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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적 은사에서 유추된 현대 영적은사들

(중지주의자의 신학 안에서의 성령의 독특한 역사를 인정함)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Vern Sheridan Poythress-

전화령 역

 

* 본 논문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해석학 교수인 뻔 포이츠레스(Vern Poythress)의 글로서 1996년 3월 ETS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저널에 실린 내용이다. 성령론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위치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오해받는 점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론에 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표현했다고 보았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더욱이 정암 박윤사도적 은사에서 유추된 현대 영적은사들

http://www.ipeniel.org/zbxe10/1007

2008.06.10 13:25:46 (*.189.188.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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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적 은사에서 유추된 현대 영적은사들

(중지주의자의 신학 안에서의 성령의 독특한 역사를 인정함)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Vern Sheridan Poythress-

전화령 역

 

* 본 논문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해석학 교수인 뻔 포이츠레스(Vern Poythress)의 글로서 1996년 3월 ETS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저널에 실린 내용이다. 성령론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위치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오해받는 점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론에 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표현했다고 보았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더욱이 정암 박윤선신학의 성령론에 대한 확신을 잘 대변해 주었다고 보았기에 관심을 끄는 논문이다.  포이츠레스 교수는 조화 신학(Symphonic Theology)” “모세오경에서의 그리스도의 그림자(The Shadow of Christ in the Law of Moses)” “세대주의자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Dispensationalism)”와 같은 책들을 썼으며 획일적인 관점에 치우치기 쉬운 개혁주의자들의 딜레마를 잘 극복하도록 새로운 통찰력으서 전통적인 개혁자의 신앙을 파수해 나가게 한다. - 역자 주

 

 

오늘날의 영적 은사가 사도들의 신적 권위적 은사와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그 유사성을 나는 주장한다. 분명한 아무 명시가 없기 때문에 사도적 가르침과 성경의 캐논은 신적 권위를 갖는다. 다른 면에서 서로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적 은사가 여전히 교회에서 순수하게 사용될 수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인정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 사이에 중간 노선이 존재한다.

 

  1. 은사의 기독론적 중심

 

  이 견해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중요한 구분을 필요로 한다. 첫째 우리는 성령의은사에 대해 생각하는 성경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

  신약 그 자체가 영적 은사의 신학적 원천이다. 중요한 열쇠가 에베소서4:7-11절에서 발견된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성령의 모든 은사를 주시는 분이다.(11절) 그는 승리하셨고(8절)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기 때문에 그 자신의 풍성한 소유로부터 나눠주신다(10절). 사도행전 2장33절은 교회에 성령을 부으시는 서론으로서 그리스도가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이 그림을 보충시킨다. 그리스도의 성령 충만하심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대로” 충만히 받는다(엡4:7).

  자연히 이런 반성은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유사할 뿐 아니라 종속되는 결론으로 나가게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마지막 위대한 선지자이시다(행3;22-26).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께 종속된 선지자들이 되었다.(2:17-18) 그리스도는 큰 목자이시며(벧전5:4) 교회의 통치자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그는 종속된 목자들을 임명하시며(5:1-3;행20:28) 양떼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돌보는 은사를 주신다(고전12;28; 엡4;11)[목자들]).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다.(마20:28) 역시 그는 섬김의 은사를 주셨고(롬12:7-8) 우리 형제에게 목숨을 다하여 섬기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요일3:16).

  전통적으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 직무, 즉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 분류하는 것이편리할 수 있다. 1 그리스도는 우리(선지자)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왕), 우리를 섬기시려고(제사장) 자기생명을 주셨다. 세 기능 모두가 히브리서 1:1-3절에 함께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우리는 그의 모습으로 옮겨지고 그의 형상을 닮는다(고후3:18; 롬8:29; 엡4:24). 우리는 그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선지자가 되었다.(골3;16) 우리는 우리가 책임지는 영역에서그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왕이다(엡2:6;6:4). 우리는 서로 서로 섬기는 제사장이다(요일3:16).

  적절한 성경적 구절이 보여주기를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모든 방면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엡4:7) 말하는 은사가강한 곳에서 사람들은 교사들을 인정했다.(4:11) 다스리는 은사가 강한 곳에 장로들이나 감독들을인정하였다(벧전5:1-4) 섬기는 은사가 강한 곳에 긍휼히 여기는 봉사자와 수여자가 인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섬김은 특별히 집사의 사역과 일치하도록 제안한 바 있다.(디아코니아라는 “섬김”를 뜻하는 말이 이 사실을 지지한다)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은사의 세 범주는 서로간에 분리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나 그의 백성들의 생애 가운데 전형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선지자적이고 행정과 기적적 능력과 치유의 은사는 왕적이다. 그러나 어떤 은사는 한가지 이상의 것으로 분류되어 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치유의 은사는 치료받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은사이기 때문에 제사장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긍극적으로 선지자적, 왕적 그리고 제사장적 기능은 하나님 백성의 전체의 삶의 관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투명한 복사판으로 나누지 말아야한다.그렇지만 이런 분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신약 속의 은사의 목록들 중어느 하나도 배제시키지 않게 한다.  

