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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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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38:1-7, 창조절 8주, 2018년 10월21일

 

1.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무죄한 이의 고난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욥기를 전체적으로 읽기 힘든 이유는 욥기의 상당 부분이 신학논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욥 이야기는 예상 외로 간단합니다. 전체 42장 가운데서 처음 1,2장과 마지막 42장만 거기에 해당됩니다. 믿음과 삶에서 완벽했던 욥이라는 인물의 운명이 뜻하지 않게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훗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전보다 두 배나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장부터 41장까지 대대분의 내용은 인간이 당하는 이유 없는 재앙에 대한 길고 지루한 논쟁입니다. 욥은 친구 세 명과 논쟁을 벌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당한 재앙의 이유를 죄라고 보았습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젊은 학자 엘리후는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욥을 비난합니다. 욥의 재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는 겁니다. 이런 충고와 비난은 오늘도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듣는 내용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불행은 죄와 관계없다는 겁니다. 자신은 여전히 의롭다고 강조했습니다. 친구들이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욥의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당하는 재난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도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이 여자의 처지에서는 그럴 만도 합니다. 욥 부부에게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행복한 가족 구성입니다. 재산도 상당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졸지에 잃었습니다.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재산을 강탈당했고, 급기야 욥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아내가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지 않으면 하루도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형식적으로라도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라고 인정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끝까지 강변합니다. 욥에게서 모든 사람이 떠나는 건 당연합니다.


욥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친구나 이웃들과의 대화나 논쟁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사실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하고,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확신하면 하나님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럴 바에야 빨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투정이기도 하고 저항이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욥의 운명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명을 미리 맛봅니다. 이는 성서 신앙에서 가장 따라잡기 힘든 신정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전능한 존재라면 왜 무죄한 이들에게 고난이 주어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재앙과 불행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납니다. 어린이 암 병동에서 벌어지는 일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신혼부부가 동시에 교통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와 내전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수많은 비극이 일어납니다. 4년반 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가능한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런 일에 관여되는 게 귀찮기도 하고, 우리의 할 일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과 젊은 학자가 제시한 죄와 시련이라는 논리에 숨어서 참혹한 현실을 회피합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이 끝나는 부분인 30:19-21절에서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이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마지막 발언(31:35)은 다음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이제 그 어떤 논리로도 해명이 불가능한 이 상황을 하나님이 직접 해명하라는 주장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온갖 설득과 호소와 비난에도 기세등등하다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욥 42:5,6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나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무죄한 이들에게 왜 재앙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욥이 불신과 불만과 불가지론과 자기 의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듯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답은 욥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질적으로 깨달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는 그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식을 빌려서 당시 사람들에게 전한 문서입니다. 첫 마디가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는 욥 38:4절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4절 이후로 비슷한 문장이 반복됩니다. 8절은 이렇습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16절에는 ‘바다의 샘’이나 ‘깊은 물 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31절에는 밤하늘의 별이 언급됩니다. 37, 38절이 재미있습니다.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지금의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설명할 수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모든 현상에서 키워드는 ‘땅의 기초’입니다. 세상과 자연의 시원적 깊이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시원적 깊이는 인간 인식 너머에 있어서 초월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하면 그것의 모든 비밀이 풀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건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과학의 본질은 아는 게 많아질수록 알아야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연과학으로 세상의 시원적 깊이를 밝혀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땅의 기초


‘땅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세상과 자연의 시원에 대해서 질문해보셨는지요? 우리는 지금 지구에서 삽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 년쯤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덩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가 내린 다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물리화학적 변화를 통해서 지구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5억4천만 년 전부터 1억년 가까이 지구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캄브리아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조상인 유인원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간 문명의 역사는 훨씬 짧습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에서 살다가 멸종되었듯이 현재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인류도 그런 운명에 떨어질 개연성이 없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인간은 지구 외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지구 외의 행성에 이주한다는 계획은 몽상에 가깝습니다.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인공지능과 결합된 새로운 종에게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태양계에 속한 행성인 지구는 실질적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행성입니다.


