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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글 [펌]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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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주의사항
깁니다. 
이 글은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도대체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나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글이므로
관심이 없으신 분은 패스하셔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글 자체가 개신교를 까는 성향의 글이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무작정 까대거나, 비난만 하기 보다는
왜 이렇게 되었나를 살펴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와 대응을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싶습니다.
개독질을 하는 개독도 꼴사납지만, 그냥 무턱대고 죽어라 꺼져라 소멸되어라...하는 것도 꼴사납다고 봅니다.
일베도 마찬가지겠지요...
참고로 글쓴이의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평어체를 씁니다. 친구가 하는 소리로 들어주시길..ㅋㅋ
 

1. 도입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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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국가.
기독교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까이기도 하는 이념이지만,
조선 건국 시기와 중후반까지 유교는 비교적 굉장히 합리적인 이념이었음.
어쨌거나 조선은 이 이념을 기반으로 300년 넘게 국가를 지탱해 왔음.
 
조선이 기독교를 최초로 '목격'하게 되는 때는 조선 중후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난장판이 된 조선 사회가 어느정도 다시 자리를 잡은 시절이었고
영, 정조의 정치적 노력에 의해 그나마 평온했던 시기여서
이 시기를 조선의 '중흥기'로 부르는 이들도 있음.
 
당시 학문을 일삼던 학자들 중에는 중국(청)을 통해 유입되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들이 있었는데,
 
2007032400106_0.jpg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도 그 중 한 명이었음.
열하일기 내용을 보면 청나라 사신단 중 하나로 파견을 갔다가
기독교(천주교) 선교사 등의 활동을 목격한 내용이 나오는데,
 
박지원의 경우 정조 시기의 가장 똑똑한 학자 중 하나였는데,
학식이 가장 높은 건 다른 이들도 있지만,
이 양반의 경우 학문적 호기심이 너무 많은데다가 글쓰는 게 너무 독설적이고 트렌디해서
정조가 직접 "너 글 좀 얌전하게 쓰지?"라고 경고 날리고
거기에 "옙'하고 아닥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봐서
이 양반은 당대의 아래 양반과 같은 개념의 사람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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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 양반이 청나라에 가서 기독교를 목격하고서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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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였음.
 
물론 박지원은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격한 티벳 불교, 그리고 일반 불교 등
청에서 접한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서 모두까기를 시전했음.
오히려 포풍같이 까댄 티벳불교에 비해서는 기독교(당시 용어로는 서학)에 대한 코멘트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음.
참고로 박지원은 계속 환생한다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는 진짜 포풍까기를 시전했음.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 학자들에 의해 '서학'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는데,
중국을 타겟으로 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자로 번역한 성경과 교리 등을
당연히 조선의 학식 높은 선비들이 줄줄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기독교는 그야말로 그냥 전설의 고향 수준의 개소리였음.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서학(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온건해지는 근거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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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왕이었던 정조는 어전 회의에서 서학(천주교)에 대한 논의를 대신들과 하는데
대충 내용은 다음과 같았음.
 
"전하, 요즘 서학이라는 잡스러운 학문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데 어떻게 할깝쇼?"
 
"무슨 내용인데?"
 
"뭐 대충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가 몇 천년 후에 아들을 보냈고
그 아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처형되었는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갔답니다."
 
"..."
 
"..."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되는 헛소리니까 잡스럽다고 하고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껴..."
 
"그냥 놔둬라."
 
"예?"
 
"잡스러운 게 한둘도 아니고 그런 헛소리를 하나하나 다 짚어서 조지자고 하면 동네 점쟁이들이나 무당도 다 족쳐야지..."
 
"..."
 
"대충 보니 불교를 가지고 좀 베리에이션 한 건데, 그런 헛소리를 믿으라고 해도 믿을 놈이 누가 있겠냐. 그냥 놔두면 된다."
 
