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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와 영광

  •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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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영광


역대하 24:19-22, 사도행전 7:51-60, 마태 5:10-12                    

2018. 3. 18(순교자기념주일)


사순절 다섯째주일이자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역사적으로 순교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며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죽음으로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서울 양화진에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는 정치 경제적으로나, 위생적으로나 살기 어려웠던 시기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묘역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묘비명들은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루비 켄트릭 선교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켄트릭 선교사는 처녀로 이 낯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8개월 만에 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885년에 왔다가 1890년에 순교한 헤론 선교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며 한국을 알리고 한국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던 헐버트 선교사의 비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젠슨 선교사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은둔의 땅 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고 이곳에 그 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등의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885년 8월 3일에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썼고, 1895년에는 정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곳은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개최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가 해체되고 중요 인물들이 투옥되었을 때 아펜젤러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아펜젤러의 사역은 5년 동안에 체중이 82kg에서 59kg으로 줄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서천 마량포구 앞에서 배 침몰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펜젤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선실로 뛰어들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아펜젤러의 딸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섬기다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양화진에 있는 그녀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기독교의 씨앗


201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개신교는 1천만 명으로 우리나라 제1위 종교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질타와 우려의 소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짧은 시간에 우리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이런 성장은 전적으로 순교자들과 신앙 선진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초대 교부들 중 하나인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너희들은 우리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라. 너희들이 하는 짓이 극심할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큰 효과를 거둔다. 참으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 순교의 피가 흘린 곳에는 더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 힘은 순교자의 피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근 1만 명에 달하는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동란 중에 2,600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전국 곳곳에는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교회당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에서도 그 사실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을 각성시켰습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려고 사람들이 옷을 벗었을 때 이 옷을 지켰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것이 적극적 가담인지 소극적 가담인지는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데반 사건을 계기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이방인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의로운 자의 죽음은 그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고 영향을 미칩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결국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대의 신앙인들은 이런 순교자들과 신앙 선진들의 희생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의 축복과 부흥은 이들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뿌려놓은 밭에서 그 열매를 거둔 것뿐입니다.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단지 양적인 성장의 복만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순교자 정신은 우리의 나태한 삶이나 신앙의 각성제입니다. 목숨을 걸고 진리를 외쳤던 순교자들의 의연함과 순수함을 보며 우리는 다시 순전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순교자는 죽어서 말하는 사람들이기에 순교자가 있는 집안이나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는 남다릅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릅니다. 순교자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신앙이 나태해지려 할 때 순교지를 방문하는 것은 신앙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순교자 신앙


순교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오늘날 과격한 종교 세력들이 테러를 순교라고 미화합니다. 순교자는 타인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영광이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스가랴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대하 24:20)며 외쳤습니다. 스가랴는 생명의 길을 벗어나 사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하나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박해자들을 향한 원망이 없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대하 24:22) 기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순교자 스데반 또한 자신을 비방하고 거짓으로 모함하고 돌로 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하며 박해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교자 정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사랑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진리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순교자는 영어로 ‘마터(martyr)’입니다. 이 단어는 ‘증인(마르투스)’이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기원했습니다. 말하지 않는 증인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순교자는 증인들, 곧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많이 소유했던 자들이 아니라 큰 소리로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외치지 않으면 세상은 핍박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있는데 누가 건들겠습니까? “아닙니다.”“이 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진리입니다.” 하는 외침을 세상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높이 서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행 7:51) 하고 외쳤습니다. 외치지 않는 증인은 증인이 아닙니다.


외치되 순교자들은 추상적으로, 간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대하 24:20) “너희가 살인한 자다”(행 7:52)고 분명히 지목해서 말했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복잡한 신학으로 말하면 아무도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라 지목하며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할 때 세상은 반발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라는 설교만큼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바로 옆에 있는 형제나, 당신을 핍박한 누구를 사랑하라는 설교는 어렵습니다. 추상적인 말은 공허하고 열매를 남길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불의한 권력은 회개하라”고 외쳤으면 아무도 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헤롯을 지목하며 그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했을 때 그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당신들은…’ 하며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외쳤습니다.


때와 장소도 중요합니다. 아무데서나 외친다고 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주일 예배 시간에 어떤 소리를 외친다한들 세상은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공산주의 치하에서, 가혹한 독재 정권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면 세상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과감히 외쳐야 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그곳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는 영광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천국의 큰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내세의 상도 소중하지만 순교와 박해 자체가 영광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시면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팔복의 다른 복들은 미래형이지만 여기 ‘그들의 것임이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천국이 지금 당장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실제 마지막 순간에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인지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행 7:55-56). 예수님을 보는 것, 그것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즐거워하라(마 5:12)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올 하늘나라의 상급도 크지만 진리의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영광은 장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지고 있습니다. 순교와 박해의 순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과 즐거움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내가 옳게 살고 있다는 것, 내가 잘살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는 독립군의 행복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애국지사나 독립군들은 자기 가족, 재산, 안정을 버리고 타지를 떠돌며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조국이 독립되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잃었던 것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생각에서 그러했습니까? 아닙니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그 길이 옳으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기쁨과 보람이 고난보다 더 컸습니다. 신앙인들이 쉽게 타협의 길을 가는 이유는 더 큰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이 열려서 이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교자의 신앙 따라


우리도 이제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시대는 예전처럼 그렇게 박해나 순교가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교자를 흠모하고 기념하는 것으로만 그쳐야 할까요? 그런 점에서 가톨릭에서 정한 순교의 정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가톨릭에서는 순교를 적색순교, 백색순교, 녹색순교로 구분합니다. 적색순교는 스데반처럼 피를 흘리는 순교를 말합니다. 백색순교는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철저한 금욕주의를 지켜나가는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순교”를 말합니다. 녹색순교는 “전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은 스데반처럼 적색순교의 상황은 몇몇 특수한 선교 현장을 제외하고 그리 흔치 않습니다. 백색순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정리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직업과 가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최선은 녹색순교의 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맘몬이라는 거대한 가치관과 권세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순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것이 순교입니다. 어떻게 우리 몸을 드립니까? 이 세대의 정신과 가치관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순교자는 영광스럽습니다. 순교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의로운 길입니다. 순교자의 열매는 풍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와 스데반과 열두 사도들이 그 길을 갔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과 순교자들이 그 길을 따라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릴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은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입니다. 우리 세대가 남길 유산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복된 경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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