태양은 은하계에 속한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은하계에는 1천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밤하늘에 보는 은하수가 바로 그 별무리입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까지의 거리는 대략 2.5광년이라고 합니다. 이런 거리를 계산해내는 우주 물리학자들의 능력이 대단하긴 합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의 속도로 2년 반이 걸리는 이 거리가 얼마나 먼지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우주선으로는 수백 년도 더 걸릴 겁니다. 태양계 외의 행성에 가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묘사하듯이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웜홀’은 공상입니다. 이 세상과 우주가 비밀 가득하니 언젠가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지 모르긴 합니다. 태양은 천억 개의 별로 구성된 은하계의 변두리에 속한 평범한 별입니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천억 개 이상이나 됩니다. 어쩌면 이런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우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대 과학이 알고 있는 것은 바닷가의 모래에 불과합니다. 욥기에 언급된 ‘땅의 기초’를 욥 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여전히 모릅니다.


거시 우주만이 아니라 미시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끼리의 몸이나 사람의 몸이나 모기의 몸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세포로 만들어졌습니다.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물질의 최소 입자인 원자가 나옵니다. 철, 우라늄, 수소, 산소 등이 다 원자입니다. 원자의 결합으로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예컨대 H2O라는 기호로 표시되는 물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의 결합입니다. 일정한 형체가 없는 액체의 물이나 형체가 갖추어진 나무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신기한 겁니다. 원자는 중심에 있는 핵과 핵을 도는 전자로 구성됩니다. 전자 숫자에 따라서 원자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원자 내부는 대부분 비어있습니다. 원자를 큰 교회당으로 비교하면 핵은 교회당 의자 위에 놓인 찬송가의 음표 정도에 불과합니다. 원자의 공간 구조는 태양계의 대부분이 비어있는 거와 같습니다. 원자의 물리적 메커니즘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물리현상에 관해서 사람이 확정적으로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땅의 기초’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 태초, 그 시원성은 짙은 안개가 자욱한 깊은 숲과 같아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비밀 가득하고 신비롭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집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저는 누굽니까? 왜 이 자리에 앉아있을까요? 아무개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시인, 교수, 의사, 목사, 노동자 등등, 자신의 주변 환경과 조건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환경 조건은 일시적인 겁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배아로 자라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전혀 다른 여러분이 확인될 겁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갑니까? 까마득해서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10년이나 20년 후에 우리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살아갈 겁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이미 죽는 사람도 나오겠지요.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런 아득한 것들을 경험합니다. 책 한권이 제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과 연관된 모든 사연들을 추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고, 종이라는 사물에 담기 사연도 ‘땅의 기초’에 닿아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매우 명백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공간에서 경험하는 모든 삶들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이 순간은 우주 전체 시간으로부터 단절된 게 아니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시간과 공간과 사물과 역사와 우리의 운명에 이르는 모든 것들은 시원적입니다. 모든 것들은 태초의 창조 사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욥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세상의 시원성에 관해서 질문합니다. ‘땅의 기초’를 아느냐고 말입니다.

 

욥의 하나님 경험


욥이 하나님을 이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한 이유는 이 세상의 시원성에 대한 비밀을 알고 나니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시비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욥 4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은 종종 토기장이와 질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요즘 수요일에 공부하는 사 45: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역할이 너무 과소평가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자신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몫은 최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현상에 대한 연구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를 키우는 사람은 여전히 소를 키워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농사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욥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경험은 창조의 깊이를, 즉 세상의 시원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앙 전통에 근거해서 욥을 충고하고 판단하고, 결국에는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자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겁니다. 성실하지 않게 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노골적인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기복적이고, 또한 특정한 대상을 혐오하는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북한을 방문할 생각이 있다고 의지를 밝힌 교황에게서 보듯이 소외된 이들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교황을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욥기에 적용시키면 개신교회는 자신들의 신앙 전통과 경험으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자기중심으로 교만하게 다른 이들을 재단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또는 거꾸로 잘난 척하며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의 지식과 논리에 휘둘리어 자책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땅의 기초’에 대해서 질문하신 것처럼 우리 삶과 역사와 세상과 일상이 닿아있는 시원과 근원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욥처럼 이제는 귀로가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여러분에게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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