물론 초기에 서학을 탄압하지 않은 건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인 남인 중 일부가 천주교 신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음.
이는 굳이 기독교에 대한 자신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학문 체계 전체에 대한 자신감이었음.
 
2. 도입과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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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서학이라는 게 종교가 아니라 학문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다보니
요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음.
근 350년 가까이 유학 한가지만을 들입다파던 조선에 새로운 학문이 들어오다보니
학문적 호기심에 이걸 들이파는 선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여럿이 모여서 서학 관련 책들을 연구하는 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했음.
 
그러다가 이 멤버 중 일부가 자발적인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수는 조금씩 늘어감.
전세계 카톨릭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선교사의 직접적인 선교 없이 자발적인 신도가 발생하는 일이 조선에서 벌어짐.
 
연구 대상이었던 '천주실의' 등의 서학 관련 서적이 한자로 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그걸 연구하던 이들은 글줄깨나 줄줄 읽을 줄 아는 양반층
게다가 그 책들은 조선 양반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을 위한 것이어서
대충 한자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어서 이 때의 자발적 신도들은 100% 양반 엘리트층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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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승훈이라는 선비는 청나라 사절단인 아버지를 따라 청에 갔다가
예수회 신부를 찾아가 최초로 세례까지 받음.
당시 예수회 신부들이 화들짝 놀란 건 당연지사.
도대체 조선에 뭘 한 게 없는데 세례를 받으러 찾아오고 다른 신도도 많다고 하니...
 
하지만 이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당시 조선사회와 치명적인 부분에서 충돌을 발생시키는데,
그게 바로 '제사'의 문제였음.
당시만 하더라도 바티칸의 정책은 꽤나 완고해서 제사 등의 타 종교 제례 행위를 금지시켰는데
조선의 보편적인 제사는 타 종교 신에 대한 경배 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예라는 점에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지만
문제는 자발적으로 믿은 이 양반들이 제사를 못 지내겠다고 친인척들과 대판 싸워대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초기에는 정조 이하 조선 정권도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음.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제사에 대해서 개드립을 친 하나만 참수하고 나머지는 그냥 풀어주고 덮어버렸음. 
이게 조선 최초의 박해라는 '신해박해'
 
그리고 두번째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인데,
사실 이 사건은 카톨릭에 대한 탄압이라기 보다는
카톨릭을 빌미로 정조 정권 당시 여당이었던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일종의 정치적 탄압이었음.
물론 이러한 사건을 거치면서 카톨릭은 몹쓸 패륜 종교/학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함.
 
그러다가 대박사건이 발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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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터지는데,
황사영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신유박해를 피해 골짜기로 숨어서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장문의 편지를 적어서 보내다가 들켜버림.
 
대충 문제가 된 내용인즉슨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먹어서 카톨릭을 정상적으로 믿게 해주고,
그게 안되면 프랑스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서 나라를 먹어달라...라는 내용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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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건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 다시 말해 역모죄. 삼족이 멸족되었음.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기독교(천주교)는 조선 사회에서 위세가 급격하게 약화되었음.
양반층은 당연하고 애초에 얄팍했던 서민층 신자들도 대폭 감소.
인신 상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종교라는 게 신에게 빌어 잘 먹고 잘 살게 하자는 건데, 믿으면 모가지인 신이 뭔 신이여...'
라는 서민들의 직관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음.
이건 이후에도 계속 작용하는 일반 대중의 전통적인 현세 중심의 사고방식인데,
이게 천주교에 대해서는 기피의 이유가 되지만, 개신교에게는...
참고로 유교는 철저하게 현세 중심의 사상체계이고
이 사상체계가 400년 가까이 지속된 조선에서 '내세의 보상'은 그냥 즐...의 개념이었음.
 