                                                       

 2. 은사 받은 자들의 피라밋

 

  은사가 다양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약은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은사를 위한여러 기능적 수준을 인정한다. (다이어그램 1을 보라) 그들은 무엇인가?

 

    다이어그램 1 2

                            영적은사

 

       1단계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2단계 사도적                            사도와 사도적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3단계 특별한 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4단계 일반은사                                   모든 신자들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첫째로 메시야적 은사가 있다.(Level 1)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으로 마지막 선지자이요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자신을 준비하셨다.

  둘째로 사도적 은사 혹은 기초적인 은사가 있다.(Level 2) 그리스도는 사도를 증인으로 임명하셨다.(행1:21-22) 그들은 직접 보고 들은 것에 근거하고 자신들을 영감시킨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여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을 항상 권위적으로 증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구술적 증거로서 사도적 역할을 불연속적으로 수행했다. 사도들과 마가, 유다와 같은 “사도적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섬김은 신약의 정경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감독하는 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결정을 이루었다.(행6:,8:, 10:-11:,15:20) 그들은 불연속적인 왕적 역할을 수행했다. 사도들은 최초의 집사들을 임명했고 섬김과 긍휼의 사역을 수행케 했다.(6:1-7) 이 모든 분야에서 사도들의 역할은 반복될 수 없었다.

  셋째로 우리는 탁월한 반복적 은사를 갖는다.(Level 3) 사람들은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구제의 은사를 가질 때 교회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의 역사는이런 수준을 “특별직”으로 규정했다. 그것은 교회내의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는 단계를 본다.(Level 4) 성경이 보여 주는 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다.

  충분한 신적 권위와 거기에 종속된(영감되지 않은) 은사들과의 구분은 지금 분명해졌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요1:1,20:28) 교회의 주인이시다.(엡5;24) 그의 사역은 충분한 신적 권세를갖는다. 사도와 사도적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위탁된 자들로 그의 권위를 갖는다. 이러므로그들의 말과 공적활동은 신적 권위를 갖는다.(예: 고전14:37, 살전2:13) 특히 그들의 직무수행에 있어서 사도의 말은 구조적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감된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말씀하신것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입 기운을 받은 것이므로(딤후3:16) 절대적 신적 권위를 갖는다.

  역시 성령은 목사들, 교사들, 일반신자들에게 가르치고 말하는 은사를 수여하는데 있어서 종속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신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들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와 완전을 수행하는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은 말씀에 대한 넓은 의미에서 영감 받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령이 현존하심을 인정한다. 우리는 역사하는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사가 적절히 수행될 때 성령이 능력으로임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오류가 있고 성경의 표준에 의해서점검되어야한다. 성령에 의하여 오늘날 사역의 검증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계시의 종결성(히1:1-3)과 사도의 가르침의 근본인 성경(엡2:20) 곧 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카리스마와 비카리스마적 대표자들 모두 이것을 인정한다. 3

     

 3. 말씀과 활동의 근거에 관한 이해

 

  역시 우리는 이미 세운 분류법에 따라서 다른 많은 방법으로 성령 은사의 기능을 분류할 수 있다.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훈련된 은사, 그리스도인을 향한 은사, 세상에 향한 은사(크리스챤 공동체 밖에 있는)로 구분할 수 있다. 4  목적상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인식에 초점을 맞춘 구분을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첫째, 사람들은 성경의 특정 구절에서 그들의 행동 개념을 의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면강해설교를 행한 어떤 설교자는 성경의 어떤 특정한 귀절에 의도적인 근거를 둘 수 있다. 술에 유혹 받은 젊은이들을 상담하는 어떤 장로는 의식적으로 술 취함에 대한 경고 귀절에 근거를 둘 수있다. 개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어떤 집사는 마음에 롬12:15절을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은사의 이런 타입을 추론적인 과정에서 생각해 보자. 그 활동은 성경의 한 구절 혹은 더 많은 구절에서추론되어진다.

  둘째, 다른 때에 사람들은 예측하고 느끼거나, 혹은 직관으로 행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해야만하고 특별한 일을 행해야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떤 상황을 볼 수 있거나 자연스럽게 다시행하거나 혹은 특별한 환상이나 환청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유일한 근거가 되는 성경의 특별한 구절이나 일연의 귀절을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그들의 경험은 그들이 더 이상 분석하지 않은 (아마 할 수 없는) 개인적인 추론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이런 예가 비 추론적인 과정에서 흘러나온다.

