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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글 엘리트 패닉, 공산당보다 못한 한국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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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에는 그리고 여기서는 물러서지 말자

사고공화국이라는 불명예는 놀라운 망각 능력에 기초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망각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 피해자 어머니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예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돼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때 성인이었던 사람 가운데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2003년에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때 성인이었던 모든 이들이 그 일을 기억하지만, 2014년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직면해 있다. 2024년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희생자 어머니는 행동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행동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봉사든 데모든...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그런데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

2.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여전히 실종자들을 다 찾지도 못한 시점에서 너무 때 이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할 필요가 있다. 사고현장에서 실종자를 찾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피해자 가족과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일반 대중들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이 보도했듯이 해경은 구조작업에서도 언딘마린인더스트리와 수상한 유착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할 때, 위기 대처 매뉴얼이 없는 사고현장과 대조적으로 경찰은 매뉴얼에 따라 기민하게 대처했다. 합동분향소의 수를 제한하고 실내 설치만을 허용한 안전행정부 지침도 그렇다. 이미 인터넷 공간에서는 국정원이 포기할 수 없다던 바로 그 대국민 심리전이 펼쳐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통령의 합동분향소 방문은 정교하게 연출된 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냐는 논란에 싸여 있다.

영남대 최호선 외래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유족은 정부와 보험사라는 프로들을 상대하는 지난한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족속들입니다. 결말이 미리 보여서 이 잔혹한 글을 씁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셔야 됩니다. 절대로 지치지 마시고 포기하지도 마세요." 실종자들을 다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미 여론 조작이나 의제 관리 혹은 보상의 선제적 처리 등을 통한 출구전략을 구상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특수성도 그런 필요를 느끼게 한다. 세월호 참사는 원인과 대처방식 모든 면에서 시스템 부패와 붕괴의 산물이다. 원인의 추악함도 그렇지만 구조작업마저 더디고 실효성이 없어 단 한 사람의 실종자도 구조하지 못했다. 그리고 재난 방지와 발생한 재난에 대한 대처에 책임이 있는 이들 가운데 양심적이고 헌신적으로 노력한 이 또한 도무지 찾기가 어렵다. 현재까지 우리는 아무런 긍정적 계기, 지옥 같은 재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성의 좋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마저 행정수반의 자리를 이탈해 국민들 사이에 슬쩍 끼여서 개탄을 늘어놓을 뿐인데, 이 모습에 세월호 선장의 모습이 겹쳐오는 것은 나만의 착시는 아닐 것이다. 재난을 둘러싼 풍경이 재난만큼이나 트라우마적일 뿐, 희망의 자양분으로 삼을 만한 유토피아적 계기가 전혀 없다.

이 일그러진 자화상 앞에서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추스르고 재난을 극복해가기 위해서는 미래를 향한 행동,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 열심히 토론해야 하는데, 이 글도 그런 노력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먼저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 몇 가지를 다시 검토해보려고 한다.

3. 재난 상황에서는 대중이 아니라 엘리트가 패닉에 빠진다

먼저 재난과 평상이라는 켤레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재난은 평상이 아닌 중대하고 위험한 사건이 발생한 때를 가리킨다. 역으로 평상은 재난이 없는 때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평상이라 불리는 때에도 재난은 계속해서 발생한다. 예컨대, 한국의 자살자는 매년 약 15,000명 정도로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인데, 이런 상황 자체가 재난의 일종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가족에게 재난은 몇 년간 계속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 또한 재난 피해자이다.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경우 남은 자녀는 재난 상태에 있는 것이며, 몇 해 전 저축은행의 뱅크런 사태나 카드사, 통신사, 금융기관이 반복해온 수천만 건의 개인정보 유출도 재난에 속한다.