 
3. 진짜가 나타났다! - 개신교의 등장
 
천주교가 그렇게 개발살이 난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조선은 정치사회적인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음.
때 맞춰서 미국을 포함한 서양 세력도 조선에 대해 간을 보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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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여기에는 미국 군인들뿐만 아니라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도 타고 있었음.
이 양반은 속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통상을 요구하던 이 배의 군인들은 상륙 후 조선 민간인을 학살하다가
분노한 평양 백성들에 의해 배가 박살나고 몰살당했음.
그 와중에 이 양반은 당시 평양감사이던 박규수에게 체포되는데,
분노한 백성들이 그 새퀴 안 내놓으면 너도 쥑인다...라는 엄포에 넘겨줘서
평양 백성들한테 다구리 당해 죽었음.
 
이렇게 초기의 이양선을 타고 오거나 중국 등의 경로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 목사들 중에는
이른바 양아치로 분류되는 이들도 꽤 많았는데,
그 이유는 뭐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성직자에 대한 품질관리(?)가 안되는
개신교의 고유한 조직 체계 때문이었음.
 
카톨릭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조직체계를 통해
해외로 나가는 선교사들의 품질관리가 엄격하게 수행되는데 비해
현재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미국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들은
그냥 대충 잡다한 인생 살다가 할 거 없어서 신학교에 갔다가
대충 목사 자격 획득한 다음 내수 시장 진출에 한계를 느껴
대박을 노리고 해외로 진출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음.
(대원군 아버지 묘에 보물 들어있을까봐 도굴한 것도 선교사였음)
 
현재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은,
한국의 신학교 상당수는 수능과 내신 기준으로 대충 전문대 수준보다 낮은 곳이 많고
거기에 입학하는 애들 중 상당수가 목사, 장로, 집사가 부모인 애들이 쳐놀다가 갈 데가 없어서 대학이랍시고 갔다가
아무런 신앙적 고뇌와 결심 없이 대충 전도사-목사 테크 탔다가 사고치는 거와 비슷하다는 거임.
(아, 물론 들어가기 빡세고 제대로 된 신학교도 있다는 거 알고 있음.)
 
어쨌거나,
이런 사건들 때문에 개신교 역시 초기에는 그리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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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신교가 강력한 미국에 점차 알려지면서
나름대로 품질(?)이 좋고 진정성을 가진 선교사들도 이 땅에 오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언더우드.(알렌과는 다르다 알렌과는...)
 
세브란스 의대를 설립한 알렌은 선교와 의료지원을 빌미로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양아치였던 반면에
언더우드같은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진정으로 조선 백성을 걱정했던 이들이었음.
(언더우드가 세운 연희전문학교와 알렌이 세운 세브란스가 합쳐진 게 연세대학교)
 
4. 일반 대중의 개신교 선호
 
다들 알다시피 미국은 1차 대전 이후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음.
그래서 미국에서 건너오는 선교사들은 일단 백그라운드 자금이 빵빵했음.
 
카톨릭의 경우 바티칸의 기본적인 선교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화였고,
그래서 신부, 수도사 등 카톨릭 선교사들은 대부분 조선 백성과 같은 수준의 삶을 영위했음.
 
하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이 선교 대상 지역을 정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해당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동산 같은 곳에 서양식 교회 건물과 함께 선교사 주택을 짓는 것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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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미국 현지 후원 교회에서 보내오는 자금으로
위와 같은 선교사 주택과 교회를 건축했는데,
이 건축에는 서양식 건축법을 아는 중국인 건축업자들과 조선 백성들이 인부로 참여했음.
 
그리고 그 교회와 주택을 지은 다음 조선 백성 중 일부를 노동자로 고용했고
이들은 교회의 잡일이나 선교사 주택의 하인 노릇을 했음.
물론 그 일은 당시 백성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거의 대기업 내지 공기업 취업 수준이었음.
 