  셋째, 사람은 행동의 근거를 부분적으로 의식함으로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성경에 나오는 어떤 모델의 상황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성경적 상황과 평행이지만 비교의 성격을 판단하기에 적합한 모든 요소를 의도적으로 느끼려고 한다. 이런 과정들이 부분적으로는 추론적이다. 우리는 그들을 혼합된 과정, 혹은 창조적 분별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는 추론적이든 비 추론적이든지 다른 한 쪽으로 더 많은 초점을 맞추려 할 수 있다.

 위의 세 Levels은 평가 없이 의도적으로 묘사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든 인정하지않든지 여러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바를 묘사하였다.

 우리는 이런 세 타입의 예를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도적 설교는 추론적 과정을 포함한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28:23-24) 바울은 추론적 과정을 보여주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의존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사도적 설교는 구약의 특별한 본문에 의해서 해석하고 논증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의 청중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바가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기(17:11) 때문에 그들을믿었다.

  계시록과 다른 곳의 이상은 비 추론적인 과정을 묘사한다. 요한은 이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그가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다.(계22:8)

  또 혼합된 과정과 창조적 분별 과정의 가능한 예는 사도행전15장에서 발견되어진다. 사도와 장로들은 분명한 성경에 창조적으로 호소함으로서 부분적으로 모순된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행15:16-18)

  이 세 타입의 과정이 가진 경계선은 분명히 유동적이다. 한 행동을 위한 근거의 의식은 정도의 문제이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다소 의식할 수 있다.

  사도적인 경우, 적절한 추론적, 비 추론적 과정은 모두 영감되었고 신적 권위를 갖는다. 반면에다른 경우, 그런 과정들은 영감되지 못했다. 사실상 그들은 마귀적일지도 모른다. 마귀들은 마4:6딤후2:25-26에서 추론적인 과정을 사용하였고 누가복음4:34, 겔13:7, 12:24절에서는 비 추론적인 과정을 이용하였다. 비 추론적인 과정은 다윗이 슬픔에 빠졌을 때(삼하19:4) 요압이 그의 임무를 환기시키기는 과정에서 나타난다.(19:5-8) 일반적으로 추론적, 비 추론적 과정 어느 것이 내적으로더 탁월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양자는 사도의 모범에 의하면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둘 다 비영감적일 수도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그림과 연결시키는 것은 얼마나 적합한 일인가? 다이어그램 1은 우리가 사도에 의해서 실행된 은사의 유추에 의해 성령의 현대적 은사에 대하여 생각해야한다고 말한다. 5  원리상,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 그리고 혼합적인 과정의 은사 기능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셈이다. 현대적 예는 이런 관계를 분명히 해준다. 어떤 사람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분명한논증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의 은사는 추론적인 과정을 이용한다. 다른 이들은 성경의 오랜 연구와 소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마음에 진리지식으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서 옳은 것을 알고 자신들의 결론을 정당화하는 특정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은사는 비 추론적인 과정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은 전형적으로 어떤 것을 의식하지만 그들의 행동의 모든 성격을 알지 못한다.

  이런 다양한 과정은 구술적 은사 혹은 지식과 언어의 은사와 특별한 관련을 갖는다. 즉 왕적, 제사장적 은사에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선지자적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분명한 구절로부터 나온분명한 이론에 근거하여 우선적으로 알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복음과 일치하는 것의 직관적 의식에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다이어그램 2)

 

 

                          다이어그램 2

 

                    추론적 은사와 비 추론적 은사

 

 

       Level 1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Level 2 사도적                           사도들과 사도적 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아래

 

   Level 3 특별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Level 4 일반은사                                    모든 신자

 



                 추론적  비추론적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다이어그램 1, 2에서 현대은사는 항상 특별은사와 일반은사로 불리우는 Level 3, 4 에 속하는 것을주목하라. 현대 은사는 모두 다 유오하다. 그들 모두는 성경에 의존하고 정경을 더 할 수는 없다.그들은 유추적이고 사도적 은사(2 단계)나 메시야적 은사(1단계)와 일치되지 못한다.

  어떤 예를 생각해보자. Level 2에서 사도적 설교는 특별히 추론적 과정을 포함시킨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추론적 과정을 사용함으로 기록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비 추론적 과정을 예로 제시한다. 6

  Level 3, 4는 현대에 어떻게 진행되는가? 추론적 과정은 현대 설교와 정상적인 성경공부와 가르침을 포함한다. 비 추론적인 과정은 성경적 개념이나 귀절들이 마음에 자발적으로 생기지만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아는 수납자를 알지 못한다. 가끔 어떤 놀라운 예가 생긴다. 꿈과환상가운데 어떤 사람이 세마포를 입은 한 여인을 본다. 그녀는 진흙탕을 걷고 있었다. 진흙이 그옷에 튀어 올랐다. 그녀는 궁정문에 들어갔다. 밖에 서서 그녀는 더러움때문에 슬피울었다. 어떤사람이 그녀에게 아름다운 밝은 옷을 입혔다. 그녀는 옷을 입고 기쁨으로 궁정에 들어갔다. 혹은어떤 남자가 한 천사가 책을 기록하는 장소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 책 위에 그 사람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 아래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들과 자신이 받아드렸던 악한 사상이 기록되어있었다. 어떤사람이 피로 얼룩진 양손바닥을 보이면서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 책 페이지 위에다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읽어라는 한 음성이 들려 왔을 때, “피때문에 그것을 읽을 수가 없나이다”고 그 천사는 대답했다.      

