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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9> 교우의 포천 작은 산에서 공동체 생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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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공동체를 살아가지 못하는 활동가들이 주민들을 향해 가난을 넘어서는 대안이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이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나눔의 집에서 10년 넘게 박봉의 활동비로 지내 온 활동가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이런 고민으로 나눔의 집 활동가들을 위한 공동체 형성을 모색했다. ‘스스로 지속 가능한 가난’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 나눔의 집과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인근의 땅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단돈 100만원도 모아 놓은 게 없는 가난한 활동가, 청년들과 함께 공동체를 위한 땅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서울주교좌성당 교우 한 분이 자신이 소유 중인 경기도 포천의 작은 산에서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다는 반가운 제안을 해왔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고민하던 모임은 상계동 인근의 땅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야 했다. 포천에서 살 수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포천 땅에서 공동체 준비를 해나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땅은 훗날 서울교구로 공동체 건설을 위해 기증됐다.

상계동과 포천의 거리적인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포천 시내에도 새로운 나눔의 집을 세우기로 했다. 포천 나눔의 집은 안식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봉사자들의 피정센터와 치유·안식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당시 서울교구에 제출한 제안서에는 “공간적으로는 분열된 도시와 시골의 활동을 잇고, 계급적으로는 배제된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를 잇고, 환경적으로는 파괴되는 생태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잇는다”고 썼다. 교구의 보증금 지원으로 포천경찰서 옆 공터에 가건물을 임차해 2002년 나눔의 집을 개척할 수 있었다.

서울과 포천을 오가며 생활하던 차에 1997년 외환위기로 초유의 대량실업 사태를 맞았다. 성장이 최상의 복지라는 슬로건 앞에 복지지출에 인색했던 한국사회는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길거리에 나앉는 노숙인이 급증해 위기에 처하게 됐다. 상계동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던 주민 한 분은 월세를 못 내 가게 문을 닫았다. 아내마저 집을 나가자 어린 딸을 혼자 키우기 위해 나눔의 집을 찾아왔다. 많은 주민이 건설 잡부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동네에도 노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 시범사업으로 1996년부터 자활지원센터를 운영하던 나눔의 집은 실무자들의 인건비가 지원됐고 가난한 이들에게 창업을 위한 저리 융자가 제공됐기에 노동자협동운동을 비약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1990년대 초반부터 교류하던 일본 노동자협동조합의 시작을 연상케 했다. 지금은 고용인원 4만명에 이르는 일본 노동자협동조합의 시작은 대량실업 사태로 인한 실업자운동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취로사업을 기초로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며 운동은 발전해 갔다.

한국에서도 노동자협동운동이 소규모 창업을 넘어 전국 차원에서 토대를 구축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공공부문에서는 예산 부족으로, 민간에서는 기대수익이 없어 방치되는 일들을 공공근로사업으로 진행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무료 병간호와 컴퓨터·음식물쓰레기 재활용, 학교청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구축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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