이런 현상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자
조선 백성들의 개신교에 대한 태도가 점차 바뀌어 감.
당시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같은 신을 믿는다는 천주교 신부들은 거지꼴을 해다니는데
개신교 목사들은 으리으리한 교회와 주택에서 쫙 빼입고 살고 있음.
앞서 말했듯이 당대의 보편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현세 중심
유학적 사회분위기 자체가 입신양명이 중요한 가치
당연히 조선 백성들은 개신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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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선교사들의 교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음.
당시만 하더라도 교회에 출석하면 떡 등의 음식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담배 한 갑씩, 막걸리 한사발씩을 나눠주기도 했음.
조선 정부 수명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관청도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하고 있으니
호감도가 상승하는 건 당연지사...
 
참고로, 초기 교회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하지 않았음.
개신교 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금하기 시작한 계기는 국채보상운동
대구 지역의 교회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성격 상
궐련담배는 당연히 모두 수입품이니 피면 필수록 외채가 증가하고
피같은 돈 모아 나라 빚 쌀로 술이나 만들어 퍼마시는 꼴이니
교회에 다니는 어르신들이 담배 피고 술마시는 젊은이들 싸다구를 날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근원임.
물론 국채보상운동이 끝난 이후에도 그 문화는 그대로 남아 전통이 됨.
(논리적인 공격으로 단순히 비난하기에는 좀 거시기한 면이 있음)
 
어쨌거나 조선 말기에 개신교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호감도는 급상승했음.
 
 
5. 기복신앙의 등장
 
이러한 개신교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자체적인 이해(?)가 결정타를 맞은 건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소위 '평양 대부흥'사건이었음.
개신교 교회로서는 영광스러운 사건이지만,
개신교와 관계없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요상한 이 사건은 전말은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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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에 젊었던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서
결국에는 관우를 주신으로 삼는 용한 무당이 된 길선주라는 양반이 있었음.
 
이 양반이 그래도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서
일본에게 넘어가려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모임에 참여하면서
개신교 교회 인사들과 친분을 트게 되는데,
 
당연히 그 인사들로부터 개신교를 전도받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모시던 관우신에게 심각하게 이거 믿어도 되냐고 치성기도를 드렸고
그러라는 답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1897년 개신교로 개종했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이 양반은 개신교에 대해 용맹정진 수련을 했고(...)
나름대로 평양 지역에서 믿음 좋은 장로가 되었음.
애초에 무당 출신이라서 여러 사람들 모인 곳에서 군중을 휘어잡는 재능이 있어서
여러 교회들의 집회에서 MC 역할을 했다고 함.
 
그런데 그 와중에서 평양의 장대현 교회라는 곳에서 여느 때와 같은 부흥회라는 것이 열렸는데,
이게 뭐 부흥회라는 게 미적지근한지라 기도하고 찬송하고 뭐 그러고 있다가
대충 마감하고 다들 집으로 가려던 도중에 이 양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음.
 
그리고 이 양반은 갑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큰 소리로 고백하기 시작했음.
주된 내용은 친구가 죽기 전에 재산 관리를 자신에게 맡겼는데
그 재산 중 상당부분을 자신이 떼먹었다는 거였음.
친구는 이미 죽었는지라 가족을 포함한 아무도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는데
그냥 거기서 대중에게 고해성사를 해버린 거임.
 
한국교회1-1-revival_1907.jpg
 
이 양반이 물꼬를 터버리자
그 다음으로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후속타를 쳐버림.
그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여기서 선교를 왔지만
사실 뭐 어떤 거창한 결심도 없고 고민도 없이
그냥 살다보니 여기로 오게 되어서 지금 있는 것인데
선교와 전도를 한답시고 있는 게 너무 죄스럽다. 
길선주 장로의 고해를 들으니 우리도 죄를 고해야 할 것 같다...
뭐 이런 내용이었음.
명망높은 장로에 이어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포풍같은 통곡과 함께 죄를 자백하니
뒤를 이어 다른 신자들도 다들 일어서서 죄를 고백하기 시작...
 
이게 평양지역에 뒤를 이어 확 번지기 시작하였고 이걸 '평양 대부흥 사건'이라고 함.
그리고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기 시작함.
 