  정말 사도적 설교는 오늘날 설교에 대하여 유추적인가? 확실히 사도적 설교는 영감되었고 절대적이다. 오늘날 설교는 사도적 설교에 첨가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추론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을 유추적이라고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 있어서 이 둘은 정말 유추적이다. 설교자들과 전달자들은 항상 사도의 모본과 심지어 절대적인 예수의 모본에서 교훈을 끌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계시록이 오늘날의 환상, 꿈의 유추인지 아닌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설교의 경우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계시록은 영감되었고 절대적이다. 오늘날 영감,환상은 성경에 더해 질 수 없고 단지 그것에서 추론된 것일 뿐이다. 이런 추론적 성격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예들, 진흙이 묻는 옷과 피가 뿌려진 책의 이야기 속에서 잘 나타난다. 이 둘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용서와 칭의의 가르침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 둘은 성경에서 나온 주제와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가 한 특정한 사람에게 칭의의 진리를 적용한다면 첫째는 더욱 일반적인 것이된다. 둘째 것은 오직 그것의 특별한 적용에 의해서 성경과 동 떨어졌고 모든 사람이 그 메시지의합법성을 인정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환상이라고 부른 것은 현실적으로 성경진리를 그의 생활에적용하시는 성령에 의한 적용일 수 있다”. 7

  사실상 설교문맥에서 우리는 본문을 유추해서 사용함으로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사야 6장에있은 이사야 이상은 절대적이면서 말씀 사역자들의 교훈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날 설교의 모델이다. 고린도전서 12:-14:은 오늘날 영적 생활의 훈련을 위한 기본적 원리가 된다.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은사의 대부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람들은 가끔 다른 특이한 것과 관련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사도적 설교와 계시록이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계시를 포함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할 지도 모른다. 반면에 현대설교와 성경적 환상과 직관은 옛 지식의 되새김을 포함시킨다. 그러나 실제라 할지라도 여기 있는 그 차이는 과장하기에 예민하고 용이하다. 사도적 가르침은 구약과 그리스도생활의 사건들, 예수님의 지상 생애(눅24:25-27, 44-49)에 근거한 것으로 많은 범위를 차지한다. 비록 그 메시지가 처음 듣는 많은 사람에게 새롭게 들릴지라도 절대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계시록은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그리고 다른 성경원천에서 나온 주제적인 재료로 많이 엮어간다. 초기의 사건을 기록함으로서 누가와 사도행전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이 사건에 덧붙인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고 소개한다. 더욱이 신적 권위는 옛것이든 새것이든 아무 데도 없다. 신명기가 어떤 것을 새롭게 소개할 때와 같이 초기의 계시를 반복함으로서 권위적인 것과 같다. 8

  현대적 상황에서 어떤 의미에서 옛것이라 하여도 설교, 이상, 꿈은 다른 것의 새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것들은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전달할 수 있다. 더욱이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적용이 있다.(피가 발린 책의 사람 이름처럼)

  그러면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모든 현대과정은 완전한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추론적이다.현대설교는 성경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한에 있어서 권위를 갖는다. 동시에 현대의 직관, 꿈, 이상,다른 모든 비 추론적 과정을 갖는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과 오늘날 과정에 관한 유효성을 중요하게 취급해야만 한다. 이 원리는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과 관련된다. 추론적 과정의 경우에 있어서 설교자는건전한 교훈 아니면, 이교의 교훈을 설교할 수도 있다. 직관적인 예감이나 꿈 (해석될 때)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현대의 문맥 속에서 추론적인 과정과 비 추론적인 과정은 성경과는 다른 더 많은 가르침을 덧붙일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현대의 환상이나 환청은 설교의 추론적인 과정보다 더욱 놀랍고 더욱 분명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기를 그것은 직접 성경으로부터 나왔기에 무오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신13;1-4, 살후2:9-11절은 이런 말과 모순된다. 현대의 놀라운 어떤 경험도 아무리 특이하고 놀랍다해도 근본적으로 성경에 덧붙여질 수는 없다. 사실상 그것은 반대되는 기적일지도 모른다. (살후2:9-11의 의미에서) 또는 그것이 성경적 진리의 반복일 수도 있으나 여전히죄악된 인간의 수납으로 경멸을 당할 수도 있다. 아니면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다음을 보라). 아니면 그것이 진리와 비진리를 섞은 혼합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무오한표준으로 믿고 이런 모든 경험을 시험하는 것이다.

