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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과 하나님 (창 3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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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않는 소원과 하나님 (창 32:24-32)

TV에 출연하는 어느 개그맨이 있는데 그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160센티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기 키가 작은 것을 소재로 해서 사람들을 웃깁니다. 아마 본인이 어렸을 때는 키가 작다는 것이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남들도 웃기고 자기도 웃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 해서 돈까지 법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 

제가 젊었을 때는 제 개인의 성공과 입신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마는 아비가 되고 보니까 이제는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저의 소원이고 만일 자식이 잘되지 않는데 저만 잘된다면 그것처럼 민망하고 또 자랑스럽지 않고 부끄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능시험을 앞두면 왜 전국의 교회와 성당과 사찰에 기도하는 부모로 가득 차는지 이해가 됩니다. 만일 전국의 종교인들이 그와 같은 열심으로 나라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했다면 벌써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일에는 그런 숫자와 열의를 자아내지 못하지요. 자식을 위한 마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기도는 기도이고 수능시험은 수능시험입니다. 과연 기도를 한다고 수능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얘기냐. 시험은 실력대로 나와야 공정한 것이지 운이 좌우한다든가 기도발에 좌우된다면 그건 공정한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저는 다행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어머님이 계시지만 만일 기도해 주시는 어머님이 없어서 목회가 힘들다든가 인생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야속할 것입니다.

내 기도와 내 믿음을 보고 응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까지 끌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로비가 통한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에게도 연줄이 통할 것 같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만큼은 절대적인 평등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천국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아니고 천국에서조차도 사람의 공로와 연줄이 통한다면 그럼 우리는 금세에서뿐만이 아니고 내세에서도 공정함을 경험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사형수가 사형을 당해서 장례식에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장례식, 여기에서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스펄전 목사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스펄전 목사님이 말하기를 ‘만일 이 청년에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셨다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기도하는 어머님만 계셨더라도 그 청년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청년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 계셨다든가 그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면 정말로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사형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우리 어머니까지 모욕을 주려고 하느냐. 내 비극을 어머니의 책임으로 몰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머님이 얼마나 기도를 했길래 이렇게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냐.’ 다행히 그 청년이 죽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니 망정이지.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말로 공정한 세상은 문자 그대로 사람 자신의 노력, 실력대로 결과를 거두는 세상이지 그게 아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특혜를 베푸신다면 그건 불공정 거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세상적으로도 많이 누리는 사람들 같은데 그게 부족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빌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세상 떠나면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정말로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구나 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이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번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소원이 있고 소원이 있을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어떤 소원은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기억 속에 남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소원이 아니고 이루어주지 않은 소원입니다. 마치 정치인들의 공적은 국민이 다 잊어버리고 실수만을 기억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CIA의 성공은 비밀에 붙이고 실수만 노출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루어진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 추억에 남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말씀드리니까 그렇지 실제로 생각하면 사실 심각한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실망하고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내 성공이 신앙과는 상관없이 결국 내 실력, 내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내가 뭣 하러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내가 뭣 하러 하나님에게 기도하겠느냐. 그냥 일반 사람처럼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실력을 키우고 성공하기 위하여 살면 되지, 내가 뭣 하러 하나님을 의지해서 온유함이라든가 겸손이라든가 인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 별로 내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시고 나는 내 길을 가겠다.’ 이렇게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는 삶이 두렵습니다. 옛날 옛날에 달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요. 원래 같이 있었는데 떨어져 나가면서 달이 지구를 도는 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의 모습을 보면 달이 모습이 어떻습니까. 차갑고 어둡고 흑백세상이고 생명이 없는 돌덩어리에요.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이 달에서 가지고 온 것이 무엇입니까. 돌덩어리를 가져왔습니다.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면 어둡고 차가운 돌덩어리가 돼버립니다. 우리의 심령이 돌처럼 굳어져버립니다. 그럼 대안이 무엇이냐. 이건 신앙인들이 일평생 배워야 될 과정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가르치시던 분입니다. 그러던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셔야 했는데 예수님이 승복하셨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받은 고난을 인하여 온전케 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 이후에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 이전이 아니고 고난 이후에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셔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더 큰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힘들었던 것뿐이지요. 예수님이 이처럼 승리하신 비결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은데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떨어져 나간 사람들 많습니다. 가인이 떨어져 나갔고 에서가 떨어져 나갔고 그 이외에도 기롯유다가 떨어져 나갔고 이런 식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고난을 경험했지만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하나님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승리의 비결이고 그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승리.

오늘 본문의 야곱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에서 가장 신비로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했습니다. 밤새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성경은 사람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구절이 있고 야곱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하고 또 그 장소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이게 그냥 사람이 아닌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어떤 찬송가 가사에는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이 씨름의 대상이 천사였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서 야곱과 씨름을 한 아주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그 사람이 떠나기를 원했어요. 어두운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끝났어요. 이것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야곱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성격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는 씨름과 같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씨름. 누가 신앙을 씨름에 비유하겠습니까. 불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이슬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 씨름이 있다고 말합니다. 씨름은 의지의 대결을 말합니다. 뜻의 대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부딪히는 부분을 말합니다.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에 뜻이 부딪히는 부분이 없다면 여러분은 기계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당연히 부딪히는 면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동시에 씨름은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여자들은 친밀함을 자연스럽게 표시하지요. 서로 허깅도 자주하고 손도 잡고 같이 울기도 하고. 그런데 남자들은 친밀함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툽니다. 남자들에게 너무 허깅을 요구하지 마세요. 남자들은 원래 티격태격하면서 친밀함을 표현합니다. 남자아이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것은 친하다는 얘기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제가 어렸을 때 아침마다 턱씨름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턱씨름, 턱으로 상대방을 미는 건데 늘 제가 이겼지요. 아버님이 이기실 경우는 수염이 너무 뻣뻣해서 따가울 경우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게 아버님이 저와 친밀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어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은 비록 씨름이지만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씨름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에 야곱의 환도 뼈를 쳤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야곱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평생 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씨름하는 사람을 제지하기 위하여 환도 뼈를 치십니다. 그 말은 기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의 기를 죽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하나님에게 대들 것 같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육신의 가시가 있었던 것처럼,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환도 뼈를 치셔서 우리로 온유하게 만드십니다. 

온유함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냥 온유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덤비고 쉽게 삐지고 쉽게 반항하던 그의 성품이 이제는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과 씨름했던 전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결국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26절에 ‘당신에게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야곱의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에요. 왜 하나님이 에서대신 야곱을 선택하셨느냐. 바로 이런 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자신의 운명, 자신의 삶과 겨루려는 투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과도 씨름을 했어요. 하나님이 그를 제재하기 위해서 환도 뼈를 위골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그러나 야곱의 이러한 면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셔서 야곱이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 결과로 어떻게 됐느냐. 복을 얻었어요.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에는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뿐만이 아니고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이름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그것이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다투기만 하고 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처럼 큰 손해가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탓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교회를 욕하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그런 사람들 많아요. 

그런데 일평생 그렇게 씨름을 하는데도 아무런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불행한 것입니다. 야곱이 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와 같은 면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름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은 복을 받아요.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은 뭔가 은혜를 얻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씨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우리는 온유함을 배우게 되고 결국은 복을 얻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에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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