그 뒤로 결국 이 양반은 목사가 되는데,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대 (긍정적인)사건을 터트린 인물이니
오죽 많은 사람들이 휘하에 모였으랴.
 
근데 이 양반은 제 버릇 개 못준다고...
그 이전까지는 없던 요상한 문화를 개신교 교회에 접목하기 시작했음.
 
일단 앞서 언급은 죄의 고백,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통성 기도
이건 사실 무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종교 기법으로
귀신한테 할 말 해라. 솔직히 다 털어놔라...이런 것과 일맥상통하는 기법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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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새벽기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속에서 새벽에 정안수 떠놓고 기도하는 것과 일맥상통
그리고 그 정안수 기도가 우리 자식, 우리 남편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이
새벽기도의 주 내용 또한 유사한 주제가 되는 건 당연지사.
게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사를 지어야 되는 당시 백성들 특성 상
새벽에 교회에 모여 기도를 한다는 건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음.
(일요일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서 낮에 교회에 모인다는 건 사실상 일을 안한다는 거였음.)
 
이게 현대 한국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기복신앙의 공식적 스타트이자
그 이전부터 강화되어 왔던 현세 중심의 한국 개신교 이념의 완성이자 개망 테크의 시작점이었음.
(물론 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영광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고 있음.)
 
 
6. 일제치하 - 애매한 개신교
 
일제치하가 되자 개신교 교회들의 포지션이 애매모호하게 되었음.
이건 나치 휘하 독일 교회들의 입장과도 비슷한데,
전체 사회 시스템이 일본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선교기지로서의 교회 포지션이 애매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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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쨌거나 일제 치하 초기의 개신교 교회들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3.1운동 등의 독립운동에서 개신교 교회들과 신자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음.
 
문제는 그 뒤로부터 시작되는데,
알다시피 3.1운동 이후로 일본은 조선 지배 정책을 바꿈.
소위 '문화통치'라는 건데,
경찰과 군대를 앞세운 이전의 강경한 통치 정책과 다르게
마치 전대갈의 3S 정책과도 같이 풀어줄 건 풀어주고 쪼일건 쪼인다...의 정책이었음.
 
그런데 일본 총독부에서 교회를 살펴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아, 이거 잘 이용하면 눈엣가시가 아니라 우리한테 도움이 되겠다'였음.
 
그 이유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 조선에 뿌리내린 개신교를 잘 살펴보니
원래의 교리는 둘째치고 일반 백성들이 믿는 사상 체계의 핵심이 '내 탓이오'였음.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의 근원이 전체 사회의 모순이나 외부의 핍박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 부족, 성찰의 부족으로 돌리는 인식 체계가 당시 개신교 신자들의 근간이었는데,
이게 일제로서는 무릎을 탁 치지 아니할 수가 없는 신앙 체계였음.
이건 앞서 언급한 기복신앙화 된 특성과 맞물리는 특성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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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제는 교회 설립을 오히려 더 장려하는 쪽에 가까웠음.
물론 대부분 교회는 순수한 목적으로 설립되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가 잘 안 건드리는 조직이다보니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하는
요상한 양면성을 가지는 곳이 되어갔음.
 
그러다가 개신교 교회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결정의 순간을 맞게 됨
 
 
7. 신사참배 - 개신교의 정당성에 대한 결정타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2차대전에 뛰어들면서 조선에 대한 통치방식도 다시 바뀌게 되는데 
다들 알다시피 1931년부터의 이 시기를 '민족말살 통치기'라고 함.
 
교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총독부의 정책은 180도 바뀌어서
일왕에 대한 예와 신사참배라는 퀘스트를 수행해야 교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정책이 수립되었고
교회는 선택을 강요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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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택의 시기에 일부 교파(현재의 고신)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임.
안 받아들이면 당장 그 날 이후 교회는 해체, 목사 및 주요 인사들은 고문 & 콩밥 신세인데
누구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어차피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다 하고 있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 자체는 한국 개신교의 정당성을 그냥 개발살내버리는 사건이 되었음.
사실 일본에 대한 태도를 떠나서 일왕에 대한 예는 둘째치고
신사참배는 타 종교 및 신에 대한 제례라는 점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제사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그토록 개거품을 물던 목사와 장로, 집사들이 신사참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자폭행위였음.
 