 

4. 내용을 위한 추론적 초점들

 

  우리는 하나의 최종적인 명료성, 즉 과정보다 오히려 내용과 관련된 구분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말하려는 과정에 관하여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내용에 주의를 기우려야한다. 이런 내용은 성경의 내용을 다시 표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를둘러싼 상황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하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둘의 결합일 수도 있다.

  (1) 사람들은 교훈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명하는 바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언어의 내용을 교훈적 내용(teaching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2)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 주변에 일어나는바를 우리에게 말한다. 또는 그들은 과거에 일어난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또는 (그들이 어떤 것을예언했다면) 일어날 것을 말한다. 이런 언어를 상황적 내용(circumstantial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3) 사람들은 성경적 가르침과 상황적 가르침, 둘 다를 결합시키는 내용을 목표로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성경이 현재의 상황에 적용되는 바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이런 언어를 적용적 내용(applicatory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다이어그램 3을 보라)

  신약 안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바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든지 역사에 대하여 말하든지 그들의 상황에 대하여 말하든지 적용에 대하여 말하든지 그것은 교훈적 내용이다. 그러면 상황적 내용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우리의 현재적 상황에 적용하려고 할 때 들어온다. 신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삶에 하나의 분별 방법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도록 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접한다.(엡5:16-17, 롬12:1-2) 이런 적용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필연적으로 상황적 내용과 적용적 내용을 다루어야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며, 그런 경우에 역사적 이야기는 분명한 신적 보증이 없이 비 영감된 사람들과 행동을 포함한다.

  첫 예로서 역대하 25:3-4절의 내용을 생각해보자.  나라가 굳게 서매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함이라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것이라 오직  사람은 자기의 죄를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여기 묘사된 행동가운데 우리는 세 종류의 내용을 발견한다. 4절의 첫 번 원리를 생각해 보라 아비를 죽이지  것이요 오직 각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그러나 이 원리는 신명기24:16절에서 인용한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교훈적 내용의 실예이다. 아마시아는 그가 분별하기 전에 이런 교훈적 내용을  환기했을 수 있다.

  둘째로 32절은 아마시아가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암살에 대한 사실들을 발견해야만 되었다고 말한다. 그와 그의 신하들은 율법의 정한 과정을 따른다면 요아스의 죽음의 사실을 충분히 확신해야만 했다. (참고 신19:15-21) 이 사실의 확인은 상황적 내용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아마시야는 그문제에 관한 진리를 확신했으나 그의 진리지식과 진리의 진술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그것은 단순히 보편적 지식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살해 행동은 적용적 내용을 표함한다. 그런 수행 에서 아마시야는 신24:16절로부터 교훈적 내용을 포함시킨다. 더욱이 살인에 관한 교훈적 내용(창9:6)과 이 특별한 내용의 유죄에 관한 상황적 내용인 신24:26절의 교훈적 내용과를 연결시킨다.

  역대하 25:3-4절의 전체의 내용은 영감되었기에 교훈적 내용의 실예이다. 그러나 아마시아의 직무 가운데 사실적인 정보의 초기 사건과 변동은 영감되지 못했다.

 

                        다이어그램 3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

 

       Level 1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Level 2 사도적                           사도와 사도적 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아래

 

   Level 3 특별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Level 4 일반은사   교훈적내용

                      적용적내용

                      상황적내용                     모든 신자

 

           

 

                 추론적  비추론적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적인 실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예를들면 왕상1:43-48절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관한 요나단의 비 영감된 기록에 대한 영감된 기록이다. 1:43-48절에서 그것의 영감된 기록과구별된 요나단의 언어는 상황적 내용을 갖는다. 이런 기록은 아도니아와 그의 손님들의 적용적 활동의 근거가 되었다. (1:49-51) 마찬가지로 사사기20:29-32은 적용적 내용의 경우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싸워 승리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하셨다.(20:28) 그러나 매복에 대한 그들 계획의 특징은 분명히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령관들은 군대의 전략과 베냐민이 기대 하는 바에 관한 상황적 지식을 설명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상황을 분별하는 신적 기초이다. 성경의 교훈은 오늘날 성령의 교훈적 역사의 기초이다. 그러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성령이 우리 자신과 상황에 관한 세속적인 교훈을 포함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욥32:8 시94:10, 잠1:2-7) 넓은 의미에서 성령은 아마시아를 그의 아버지 살해에 관한 진리를 아는 자리로 인도하는 도구적 역할을 한다. 성령은 그들이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대장관에게 제공하셨다. 잠언2:6절이 가르치는대로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했다. 여호와로부터온 이런 지식은 잠언의 나머지가 특별히 말하는 일생생활의 지혜와 지식을 포함한다. 모든 지식은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온다.