세월호 참사와 이런 일들이 다른 점은, 그것이 국지적이고 분산적으로 일어나거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놀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런 종류의 사건에 익숙하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언론의 보도가 그 사건에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상은 재난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재난이 '관리되는' 상태 또는 저강도 재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 '재난'이라고 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사건이 대규모이고, 나쁜 의미에서 '새롭고', 미결 상태의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대중매체에 의해 재난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들, 그러니까 국가와 기업의 간부 또는 전문가 집단에 의한 재난 관리 실패에 전체 사회가 이끌려 들어간 상황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은 그 자체로 이미 엘리트의 실패, 그리고 그들이 운영해온 제도의 무가치함을 입증한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엘리트들은 3중의 패닉을 겪는다. 우선 그들 자신이 패닉에 빠진다. 그리고 재난 피해자들이 패닉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이차적인 패닉이 야기된다. 그들이 패닉에 빠지는 이유는 그들의 무능력, 태만, 실수, 또는 부패가 재난을 통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패닉에 빠진 이들이 대중의 패닉을 걱정한다. 왜 그런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이 패닉에 빠지기 때문에 타자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에 늘 마음에 품은 대중에 대한 편견이 결합한다. 엘리트인 자신도 패닉에 빠지는데 대중은 얼마나 심한 패닉에 빠지겠는가,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정보와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고 결과적으로 이차적 패닉을 새롭게 야기하기도 한다.

4. 패닉에 빠진 엘리트는 무엇을 하는가?

엘리트는 재난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까? 당연히 피해자를 구조하고 피해 복구에서 성과를 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 책임회피에도 더 열중한다. 왜냐하면 재난의 책임이 자신에게 귀속될 경우, 그 동안 엘리트로서 누려온 모든 특권과 권력을 잃기 때문이다. 그는 파면될 수도 있고, 연금이 사라질 수 있고, 형사상 책임까지 질 수 있다. 직접적 책임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책임질 일이 언제 어떻게 뛰쳐나올지 알 수 없다. 지금 해경이나 해수부 또는 안행부 고위 관료들이 어떤 상황일지 짐작해보라. 업계와의 유착을 통해서 퇴임 후를 위해 마련한 특혜적인 자리들이 모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현직마저 잃을 수 있는 무서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회피는 이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다.

책임회피 노력은 변명을 지나서 때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시도까지 나아간다. 자료는 삭제되거나 소각되고 영상이나 음성 파일은 변조될 위험에 놓인다. 만일 이런 책임을 요구하는 대중의 분노가 대통령으로까지 뻗어가고 정치적 정당성 수준까지 미치게 되면, 국가 관료제 전체가 진상 은폐의 동기를 가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그런 상황일 수 있다.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조직이 해경인데, 수사는 검경합동수사본부에 맡겨져 있다. 경찰이 경찰을 수사하는 셈이다. 검찰은 진도VTS에 대한 압수수색을 해당 기관에 예고하고 그 다음날 진행한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검찰이 진상에 접근할 수 있을까? 국정원 간첩 사건 조작은 물론이고 그간의 여러 일에서 보인 행태를 생각하면, 부적절한 지시와 처신을 한 대통령을 향해 대중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제대로 사건의 진상을 밝히리라 믿기는 쉽지 않다.

다른 한편 엘리트는 재난 현장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 통제는 진상 은폐의 측면에서도 필요하고 재난 이후 엘리트가 운영하는 제도가 해체될 위험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재 언딘마린인터스트리에게 구조 작업을 전담하게 하려고 한 해경의 모습에 엿보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즉, 해경이 전적으로 자신이 재난 현장을 통제하고 싶지만, 구조 작업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역량이 턱없이 모자라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다수의 자원봉사 잠수사에게 맡길 수 없다. 그들이 선체에 들어가서 목격한 것들 모두가 모두 자신들을 위협하는 정보가 될 수 있다. 이들의 구조 작업 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민간의 역량이 정부의 능력을 압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엘리트가 운영하는 제도 전체가 위협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과 굳건한 공조체제를 가진 업체에게 독점적 접근 권한을 주려고 하게 된다. 배척된 것은 자원봉사 잠수사만이 아니다. 진성준 의원의 국방부 자료 검토에 의하면, 해경의 조직 이기주의는 사건 초기 해군 특수부대의 투입마저 가로막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구조작업의 효율성은 우선순위가 한참 떨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을 수 있다.