사실 신사참배강요와 굴종은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혐오가 시작된 공식적 시점임.
물론 고신 교단이나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요단강 건너신 훌륭한 일부 목사들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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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건 이후부터 개신교 교회는 슬슬 막장을 타기 시작했음.
친일파 목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돈을 모아 제로센 제작비를 기부하는 일까지 막장테크를 탔음.
 
8. 해방 이후 - 반성과 사죄?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해방되었음.
일본에 빌붙던 교회들과 목사 다들 뻘쭘해짐.
뭐 사실 교회와 목사만이 아니라 친일했던 대부분이 뻘쭘한 상황이지만,
다들 친일 청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아실테고...
특히 개신교 교회 입장에서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확정된 순간
'반자이!...아니 만세!'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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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말아드신 장로 대통령 역사의 스타트(나머지 두 명을 맞춰 보시오.)
 이 양반 때문에 친일 청산이 안되어서 생긴 문제는
굳이 교회 뿐만이 아니니 뭐...쩝
그래도 친일 행적이 있던 교회나 목사들이 뻘줌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음.
 
하지만 이 모든 게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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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그야말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리셋해버렸음.
친일이냐 아니냐는 완전 물건너가고
빨갱이냐 아니냐의 시대가 되어 버림.
아직까지도 대다수 교파들은 친일행적이나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는 개뿔임.
 
9. 한국전쟁 이후 - 어? 전쟁이 끝났는데 교회가 더 커지네?
 
전쟁이 끝났음.
교회고 나발이고 다 개발살 수준.
전국민이 먹고 살길은 미국이 던져주는 원조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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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기능이 너무나도 미약한 가운데
이승만은 당대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사를 호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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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은 바로 대한민국 최초 대형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영락교회의 담임목사였던 한경직.
이승만은 이 양반에게 미국 원조물자를 지원해줄테니 구호사업을 해보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한경직 목사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모자 가정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복지사업을 벌이는데, 그 과정의 일환으로 여러 학교들이 생겨남.
 
문제는 이 양반 자체는 아니었음.
이 양반은 몇 가지 논란이 있긴 했지만(주로 정치적인 스탠스에 대한)
청렴하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취지를 가진 목사였음.
하지만, 이 양반을 스타트로 교회들이 대형화되기 시작했고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사립 중고등학교 및 대학들이
결국에는 교회, 혹은 교회의 일부 인사들의 사적 소유물이 되어버린 전초를 만들었다는 점이 문제임.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개신교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함.
 
10. 산업화, 독재의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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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를 거쳐 한국 사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됨.
우선 군사 쿠데타에 의한 군사 독재
그리고 중화학공업으로 시작된 고도 개발, 산업화의 시작.
그리고 당대 사회의 핵심 키워드
'잘 살아 보세'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다시 조선 말기로 되돌아간 것이었음.
당연히 교회의 포지션도 되돌아감.
'현세의 잘먹고 잘 삶을 위한 교회'
게다가 미국의 원조의 통로였으니 개신교의 이미지는
'믿으면 미국처럼 잘 살게 되는 종교'가 되어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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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결정체가 바로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임.
그가 주장한 3박자 구원론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영적으로 편안해진다.'는
당대 사회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이념 체계였음.
여기에 반공을 양념으로 뿌리고
보수적 정치색을 위에 덮으면 현재 한국 개신교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념의 덮밥이 완성되는 거임.
개인의 어려움은 개인의 믿음 부족과 성실성의 부족이 원인이고
역으로 개인의 영달은 믿음과 성실성이 원인.
개인과 사회를 디바이드 해버리는 이 이념 체계는 미국적 사고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
그리고 이 이념체계는 그대로 한국 보수층의 사고방식이 됨.
 