  물론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 특별한 권위를 갖지 못한다. 반대로 성경은 신적권위를 소유한다. 그래서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의 상황과 성경시대의 상황에 관한 성경 진술 사이에 큰 간격이놓여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분명한 관계가 존재한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우리 자신시대와 같이 문제와 고민과 상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원리에 대한 그들의 적용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우리의 성경적 적용과 평행을 이룬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훈하는데 간섭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 원리적지식과 우리가 응답해야만 하는 특별한 상황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신다.  



5. 현대의 카리스마 은사에 관한 질문

  우리는 지금 현대 카리스마 은사를 우리의 일반적 구조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 카리스마와 비 카리스마 양자 사이에 여러 종류의 은사가 여러 과정을 통하여 활동한다. 그들 모두를 살피는 것은불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모순된 은사의 종류에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특별히 카리스마그룹이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들, 방언 통역하는 은사로 분류하는 구술적은사에 대해서 더욱 더 그러하다.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이들은 예언, 영 분별, 방언 은사들은 오늘날 계속된다고 믿는다. 반면에다른 이들은 그것들이 사도의 사역과 특별계시의 완성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9 필자는 현대 카리스마 은사는 영감된 사도적 은사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을 신약에 사용된 것들과동일한 용어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 할 수도 있다. 나는 용어에 대한 논쟁보다 오히려 현대은사가 실제적으로 다이어그램 3의 구조에서 실제적으로 행하는 것을 직접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우리의 처음 분류에 의하여 이 모든 모순된 은사들은 비 추론적 과정에 속한다. 그들의 기초가 더욱 모호하고 개인적이다. 즉 그 기초는 비 추론적이며 직관적이다.

  반면에 추론적 과정은 그들이 성경에 호소하기 때문에 모순 될 수가없다. 물론 추론적 과정은 여전히 오류적이다. 교리적으로 건전한 설교자가 이단교훈을 퍼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성경이 호소하는 그럴듯한 논의를 줄 수 있다면 더욱 위험해질수 있다. 그래서 추론적인 과정은 여전히 최종 표준인 성경으로 점검되어야한다. 그러나 성경을믿는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을 설명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원리상 이런 과정과 연결될 수 있다.

  비 추론적 과정은 문제들을 제시한다. 어떤 은사론자들은 그 기초가 더욱 개인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이며 다른 과정보다 오류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이런 생각이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이미 관찰했다. 누가복음은 계시록보다 덜 영감된 것이 아니다.더욱이 특별히 기적적인 것이라도 반대의 자료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살후2:9)

  그래서 우리의 일반적인 영적 은사에 의하면 추론적이고 비 추론적인 은사는 단순히 특별하지않은 보통은사들과 함께 한다. 모든 은사와 같이 그들은 성경과 일치된 것으로 점검되어야한다.(고전14:37-38)

  그러나 이런 비 추론적인 경우는 성령의 은사로 불러야하는가? 우리는 이미 시94:10, 욥32:8잠2:6절에서 인간생명의 창조자요 섭리주이신 성령이 그들이 가진 모든 지식을 주시는 분이심을관찰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은사들이다. 더욱이 이런 일을 “은사”라고 한 것은 우리가그들을 무오하다고 볼 수 없는 “은사”를 가리킨다. 설교의 은사가 참되다 할지라도 그 은사가 인간의 죄와 성향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에 현대설교자를 무오하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비추론적 은사에도 적용된다.

  많은 비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이 주장하고 내적으로 점검할 수 없기 때문에 비추론적인 과정의문제를 갖는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대하여 확고한 바를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교회의 기초적인절대적 역할을 혼란케 할 위험으로 나가게된다.

