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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람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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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0장 17절~19절

설교제목 : 경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람

 

<영성 시>

 

문(問)

 

/ 임인수

 

내가 이 문 앞에서 서서

영원을 향하는 뜻은

십자가(十字架)의 표적을 단

성당(聖堂)이 바라보이는

때문만은 아니다

 

울려오는 종소리

피가 돌아

 

온몸이 평화에

있음이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따로 곁에 불러 놓으시고,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며,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마태 20:17~19)】

 

  <책 이야기>

  최근 읽고 있는 책이『보행』(김영민 지음, 철학과현실사)인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히브히 세계의 역동성, 가변성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그리스 세계의 정적(靜的) 안정성이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는 정적이고 조화적이며, 보다 높은 모든 존재는 변화가 없고 불멸의 것이다.” 또 얼마 전에 읽은 책이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예담출판사)였는데, 거기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히브리의 종교가 결단내 버린 고대 그리스 꽃의 축제가 일본에 살아 있었다.” 그리스인이었던 카잔차키스가 1930년대 일본을 여행하면서 감격에 겨워서 토해낸 말들이었습니다.

  서양문명을 바치고 있는 두 기둥, 즉 그리스 정신과 히브리 정신은 서로 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정신은 정적(靜的)인 것인데 반해 히브리 정신은 동적(動的)인 것이었습니다.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이 둘의 어색한 만남이 비극일까요? 희극일까요? … 글쎄요. 좀 더 탐구해 봐야겠지요!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리에서 지내던 시골뜨기 예수 일행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온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는 그 친구들에게 ‘이제 곧 닥칠 엄청난 소용돌이’를 예고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소이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며,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외다."(마태 20:17~19)


  예수께서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 벗들의 생각과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파란을 일으켰고 파문을 불러왔습니다. 일파만파(一派萬派), 예수의 폭탄선언에 그의 벗들은 술렁거렸고, 급기야 베드로의 결사반대 선언이 터져나왔고, 그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이 이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마태 16:21~23)】

 

  <설교의 결론>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예수 잘 믿어서 재물과 영혼이 큰 축복을 받고, 또 죽어서도 천국에서 영생하겠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한 생각은 그리스적인 사고(思考)일 뿐입니다. 히브리적인 사유(思惟)는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유는 ‘세상을 흔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서의 정신은, 하느님의 뜻은 멈춤(정주, 定住)에 있지 않습니다. 흐름(유목, 遊牧)에 있습니다. 흔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서의 정신은 껍질을 깨는 것이고, 경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거대한 장막 앞에서 무력해진 채로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경계를 넘어 도약하는 것이며, 그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히브리적 사유’입니다. 성서의 정신입니다.


  특히 삶과 죽음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일깨워주신 구원의 방식은,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아서 영혼이 구원 받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의 구원 방식은, 고난의 수행자로서 잠들어 있는 ‘소아(小我)와 대아(大我)’를 모두 흔들어 깨워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희열입니다. 그 해방, 그 자유, 그 초탈입니다.

  그리고 여기 아주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우리가 ‘소아와 대아’를 흔드는 방식은 곧 ‘고난’(苦難)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고난 혹은 수난(受難), 고행(苦行), 수행(修行), 가난(家難) … 자발적으로 고난해지는 방식으로 ‘소아와 대아’를 흔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총칼로 세상을 점령하는 방식이 아닌, 진리의 수행자로서 겸허하게 자발적으로 고난해지는 방식으로 온 우주를 흔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경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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