 
11. 세습 - 본격적인 망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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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나마 90년대 중후반까지는 개신교 교회가 대형화되고 세속화 되어도
개신교 교회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음.
원래 그게 기독교건 불교건 이슬람이건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개인 정신의 안정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기여라고 할 수 있는데,
정부 예산에 의한 복지 시스템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개신교 교회 등의 종교단체가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인정해야 함.
실제로 정부 예산을 포함한 전체 복지 사업의 규모에서
개신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고
1997년 기준으로 전체 종교의 사회복지시설에서 개신교가 73.5%를 차지했음.
(카톨릭 17.9%, 불교 5.9%)
앞서 언급한 한경직 목사에 의해 만들어진 월드비전같은 단체가 대표적인 개신교 계통 사회사업 단체인데
이런 단체가 하는 활동은 종교를 떠나 깔 게 못 됨.
 
물론 그 와중에서 쓰레기같은 교회, 목사들에 의한 사회복지시설을 가장한 
개인 이권 챙기기 + 인권 침해 시설의 형태의 막장 시설도 있었지만
사회에 기여한 전반적인 추세는 인정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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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신교 교회가 완전히 망테크를 공식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그래도 상대적으로 순수한 의도를 가졌던 초기의 목사들이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그 초기 목사들의 성공(?)을 벤치마킹해서 교회 덩치만 키우고
사립학교 설립해서 세금 빨아 재산 증식한 목사인듯 목사 아닌 목사 같은 인간들이
그야말로 교회, 그리고 그에 부속되는 각종 조직, 부동산 등을 물려주기 시작하면서 부터임. 
여기서 한국 개신교는 게임이 끝났음. 본격적으로 개독이 되었음.
그 이전에도 사실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나 비난은 많이 있었음.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개신교 교회를 까는게 아무런 양심적 가책이 없는 일이 되어 버렸음.
깔 놈을 까는 게 뭔...
 
12. 다양한 베리에이션 - 자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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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80년대부터 시작된 개신교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기독교와 하등 상관이 없는 사이비 종교의 창궐을 낳았음.
이걸 개신교에서는 이단이라고 철천지 원수 취급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개신교가 이런 사이비 종교들을 만들어 낸 토대가 스스로 된 게 사실임.
대표적인 게 바로 통일교.
교회가 하는 짓을 따라 했더니 글로벌 수준의 재벌이 되었음.
 
개신교 교회 방식의 비즈니스가 돈이 되니
구원파니, JMS니 하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해서
신도를 모으고 헌금 착복하고
착복한 헌금으로 재단이니 학교니 등등을 만들어서 재산을 불리는 일이 수없이 발생했음.
현재 개신교와 혈투를 벌이는 신천지 역시 같은 부류임.
한마디로 개신교는 자기들이 싼 똥과 싸우고 있는 거고
똥과 싸워대니 같은 똥으로 취급당하는 게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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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신도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
현재 추세로 가면 개신교 신도수는 2030년 즈음에 개발살나고
기독교인의 전체는 천주교 신도로 바뀔 추세임.
 
다시 말해서 한국 개신교는 뭔가 획기적인 대변혁이 발생하지 않는 한
앞으로 20년 내에 자연스럽게 폭망하게 되어 있음.
그러고 보니 글을 길게 썼는데 비난할 것도 없었구만
그냥 놔두면 사라질 존재들임.
물론, 개신교 인구가 다시 증가 추세로 바뀌길 바람.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제 다 나름대로 똑똑해졌고
70년대 이전같이 빵 준다고 교회 가던 시절도 아니니
개신교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개신교 교회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이고,
그건 저 종교 자체를 믿건 안 믿건 전체 사회에 좋은 기여를 한다고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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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수 2015.04.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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