  그러나 비 추론적 과정의 모든 예가 같은 문제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방언의 애용이 합리적 추론적으로 분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방언을 제켜놓는다. 다른 구술적 은사를 위하여 우리는 교훈적 내용, 상황적 내용, 적용적 내용으로 분석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훈적 내용은 본문이 없는 특별한 설교와 같다. 만일 그 과정이 비추론적이라면 말하는 자가 근거하는 본문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듣는 자는 적절한 본문을 의식하게 될 수 있다. 만일 그 내용이성경적이면 이런 본문이 존재한다. 만일 그 내용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말하는 자는 믿어지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이런 타입의 내용은 검토될 수 있다. 성경을 잘 알거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아는 것과 연결시킬지 연결시키지 않을 지 알 수가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이런 검토는 힘있는 자, 소위 카리스마적 단체의 많은 “예언들”은 성경적 구절론(phraseology)에 많이 걸려있다. 그들의 성경적인 일반적 성향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물론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조금 더 쉽다. 본문은 분명하다. 청중은 그것을 직접접촉한다. 그들은 본문을 설교자들의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교묘한 이단은 그럴듯하게 본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비 이교적인 설교자들은 의도적내지 그 순간의충동으로 본문을 이탈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과정이 추론적이든지 비 추론적이든지 교훈적 내용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시 사람들이 분별하는 방법도 서로 다르다는 것에 주의하라. 어떤 사람의 분별은 일반적으로추론적일 수 있다. 그들이 마음에 설교자가 말하는 것과 그것과 모순되는 것을 확고하게 하는 성경적 본문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은 비 추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설교자가 말하는 것이옳은지 그른지를 느낀다. 그들은 특정한 본문을 가리킬 수없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동질화하거나 소화한 것을 근거하여 알게된다. 그들의 소화된 지식이 그들을 분별하는데 의식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이 메시지는 어떤 점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성령이 신자의 생활에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물론성령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길에도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성경적 지식이나 그자신의 생산된 지식의 수단을 통하여 일하신다. (고전2:10-16) 인간편으로부터 사람은 우선적으로추론적이거나 비추론적인 과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묘사는 성령이 일하고 있다는사실과 모순이 없다.(또다시 누가복음과 계시록의 예를 생각하라)

  다른 타입의 사람들은 상호보완적이다. 결국 추론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은 메세지의 평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성경본문을 직접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점이 그릇 되었다고 비 추론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추론적 분별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이 들며 마침내 메시지의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에 본문이 오게된다.        

 

6. 비추론적인 과정을 통해 인정된 상황적 내용

 

  지금까지 우리는 교훈적 내용을 토의했다. 지금은 내용의 이차적 종류인 상황적이 내용을 생각해 보자. 이런 범주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할 수 있다. 미국교회에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는 상해에 있는 우리 자매교회가 원수의 공격 때문에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했다. 챨스 스펄죤은 그의 설교에서 젊은이들을 가리키면서 “젊은이들이여 당신의 주머니 속의 글러브를 왜  바치지 않는가?” 10 라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스펄죤은 ”구두 수선공이 앉아 있었다.주일날 가게를 열었다. 지난 안식일 아침에도 열었다. 그는 9페니를 벌었고 4 펜스의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4 펜스에 팔렸다“ 11 고 지적했다. 스위스의 한 여인은 귄닌스(Os Guinness)가 강의하려는 엑세스(Essex) 강의실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한 이상한 소녀가 그 모임을해체하려했다. 12 이런 모든 일들이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 얻어진 상황적 교훈의 경우이다.

  이런 내용의 종류가 분명히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정보가 분명한 챈널을 통하여 얻어진 정보와는 내용이 다른지 아닌지를 깨달을 때 그 난관은 사라진다. 예를 들면 원리상, 상해에 있는 그 교회는 미국의 형제자매에게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다. 스펄죤은 글로브를 훔친 사람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일요일에 상점을 여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얻을 수있다. 귄니스는 스위스의 그 자매에게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다. 이런 관여된 정보는 놀라운 것이못된다. 놀라운 것은 정보가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왔다는 것이다. 분명한 장거리 전화가 없거나다른 분석할 과학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그 정보가 어떻게 수납자에게 찾아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어그램 3에 의하면 이런 정보는 일반 신자의 수준(Level 4)이나 특별한 은사의 수준에서 활동하는 영적 과정의 생산물이다. 만일 캐논이 온전하다면 이런 정보다. Level 2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정보가 Level 1, Level 2에 속할 이유가 실제로 필요치 않다. 수납자가 정보를 받고 정보가 특별한 상태를 갖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정보가 장거리 전화, 신문, 직접적인 관찰을 통하여 받아진 정보가 광의적 정보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세상에 대한 단순한 정보이다. 원리상, 내가 매일 아침 이를 닦는지 아닌지에 관한 정보처럼 성경의 충족성을 위협하는 것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3

  사람들이 분명한 수단의 부족 때문에 비 추론적 과정에 난관을 갖는 것을 나는 추측한다. 비 추론적 과정에 포함된 경우에 있어서 장거리 전화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해는 되고 질문한 사람은하나님으로부터 온 정보로 받아드려지게 된다. 이렇게 그 정보는 직접 영감을 받고 충분한 신적권위를 제공한다. 이 마지막 결론은 가장 고통스러운 난관을 만들어낸다. 이는 결론이 사실이라면받아드려진 정보는 성경의 권위를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지주의자들은 성경권위의 충족성과 절대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런 과정의 타입을 완전히 벗어나려 할 것이다. 반면에 비중지주의자는 현대자료의 오류적인 성격에 반대하는 정보에 무비판적으로 수납하려는 경향을 갖게된다.

