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포도원의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시면서 차등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침 8시에 온 사람이나, 점심 12시에 온 사람이나, 저녁 5시에 온 사람이나 …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 즉 일당 10만원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배가 하늘나라의 법칙임을 설파하셨습니다. 놀라운 통찰이며 깊이 있는 사상입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아직도 자본주의적 폐단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대사회에 깊은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또 예수의 메시지는 사회주의의 틀을 뛰어넘고 공산주의의 틀조차도 넘어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틀을 너머서서 “능력 자체를 아예 따지지 않는 분배”를 주창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그 노동자가 몇 시간을 일 했는지 혹은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노동자가 단 일분이라도 일을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노동의 유무,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설교의 마무리>

  오늘 이런 설교를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근대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적대적 관계로 싸워왔고, 공산주의적 혁명이념이 어떻게 인민 억압적 독재체재로 변질되었는가를 분명하게 목도해 왔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로 말미암은 비극적 한국 전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런 것들과는 별개로 예수께서 일깨워주시는 ‘하늘나라’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나라, 그 따뜻한 나라, 그 신비로운 나라, 그 행복한 나라에 대한 소망과 도전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이 땅의 나라들이 하늘의 나라로 성화(聖化)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음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늘나라를 일구는 경제활동’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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