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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8> “윤 선생님, 음대 교수로 발령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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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웰대학교의 유일한 한국 사람은 옥인걸 교수였다. 옥 교수에게 성악을 배웠다. 지휘교수는 보스턴에서 명성을 날리던 헨델앤하이든 소사이어티 지휘자였던 에드워드 길데이였다. 공부는 즐거웠다. 여러 합창단에서 지휘하며 몸으로 익혔던 지휘법에 이론이 더해지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옥 교수는 항상 “성악은 배우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독창회를 해야 한다. 준비하라”고 하셨다. 독창회를 열기엔 실력이 부족했지만 노래는 열심히 외웠다. 늘 노래하며 다니다 보니 학교에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보스턴엔 교회가 많았다. 미국엔 교회가 많지만 유독 역사가 오래된 교회들이 적지 않았다.

매 주일 교회를 순회하며 미국의 교회음악을 듣고 배울 수 있었다. 틈만 나면 선명회합창단에 보낼 악보도 구하러 다녔다. 13박스에 달하는 악보를 수집한 뒤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차가 없어 우체국까지 박스 한 개씩 옮겨가며 13개를 다 보냈는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 반송된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쓰는 위치가 한국과 달랐다. 내 방에 있던 악보를 나한테 보낸 것이었다. 우체국을 열세 번이나 오가면서. 마흔 넘어 시작한 유학생활은 좌충우돌이 일상이었다.

선명회합창단 아이들이 그리웠다. 연을 끊지 않으면 그리움이 커질 것 같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합창단 지휘자를 사임하겠다는 결심을 안고 귀국했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이들 눈빛을 보자 몸이 녹아버렸다. 그만두겠다는 말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중 한국음악협회가 주최한 송년회에 갔다가 중앙대 음대 장영 교수가 “중앙대 학생들에게 합창 좀 가르쳐 주시죠”라고 제안해 왔다. 혼란스러웠다. 공부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 남으면 선명회합창단을 계속 지도할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중앙대 출강을 결정했다.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떨렸다. 하지만 학생들을 만나니 패배주의가 역력했다. 자신감도 없었다. 당시 중앙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는 서라벌예대 음악교육과와 합병된 직후였다. 비주류라는 인식이 강했다. 아무리 칭찬하고 설득해도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한창 도전과 패기로 가득 차야 할 젊은 날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학생들을 보니 안타까웠다.

“내가 잘하는 걸 하자.” 그건 바로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음대생으로만 합창단을 꾸릴 수 없어 이공대와 약대생 가운데 찬양대 활동을 하는 학생들까지 모아 ‘마스터코랄’을 만들었다. 합창단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대로 ‘대학합창제’ 출전을 결정했다.

당시 대학합창제는 연세대 ‘콘서트콰이어’와 이화여대 ‘글리클럽’의 독무대였다. 신생팀인 마스터코랄이 겨루기 위해선 맹연습뿐이었다. 무대는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이었다. 첫 연주회는 떨리기 마련이다. 서로를 격려해 가며 무대에 올라 연습한 대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와 박수소리에 귀가 찢어질 정도였다. 열등감을 내던지게 된 연주회였다.

이뿐 아니었다. 중앙대 마스터코랄의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순회연주며 해외연주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일정이 잡혔다. 학생들과 구슬땀을 흘리던 1983년의 어느 날, 음악대학 학과장이던 채리숙 교수가 전화기가 터질 정도로 흥분해 소리치셨다. “윤 선생님, 우리 대학 교수로 발령 났습니다.” 내가 음대 교수가 됐다니….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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