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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 (전 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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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 
 

누가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일까요? 요즘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부자를 보고 잘 산다고 말합니다. 부자는 잘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를 보고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것이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가장 잘 사는 인생은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은 다릅니다.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인권과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사람답게 산다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는 큰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기업을 세운 사람들도 있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일을 이루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헛되이 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창조하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시편 19편에 이같이 노래합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번개와 우레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동식물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온 우주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백만 종에 달하는 동식물들도 우연히 생겨나서 진화한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들은 그야말로 작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3장 4절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말해 주는데,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거리에 서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 건물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물 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가운데 저절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집이나 자동차나 가구처럼 한갓 물건도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다면, 살아 움직이는 수백만 종의 동식물이 저절로 생겨난 아메바가 진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니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다할지라도 개구리 한 마리, 파리 한 마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만들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하다니, 지나친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니까 그런 억지를 부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라고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더라도 창조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은 세상이 알아주는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지 않고 “내가 우주에 관해 아는 지식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해 아는 지식보다 적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우주만물의 신비를 알아갈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무한함에 고개를 숙이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법이나 양심을 두려워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죽일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이성 없는 짐승과 똑같이 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한 존재에 불과하다면 짐승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여부가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방법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목적으로 대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존중해 주어야 할 인격체로 대우합니다.

그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즉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시기 바랍니다.(고전 10:31)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님들을 기뻐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아가도록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들이나 새들이나 물고기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인간의 삶속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로 인해 아담은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아니, 아담 뿐 아니라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도 죽고 못난 사람도 죽고, 부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고, 권세가도 죽고 평범한 사람도 죽고, 명예를 가진 자도 죽고 그렇지 못한 자도 죽습니다. 죽음만은 만민에게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방삭은 열 살밖에 살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동방삭을 데리려고 찾아온 저승사자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선처를 구했더니, 저승사자가 동방삭의 명부에 적힌 열십(十) 자 위에 빗금을 하나 그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삭은 천 살을 살게 되었는데, 천살이 되고 나니 얼마나 노련하고 약삭빨라졌는지 자기를 잡으려고 온 저승사자를 먼저 알아보고 변장을 하고 숨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승사자는 번번이 동방삭을 놓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동방삭은 무려 18만 살이나 살았습니다. 궁리 끝에 저승사자는 꾀를 내서 변장을 하고 다리 아래 개천에 앉아서 숯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날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숯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습니다. 하루는 동방삭이 그 다리를 건너다가 이 광경을 보고 궁금증이 생겨 물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는 거요?” “숯을 씻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서 희게 만들려고요” 이에 동방삭이 말하기를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어 희게 했다는 말은 처음 듣소.”라고 하니, 저승사자가 말하기를 “네 놈이 동방삭이로구나”하고 그를 붙잡아 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진리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지라도 한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영혼을 지니고 있으므로 육신의 죽음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됩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낙원과 음부 둘 가운데 한 곳으로 갑니다. 거기서 최후의 심판 날까지 머물다가, 최후의 심판 날에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서 의인은 영생으로 들어가고 악인은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계시록 20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저와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심으로 이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았고, 마귀의 종살이하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방황하던 우리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올바로 알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구원을 생각할 때,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와 성도님들은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파격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와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무슨 원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십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나라는 흥하게 하시지만, 악을 행하는 나라는 멸하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건강과 지혜와 재능을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유익한 재능을 가지고 자기가 영광을 누립니다. 본래부터 그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기 라도 한 듯이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데 필요한 물질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 8장에 보니 “17)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가진 바 모든 유용한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나 자신이 나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라고 하였고, 잠언 16장 9절에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만 형들에 의해서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형들이 은 이십 개를 받고 동생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미디안 상인은 요셉을 끌고 애굽으로 가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이국타향에서 남의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건만, 그의 인생여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보디발의 인정을 받고 그 집 가정 총무가 되어 좀 편해졌나 보다 했더니,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감옥에서 바로의 두 관원장 곧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부탁하기를 “당신이 잘 되시는 날에,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바로에게 나의 사정을 말씀드려서, 나도 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사람이요 여기에서도 옥에 갇힐 일을 행치 않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과연, 요셉의 해몽대로 삼 일 후에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당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고 나자 요셉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된 지 2년 후에, 바로가 심각한 꿈을 두 번 연속해서 꾸었는데 해석을 보일 자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마술사와 현자들을 다 불러 들였으나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해 내어 바로에게 고했습니다. 이에 요셉이 바로 앞에 불려나와 그 꿈을 해석하였고, 그로 인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섭섭하고 낙심이 되었지만, 지나고 보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린 것 역시 때를 맞추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셉의 인생길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도님들의 인생길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인도하시되 선한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거기서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님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악한 자들의 손에서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여러분의 인생길을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이 경외하는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뜻대로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이르기를 “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명령을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처럼 별개의 것으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명령을 지키는 여부를 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하는지를 판단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때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아시고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런즉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시며,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경외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경외했던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위대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은 이같이 간증했습니다.

“7)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 이 시편의 복된 내용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님들의 삶속에 그대로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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