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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보느냐 (왕하 6: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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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느냐 (왕하 6:14-19) 

어느 가정에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외모는 같았지만 이 아이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아이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이었고 다른 아이는 낙천적이고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부모는 나름대로 아이들의 성격을 바꾸어 볼 생각으로 생일날 한가지의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부정적인 아이에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최신형 게임기와 자전거를 그리고 낙천적인 아이에게는 말똥 한더미를 선물로 주기로 했습니다.

생일날 아침 부정적인 아이는 선물을 받고 기뻐 하기는 커녕 ‘자전거는 몇번 타면 곧 더러워지고 긁힐꺼야’ ‘게임기도 고장나면 사용할 수 없겠지’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아이는 말똥 한덩어리를 보고 그렇게 기뻐하며 깡총깡총 뛰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부는 깜짝 놀라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뭐가 그렇게 신나니?” 그러자 아이는 “말똥을 주신 것을 보니 집안 어딘가에 말도 있을꺼 아니에요?”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몸의 기관 가운데 외부의 것을 가장 먼저 느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은 눈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어떤 사물이든지 사람을 만날 때에 그에 대해 가장 먼저 판단하게 되는 것은 눈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눈이 흐려지면 본질을 보지 못하고 분별력과 판단력을 바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의 모습은 내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왔느냐에 좌우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저와 여러분의 눈이 환하게 밝아져서 모든 것을 바르고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을 당시 북쪽에 있는 아람 왕국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아람 왕은 전면전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게릴라전법이라고 할 수 있는 치고 빠지는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전력을 약화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우리가 아무곳에 진을 치리라’ 하고 작전을 세우면, 어떻게 된일인지 이스라엘이 미리 알아서 방비함으로 자신들의 공격은 계속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아람 왕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찾았는데 알고보니 자신들의 내부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능력의 선지자가 있어서 무엇이든지 다 알고 왕께 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혜로 자신들의 작전을 훤히 꿰뚫듯이 아는 사람, 심지어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말까지도 다 아는 사람’ 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람왕은 엘리사가 이스라엘에 있는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자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즉시 엘리사를 잡기 위해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을 병거와 군사로 포위한 것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똑같은 상황과 눈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 가지의 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 눈은 어떤 눈일까요?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 입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엘리사를 시중들던 ‘게하시’ 라는 종이었습니다.

간밤에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포위하였는데 엘리사의 수종드는 자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가 아람 군대가 온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눈에는 도단 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의 엄청난 군사들과 말과 병거였습니다. 
이것을 보게 되자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15절에 자신의 주인인 엘리사에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라고 하였듯이 지금 아람 군대의 엄청난 수와, 그리고 그에 비해 작고 허술한 성인 도단을 비교하면서 도단의 약하고 작음과 그리고 자신과 엘리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적군의 위세에 눌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게하시가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사의 수종드는 자가 보았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나아가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 그 규모와 크기와 높이와 액수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까? 

사극을 보면 적들과 싸울 때에 자신들이 적군보다 수가 많게 보이도록 하는 전법이 있습니다. 일단은 수가 많으면 상대방은 싸워보기도 전에 기가죽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의 규모와 크기와 높이와 액수가 남들보다 크고 높고 많으면 기가 살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나아보이면 금방 기가 죽고 실망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는 모습이 과연 우리에게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을 때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눈이 있음에도 현실조차도 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도단성을 둘러쌌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아람 군사들의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는 날이 밝자마자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단을 공격하려 했지만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라는 엘리사의 기도로 그들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잡으러 왔지만 앞을 보지 못해 엘리사가 그들에게 가서 길을 인도하겠다고 해도 그가 엘리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엘리사가 그들을 인도한 곳은 도단이 아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하여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꼼짝없이 포위된 상황임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가리워진 아람 군사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시력이 좋은 눈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 조차도 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으며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람 군대의 경우에도 이들은 완전히 눈뜬 장님이 되어 자신들이 잡으려 했던 엘리사의 인도로 적군인 사마리아 성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이 눈이 가리워져 살아갑니다.

내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분별을 못하는 것을 물론이고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뒤에 있는 영적인 의미는 더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세상에는 별별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극동방송에서 나왔던 사연인데 사연을 말한 성도의 남편이 무당과 동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당이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만 해주면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이 남편이 무당에게서 빠져나오지 못 나오는 이유가 만약 그 사람이 본부인에게로 돌아가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당의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무당은 100% 가짜 무당입니다. 