5. 오히려 피해자 그리고 대중의 정신이 맑다

대중이 위험한 상황에서 패닉에 빠져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재난 영화의 문법이다. 예컨대 화재가 발생한 건물에서 불특정 다수가 넘어진 사람들마저 짓밟으며 출입구를 향해 쇄도하다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초래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런 재난 영화의 관습적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공개되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의 사고 당시 동영상에서 보듯이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의외로 침착하고 평정하다. 적절한 지시만 있었다면, 이들은 패닉에 빠지기는커녕 순서대로 서로를 도우며 배를 빠져 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선량한 그만큼 타자와 세계의 선의를 믿기 때문에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이번 사건만큼 그 선량함이 참혹하게 배반당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평정함을 어리석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집단과 대중은 극히 위급한 재난 상황이 아니면 대체로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변명, 책임회피, 진상 은폐 같은 복잡한 동기에 시달리는 엘리트와 달리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하나의 순수한 동기만을 갖는다. 구조, 오직 구조, 그것 하나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돕고 자신을 돕는다. 과거의 번잡한 일들과 미래에 대한 근심은 모두 뒤로 물러나고 그들은 순수한 현재에 머무르며 하나의 관심에만 집중하고 되는데, 이렇게 고도로 집중된 정신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이런 사실은 재난 현장에서 가장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집단은 국가 관료가 아니라 피해자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재난을 통해서 함께 묶이게 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 친구들, 이웃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형성하는 재난공동체임을 말해준다. 통상의 재난에서는 이런 재난공동체가 문제 해결의 주체로 부상한다. 그들은 대개 엘리트가 저지른 실수마저 밀어내며 구조와 복구 작업을 수행하고 희망을 일궈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세월호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런 재난공동체가 정부와 관료의 현장 통제를 뚫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이유가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고도의 전문성과 협동 작업이 요하는 해난사고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해난사고의 특수성이 작용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해경이 자신들의 현장통제를 우회해서라도 구조작업을 펼치려는 재난공동체의 활동을 막기 쉬웠던 점이었던 듯하다. 그 결과는 참혹하게도 골든타임의 완전히 소실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자 가족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 모두가 심각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6.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놀라운 면 가운데 하나는, 위기 상황에서 사태에 책임을 지고 앞에 나서야 할 사람들 가운데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원고 교사와 구조된 뒤 자살한 교감선생님, 그리고 세월호 하급 직원 박지영씨처럼 구조를 위한 노력을 다했거나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정작 책임질 것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다시피 한 이들이었다.

이에 비해 대통령에서 말단 관료까지 모든 단위가 무능력과 무책임과 부적절함을 드러냈다. 특히 국가안보실은 재난에 책임이 없다는 김장수 실장의 발언은 국가 최고위층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재난이었다. 재난 대처 시스템도 어느 것 하나 작동한 것이 없으며, 재난 대응 매뉴얼은 "충격 상쇄형 기사 아이템을 개발하라"는 황당한 말이나 담고 있었다. 부패한 시스템 안에도 소수의 헌신적인 관료나 전문가들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나 위기 상황에서는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런 이를 보지 못한 셈이다.

배는 우리 현존재의 메타포로 자주 사용된다. 사람들은 땅 위에 살면서도 자신의 공동체, 특히 정치 공동체를 배로 표상한다. 그러니 세월호에서 대한민국호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속옷 차림으로 탈출하는 선장과 선원에서 우리 사회 엘리트가 연상되는 것은 불가피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것이 전혀 메타포가 아니라 실재였다는 점이다. 이 총체적 무능력과 무책임 앞에서 "이것도 나라인가"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을 던지게 되면, 우리는 "나라도 아닌 그 나라"를 수선하는 일로 돌아가게 된다. 민주적 법치 국가의 시민으로서 이렇게 일그러진 나라를 고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며, 규범적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책임자를 처벌하고 제대로 된 안전체계를 마련하라는 시민들의 분노 서린 요구가 비대한 국가 안에서 시간이 감에 따라 어떻게 변형될 수 있을지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책임자 처벌은 다른 관료의 승진으로 이어진다. 안전을 위한 여러 가지 규제가 강화되거나 신설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규제는 다시 관료의 권력 강화의 도구가 되고, 그것이 때가 되면 폐해를 드러내며 규제 완화라는 요구를 낳는 싸이클이 반복될 수 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한 예산과 기구는 그저 공무원 자리를 늘린 것 이외에 아무런 결실이 없을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제도와 조직은 이미 경험한 백화점이나 다리, 또는 지하철이나 대형선박 사고는 막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재난, 어쩌면 원전 사고 같은 더 끔직한 사고와 그 앞에서 무력하게 붕괴하는 모습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국가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엄정한 책임을 묻고 개혁을 요구하고 그것의 이행을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보다 더 큰 역량을 가진 것이 사회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7. 재난공동체가 존속해야 한다

