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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슴에 심은 씨앗 (눅 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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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심은 씨앗 (눅 14:12-14)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어느 잔칫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삶이 어떠하셨습니까? 즐겁고 감사한 일이 많았습니까? 우울하고 힘겨운 일이 많았습니까? 노르웨이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주님의 위로가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노르웨이 형제자매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의 바탕에는 폭력이 깔려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진 사람을 동화시키거나 제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참 위태롭습니다. 늘 외줄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합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에녹을 많이 부러워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의 삶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5:24)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에녹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육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그도 또한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원망,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살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삶을 요약하는 한 마디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사실은 그가 분명한 중심을 갖고 살았음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내면에 바닥짐을 마련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닥짐은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 밑바닥에 싣고 다니는 짐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음에 바닥짐’이 있는 사람은 웬만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휘뚝거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바닥짐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생을 즐기지 못하고, 남들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남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비난을 받으면 살맛을 잃고 칭찬을 받으면 우쭐합니다. 그런 이들은 언제 파선할지 모르는 배처럼 위태롭습니다. 그들은 자리와 서열에 민감합니다. 어떤 모임에 가면 제일 어려운 게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상석이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참석자들 가운데 자기 지위에 맞는 자리가 어딘지를 가늠해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 중에서도 지도자급에 속한 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손님 가운데 더 귀한 사람이 오면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면서, 초대를 받거든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청한 사람이 달려와 윗자리를 권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내심으로는 높은 자리를 원하면서도 짐짓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위선일 뿐입니다. 설마 예수님이 위선을 권하셨을 리야 없겠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비유가 대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꼭 문자적으로 일치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을 하나님으로 보면 어떨까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사회적 평판이나 지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누리는 지위에 자족하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네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21:31b)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위선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마음은 자신의 작음을 늘 인식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 누구를 청해야 할까

이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관행을 뒤집는 요청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삽니다. 그래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씁니다. 때로는 선물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타고, 큰 집에 살려는 것도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시無視’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없을 無’에 ‘보일 視’가 결합된 말입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무시입니다. 공공장소에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합니다.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조민정 어린이의 동시에 백창우 선생이 곡을 붙인 <싫단 말이야>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왜 국에다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턴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줘
꼭 그래야 돼

아이도 생각이 있는데 왜 엄마아빠의 방식을 강요하느냐는 항변입니다. 우리가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 남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격적 성숙의 징표입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계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의 신분이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하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오히려 우리가 청해야 할 사람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들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리는 이들입니다. 

가난한 사람,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눈먼 사람…. 이들의 명단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청하라는 말은 시혜를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인생길의 동행으로 여겨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없어도 좋을 사람 혹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자칫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인간됨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분들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함을 통해 인간다워집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인간성의 반대는 야수성이라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남을 보살핌을 통해서만 성숙하게 됩니다. 보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 인간의 등불

며칠 전 신문에서 가수 인순이 씨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미군 제2보병 사단장의 도움으로 자기 인생에 빛을 주었던 한 흑인 오빠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려 38년 만의 일입니다. 동두천 미군기지 근처에 살던 인순이 씨는 어린 시절 얼굴빛이 검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곤 했습니다. 15살의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늘 혼자 앉아 있는 소녀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이었던 로널드 루이스 일병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다 합니다. 흑인인 자신도 많은 차별을 경험했기에 그는 소녀 인순이의 아픔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만나 영어도 가르쳐주고, 옷도 가져다주고, 절대로 꿈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주기도 했습니다. 로널드는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지만, 그가 소녀 인순이에게 심어준 빛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환대의 기억, 받아들임의 기억은 이후에 인순이가 살아가는 내내 그를 지켜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인순이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그를 찾았고 사령관의 도움으로 댈러웨이에 살고 있던 로널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둘 모두에게 그것은 감격적인 해후였을 겁니다. 인순이는 그 오빠를 위해 즉석에서 ‘Amazing Grace’를 불렀습니다. 우리 찬송가로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그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가슴에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인순이 씨는 그 오빠에게 오리 7마리가 새겨진 조각상을 선물했는데, 거기에는 ‘당신 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Without you, I am nothing)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합니다. 19살 홍안의 소년 병사 로널드 루이스는 당시 자신이 한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의 가슴에 인간의 등불을 밝혔고, 그 등불은 또 다른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열아홉살부터 결핵에 걸려 고생하던 그는 여동생을 출가시키는 데 장애가 된다면서 잠시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집을 떠났습니다. 병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는 경북 일대를 떠돌며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불쌍히 여겨서 날마다 찾아가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밥을 주었던 문경의 한 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친절한 돌봄이 권정생이라는 맑은 샘물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복 받는 비결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이것은 정말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이런 이들을 잘 맞이하고 영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그 근본적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넉넉해질수록, 교인수가 늘어날수록 그런 망각은 깊어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으로 맞아들이고 존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이들이 마음 편히 찾아올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냉대와 적대가 넘치는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은 환대의 공간을 만들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손님’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딴 곳에서 찾아온 사람’입니다.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정의입니다. 하지만 그 글자는 ‘주인을 찾아온 사람’ 즉 ‘객客’을 뜻하는 ‘손’에 존칭인 ‘님’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손님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취해야 할 어떤 지향과 태도를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손님으로 영접하라는 말은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는 하찮아 보여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선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마6:3-4a) 나팔 불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찾아가서 가져간 물건을 쌓아놓고 사진 찍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자선 행위를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것은 받은 이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은 그 사실조차 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말은 어쩌면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조차 버리라는 말일 겁니다. 성경은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이 말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한다면 그 또한 순수하지 못한 일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도우면서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의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복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주님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청하라면서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인 듯싶지만 뜻은 명료합니다.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보신다는 말입니다. 은총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가슴에 심은 작은 빛의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씨앗은 언젠가는 아름다운 열매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았다고 하여 모두가 인순이나 권정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많은 결실을 맺듯 그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무더운 여름날, 우리가 누군가의 가슴에 심는 빛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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