진정한 영험이 있는 무당이라면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빌고 잘 되게 해주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한 남자와 그 가정을 무너뜨리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성도의 남편에게는 엉터리 무당과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뒤에서 가정을 농락하는 악한 영의 궤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람 군대나 이 경우처럼 눈이 있지만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아가 영적인 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눈이 있다고는 하지만 갈 곳도 찾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가는 쓸모없는 눈입니다.
그 눈이 부패한 곳, 음란한 곳, 흑암의 세력이 득실거리는 멸망의 자리로 가게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생각보다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면의 영적인 의미를 아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며 엉뚱한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한분도 이러한 길로 가지 않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세 번째 눈은 엘리사처럼 영안이 활짝 열린 ‘영적인 눈’ 이 있습니다. 

사환이 도단 성을 둘러싼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만 보고서 떨고 있을 때, 엘리사는 도단을 둘러싼 아람 군대 뒤로, 땅과 하늘에서 자신을 지키는 여호와의 군대인 ‘불말과 불 병거’ 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나를 해하려 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강한자가 내 뒤에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여유가 있습니다.

엘리사에게도 그러한 여유로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엘리사는 사환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고 말한 후에 사환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엘리사가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보도록 기도하였더니 사환의 눈이 열리게 되었고 이 사환의 눈으로도 성과 아람군대를 둘러싸고 든든히 지키고 있는 여호와의 군대가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도 이 눈이 열려야 합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잡으러 온 아람 군대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영적인 전쟁으로 사단이 아무리 엄습하려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 뿐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는 ‘제 2의 눈’ 이 있어야 합니다. 

사막에서 장사꾼이 낙타를 잃어버렸습니다. 낙타는 사막에서의 아주 귀중한 재산이자 교통수단이었기에 열심히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사꾼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지나가자 그 노인을 붙잡고 자신의 낙타를 보지 못했는가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라자 노인은 ‘그 낙타는 오른쪽 눈이 안 보이고 왼쪽 앞발은 절름거리고 앞니가 부러졌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의 말에 장사꾼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정확하게 자기의 낙타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사꾼은 틀림없이 이 노인이 자신의 낙타를 감춰두고 있다는 생각으로 노인을 재판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당신은 이 사람의 낙타를 감추고 있는가?” 재판관의 물음에 노인은 ‘아니라’ 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낙타에 대해 그렇게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재판관의 질문에 노인은 천천히 설명하였습니다. 

낙타 주인의 말에 “길의 한쪽만 풀이 뜯어 먹힌 것을 보고 오른쪽 눈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래 위에 왼쪽 앞발의 자국이 다른 발자국보다 희미하게 나 있으니, 왼쪽 앞발이 절름발이인 것을 말해줍니다. 또 뜯어먹은 풀잎이 가운데만 남아 있으니 앞니가 부러졌다는 증거이고, 그 낙타의 앞뒤에 사람의 발자국이 없으니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고 아마도 낙타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잘 관찰할 줄 알았고, 정확한 추리와 상상으로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에게도 이러한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관심과 정확한 판단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는 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군대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제3의 눈’ 즉 영적인 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통치와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풀을 보고 ‘풀이다’ 는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름 모를 잡초 속에도 생명의 신비가 있음을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잡초까지도 키우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 바로 그가 영의 눈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크로스비 여사는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자그마치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원래는 정상인으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6개월 때 유모의 실수로 시력을 잃고 말았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많은 대상과 주제에 대해 아주 신령한 노랫말들을 많이 썼습니다. 

찬219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이 찬송의 가사를 보면,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는 영적인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영적인 눈으로 주의 얼굴을 항상 뵈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찬송가204장에서는 이렇게 노래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즉 그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주님을 뵈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육신의 눈은 잘 보인다 하더라도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제 3의 눈’, 즉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영적인 눈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이고, 그 속에 있는 영적인 원리, 신앙의 원리를 먼저 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기쁨만 넘칩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유혹되지 않습니다. 이런 눈을 가진 성도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오직 감사한 일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걱정, 근심, 염려, 음란, 탐욕은 그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바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1의 시력’ 인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제2의 시력’ 인 그 이면을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눈도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3의 눈’ 인 영적인 시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 믿는자들이 더욱 힘써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눈’ 이 활짝 열려 영적 통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인인 ‘에드윈 올드린’ 이 헝가리를 가서 한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달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 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가까이 느껴지더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올드린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 나의 눈에는 무엇이 가장 먼저 보입니까?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어둔 눈이 열리게 되어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과 하늘 군대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며, 주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힘있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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