재난이 사라지면 통상 재난공동체도 약화되거나 사라진다. 그리고 재난의 피해자들은 개인적으로 그 고통을 삭이며 살아가게 된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그 사건을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만, 정작 재난 피해자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사건을 잊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많다. 재난 후에 이민자가 증가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하지만 애를 써도 잘 잊히지 않는다. 아니 이들은 잊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 얼마나 잊기 어려운지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건의 증언자로 남게 된다. 즉, 이들이 바로 사회적 망각을 저지하는 집단이 된다. 더 나아가 이들만이 재난의 트라우마를 서로 치유할 수 있는 이들이며, 사회와 국가를 향해서 재난 방지를 위한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리를 가진 이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역능을 가진 재난 극복 주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흩어지지 않고 재난공동체로서 응집력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재난공동체가 확장되고 조직력을 갖춘다면, 앞으로도 있을 재난에서 패닉에 빠진 엘리트들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행동 동기를 뚫고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여 재난을 극복하는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많은 재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국가의 개혁을 요구하고 뒤로 물러나오는 일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 자체가 재난에 대처하는 능력을 강화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잘 조직된 국가적 재난 구조 시스템의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잘 작동하리라고 볼 수 없으며, 때로 그런 시스템 자체가 붕괴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앞서 지적했듯이 재난에 직면해 더 명료한 의식을 가진 문제해결 주체는 관료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넘어서려는 노력에는 이들의 자력화(自力化)가 필요하다. 즉, 오늘의 재난공동체가 내일의 재난 극복의 주체로 성장하는 일 또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 재난 피해자들에게 과부하를 거는 말일 수도 있다. 확실히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하고 신뢰감 가는 구조작업, 그리고 위로와 보살핌이다. 이들이 응집력을 유지하며 정부와 보험사에 대해 마땅하고 올바르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법률적 원조도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컨대 <민변>처럼 신뢰할만한 집단이 나서주면 좋겠다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재난공동체를 유지하고 재난 없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법률적 원조 이상의 사회운동적 조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주체로서 분명하게 서는 때까지 공신력 있는 시민단체의 지원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국가를 개혁해야 하지만, 국가의 개혁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 국가는 크고 힘 있다. 하지만 그런 국가도 사회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사회는 항상 국가보다 더 크다. 그 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들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참여할 일이 있게 되며, 그렇게 앞으로 나갈 때 우리는 재난을 진짜로 극복할 수 있다.


8. "성금을 내지 않겠다"

재난 속에서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유토피아적 계기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무기력에 빠진다. 우리는 사태에 분노해야 하고 분노를 견지해야 하지만, 무기력은 분노를 냉소로 옮길 위험을 가진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분노는 "이런 나라가 싫다" 또는"이런 나라를 떠나겠다"는 냉소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냉소의 흐름은 "성금을 내지 않겠다"는 발언에도 비치고 있다.

하지만 재난에는 구조와 복구를 비용이 소요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많은 비용이 든다. 이들은 혈육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생계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어려움은 종종 보험사로부터의 회유에 약해지는 이유도 된다. 더딘 보험금과 국가배상에 앞서 성금이 이들을 보호하고 강인하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사고에서 자원봉사 잠수사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봉사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예컨대 팽목항까지 차에 장비를 싣고 오는데 든 비용이나 장비 사용비용 혹은 구조를 위해 잠수하는 동안의 임금 손실 등이 있다. 이런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재난 시의 구조와 복구 작업을 촉진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자원의 최대 동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최대 동원을 위해서는 봉사가 필요하다. 이 봉사에 희생의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인 희생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들에 대한 비용지급은 물론 국가의 몫이긴 하다.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고 인색한 국가행정에 맡기기보다 사회가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재난 상황에서는 돈보다 시간이 더 희소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난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들의 성금만큼 요긴한 것이 없다. 문제는 성금을 내는 이들의 마음을 개운치 않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점이다. 성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불확실하게 느껴지며, 이전의 재난 성금 사용과 관련된 부정적 언론보도를 접한 기억들이 있다. 재난에 보상과 배상 책임이 있는 기업이나 국가가 이런 성금 뒤로 숨어서 자신들의 비용을 절감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지난해는 대구지하철 참사 10주기였다. 그 때 읽은 기사가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 역대 최고인 710억 원의 성금이 모였는데, 이 성금은 보상금 등으로 쓰이고도 109억 원 가량이 남았다. 그 돈의 상당 부분인 95억 원 정도가 <2.18 안전문화재단> 건립에 쓰일 예정인데, 그와 관련해 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고 발생 10년이 지났는데 재단이 출범해서 활동하기는커녕 갈등 속에 잠겨 있는 상황, 이쯤 되면 성금 걷는 것에 염증이 날 만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금을 내고 너무 쉽게 뒤로 물러났던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성금을 제대로 모으고 사용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꼼꼼하게 보고할 공신력 있는 조직 하나 우리 사회 내부에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 아닐까? 거기까지 사태를 견인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가 성금에 대해서마저 분노하고 그로 인해 무기력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 여기서도 앞에서와 같은 문제가 엿보인다.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것, 국가의 개혁을 요구하고 물러나는 것, 성금을 내는 것에 그치는 것....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9. '트라우마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너머의 삶

