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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

  • 크리스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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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3EGSBh2KgY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

(삼상13:8-15)

 

 

오늘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절기에 따라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며 성탄절을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는 성탄 장식도 하고, 트리도 하고, 다양한 성탄절 행사를 통해 예수님을 오심을 기다리는 일들을 합니다.

 

저희 작은 누이 집에 강아지 이름은 폴리입니다. 경찰 가족이라, 폴리스의 이름을 따서 폴리 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리 똑똑한 것 같지는 않는데, 명품 강아지라고 합니다. 한번은 밥은 주는 것을 보았어요.

 

밥을 앞에 갖다 놓아도, 주인이 먹지 말고 기다려!’ 라고 이야기를 하면 꼬리를 흔들면서 먹고 싶은데도 참습니다. 주인의 명령이 언제 떨어지나, 그 명령만 기다리고 있지요. 얼마나 먹고 싶으면, 저렇게 꼬리를 흔들고, 음식에 코를 갖다 대고 있을까?

 

기다려! 기다려!‘ 하다가 이제 먹어!‘하면 그때서야 쏜살같이 그 음식을 먹지요. 절대로 주인이 먹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 않고 기다리는 충성심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기다려 보았나요? 무엇인가를 기다려 보았는가요? 참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도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칠일동안의 기다림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주 길고 긴 기다림이었지요.

사울은 왕이 된 지 2년째 되는 해에, 남자 삼천 명을 선발하여 정예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이번 기회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죠.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전세가 이상했어요. 숫자에도 밀리고, 무기에도 밀린다는 것을 알았죠. 블레셋 군대는 병거가 삼 만이고, 마병이 육천이고, 군인은 그 숫자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군인 삼천명을 가지고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세가 불리함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 둘씩 굴과 바위틈에 은신하고, 더러는 다른 땅으로 피난을 가 버렸습니다.

 

사울이 생각한 것이 있었죠. 전쟁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되겠다. 제사를 드리면 두려움으로 흩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 마음으로 해서 전쟁에 나가면 되겠다 생각을 한 것이죠. 그리고, 제사를 주관하고 드리는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렸지요. 하지만 정한 기일 동한에,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사울은 자기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때 사무엘이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물어 봅니다. 왕이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사무엘이 물어 봅니다.

 

사울이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직접 드린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합니다. 첫째는 백성들은 내게서 흩어지고, 둘째는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고, 셋째는 블레셋 사람들은 턱 밑까지 다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불안하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흩어져서 불안하고, 제사를 빨리 드려야 하는데 오지 않아 불안하고, 블레셋 군대가 턱밑까지 왔기에 불안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리 제사를 드리면, 이 모든 불안이 해결 될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울은 자신의 의지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 기다림을 본인 스스로 멈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행동을 보면서 마음속에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 기다림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그 기다림의 목적은 불안 해소요. 전쟁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 볼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2절 말씀에, 부득이 하여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어쩔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죠. 그것이 잘 못 된 것을 아는데,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자나요? 그럼 그 예배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나를 위한 예배인가요? 하나님을 위한 예배인가요?‘ 최소한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사울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예배를 드린 것이죠. 그때 사무엘은 그 예배를 한마디로 평가를 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시작) 망령되이 행했다.

 

하나님이 빠져 있는,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평가는 망령되이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슬픔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하나님의 슬픔은 시작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판단과 행동의 예배 모습이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의 이익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가만히 잘 보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에, 내 생각과 판단이 들어 가 있지요. 당연하지요. 어떤 문제가 나에게 있어요. 그 문제를 위해 예배에 나와요. 그리고 그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려요. 그것이 어찌 잘 못 된 것일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죠. 내 판단과 행동이 예배가 된다는 거예요. 마치 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죠. 내가 중심이 되어 내 판단으로 모든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예배에서 하나님을 위한 예배로 변해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사울이 놓친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다림 이었다는 것입니다. 불안 해소를 위한 예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삶이 예배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의 형태와 그 마음 자세가, 그대로 우리의 삶 가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그 예배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이 들어나고, 결국 나는 그 예배를 통해 전 인격이 하나님께 보여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버렸을까요? 물론 망령되이 이르러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버림이 있겠지만,

 

아마도 하나님은, 그의 전 삶 속에 비춰지는 사울의 모습이, 점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보여 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쩌면 그를 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예배를 위한 우리의 기다림은, 나를 위한 기다림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으로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예배의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희한하게 우리의 마음이 점점 변하여,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내 마음에 진정으로 모이게 된다면, 사실 우리의 불안은 점점 없어집니다. 나의 염려는 점점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 왕이 그것을 알았다면, 전쟁에서 숫자에 밀리고, 무기에 밀려도,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높여 예배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기다렸다면, 어쩌면 사무엘이 늦게 온다 해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가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문제를 바라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적 우세로 승리를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숫자적인 열쇠에도, 무기적인 열쇠에도, 승리는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자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문제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릴 때,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성숙 자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기다림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 기다림은 누구를 위한 기다림일까요?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일까요? 나를 위한 기다림일까요?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이 내 안에 차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오셨는데, 하나님은 무슨 마음으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을까?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 그 예수님을 위해 나는 어떤 마음을 드릴까?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온전한 예배 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 축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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