당면한 재난을 극복하는 주체는 재난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서 말했듯이 다시 닥쳐올 수도 있는 재난과 싸울 조직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구지하철 참사의 예에서 보듯이 재난공동체를 묶어주고 같은 재난의 반복을 막겠다며 설립을 시도하는 재단이 지지부진을 거듭하고 논란과 갈등에 휩싸여 있다.

<천안함 재단>의 경우는 어떤가. 이 역시 국민성금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는데, 사업 목적 자체가 오로지 천안함에서 순직한 군인과 생존 장병에 대한 지원 사업, 그리고 "호국정신 선양" 등에 한정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천안함 재단이 이번 사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간 천안함 재단이 해온 행사나 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난하는 신문광고 등에 비춰볼 때, 천안함 재단이 재난공동체에 기초해서 사회적 신뢰를 얻을 단체로 발전할 잠재력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더 널리 사례를 찾아보면 우리는 재난공동체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다른 재난에 도움을 주며 사회적 신망을 얻어간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 중에 죽임을 당한 이들과 그 유가족의 상황이 통상적인 의미에서 재난 상황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이야말로 어떤 모델로 생각해볼 만한 재난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민가협이 존재함으로써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아깝게 희생된 많은 이들의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며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억울하게 죽은 자녀가 남긴 민주화라는 과제마저 어깨에 짊어졌다. 짧은 소견이긴 하지만 필자는 아마도 후자가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는 더 궁극적인 동력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가족 또한 민가협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뜻있는 변호사들의 법률지원도 있어야 하고 믿을만한 시민단체의 지원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지원 이전에 이미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에게는 자식의 억울함을 풀어내고 잘못을 징치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내려는 열망이 숨 쉬고 있다. 단원고 2학년 고(故) 박수현 군이 핸드폰에 남긴 동영상을 공개하며 그것을 국민 모두가 공유하기를 바란 박 군 아버지나 역시 핸드폰 동영상을 공개한 고(故) 박예슬 양의 아버지에게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고통이 많은 사회여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이제는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벗어나는 문제를 중심으로만 재난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자기고양 능력 또는 승화의 힘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인간은 외상으로 인해 고통 받지만, 그 외상을 딛고 더 고결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말이다. 예컨대 이소선 여사를 떠올릴 수 있다. 오래전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겪은 이소선 여사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대신에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정신대 할머니들 또한 국가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살아있는 메시지들이 되었다.

인간은 트라우마에 갇힐 수도 있지만, 그 너머로까지 나아가며, 종종 트라우마를 디딤돌로 해서 그러기도 한다. 재난공동체는 우리 모두를 재난 없는 세상으로 이끌 수 있으며, 적어도 혹여 재난이 일어나도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국가에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고 질질 끌려가며 개탄만 하지는 않는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나는 세월호 피해자와 그 가족들, 단원고의 남은 학생들, 재난의 도시가 된 안산 주민들에게 그런 희망의 싹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한다면, 그들이 아프고 외롭고 지치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한다면.... 
아니 그래야 한다. 재난 피해자가 아닌 우리도 그저 아직 재난 피해자가 아닌 이들일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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