  양면이 모두 잠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잘못은 인간의 피조물성과 인간 죄의 참여에 대한 부족과 그런 생산물에 대한 충분한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참여를 서로 혼동한다는 점이 중대한 과오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목초를 자라게 하려고 바람을 불게 하시는데 직접 관여하신다. 그는가축이 자라는 풀을 주시도다.(시104:14) 그러나 풀을 자라게 하는 것은 영감되지 않았다. 더욱이사람들이 그들의 생각, 말씀과 비죤에 대한 어떤 원천을 의식적으로 모른다할지라도 그들의 인격의 방면으로부터 이런 원천과 자원은 여전히 존재한다. 은사주의자들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예언을 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잘 안다. 즉 그 지도자들은 어떤 비 추론적 과정이 심리적동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4

  꿈이 좋은 실예가 된다. 대부분 서양인들은 본래 꿈을 자유로운 사상의 무의식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신약시대 역시 흔히 많은 보편적인 꿈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꿈은 계시적이다(마1:20-24). 행10:10절은 하나님이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을 적절한 꿈과 환상을 일으키는 어떤수단과 추구자처럼 이용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우리는 꿈이란 어떤 개인적 심리적 경향의 산물이요 어떤 개인의 관심에상황적 내용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도있다. 예를 들면 잠자러 가기 전에 샐리와 그의 남편은 그날 밤에 특별한 모임을 위해 먼 거리를 드라이빙하는 자기 고모, 앰마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그날 밤, 샐리는 앰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아주 두렵고 놀라운 꿈을 꿀 수 있다. 그 차는 아주 부서졌지만 다행히 앰마는 다치지 않았다. 그 꿈은 무오한 것이 될 수 없고 성경에 더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꿈은 하나님이 샐리에게 중요한 때 기도를 시키시는 심리적 경험이지만 오류가 있다.

  누가와 계시록의 중요한 예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추론적 과정이든(누가복음) 비 추론적 과정이든(계시록), 모두다 직관적인 탁월한 영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정경을 생산하는 경우에있어서 두 과정은 모두 영감되었다. 이 둘은 원리상 마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딤후2:24-26, 눅8:32 행16:17-18) 이 둘은 인간의 일반적인 오류에 의해서 혼란한 오류의 성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감이 정경의 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현대적 모든 자료들은 오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이 모두 오류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들은 원리상 성경의 절대권위에 위험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을발견할지도 모른다. 내용의 명료성은 어떻게 점검되어야하는가? 만일 우리가 비 추론적 과정에 대한 어떤 신용을 준다면, 그들이 성경에 의하여 직접 점검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려져야 하는가?

  우리는 그 내용이 교훈적 내용, 혹은 교리적, 교훈적 내용일 때, 청중은 성경과 비교함으로서 그것을 점검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적 내용은 어떻게 점검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하여 한 청년이 그의 글로브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 주장을 믿어야하는가 안 믿어야하는가?

  그런 상황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생각을 피한다. 많은 경우 우리가 믿는 바가 매우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의심 속에 남으면서 자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의 모든 오류에 의해서 의심속에 남아있도록 충고를 잘 받는다. 스펄죤 생애의 경우에 있어서 회중은 모든 사람이그들의 특별한 필요와 죄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일반적인 교훈의 예를 가지고 있다. 만일 스펄죤이 말한대로 훔친 글로브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젊은이는 그것을 알게되고 매우 특별한 명령을 받게된다. 만일 스펄죤이 그릇되어서 (그가 오류 속에 있을 수 있다) 명령을 받을 사람이란 아무도 없지만 그것은 전체 회중을 위한 일반적인 교훈으로 남게된다.

  더욱이 우리는 그 상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정확한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이 현실적이라고 하나님의 아심을 이해 할 때, 그젊은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개인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한설교자가 특별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되고 결국에는분명히 반 성경적이되어 버린다.(잠10:18, 골3:8 벧전2:1 등) 그래서 설교자는 책망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어떤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들은 따라야할 이유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상해로부터 오는 장거리 전화를 받을 때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 추론적 과정을 가질 때 우리는 일어나는 것을 확실히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어떻게 응답해야하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정보에 대한 응답을 위하여 많은 상황의 타입에 익숙해있다. 결국 장거리 전화는 오류가 있는 것이다. 전화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의 다른 편에 있는자는 상하이에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대하여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미친 짓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들은 음성은 비 인격자에 의하여 위조될 수도 있다. 이런오류에도 불구하고 장거리전화를 응답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다른 각도를 생각해보자. 만일 전화를 받는 다른 편의 사람의 과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말하는 바를 무시하게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비 추론적 과정을 믿을수 없다면  그의 불신실성에 대하여 말한 바를 경멸하게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비 추론적 과정에서 이전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외인과의 관계를 갖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을 다소무시할 것이다. 신빙성을 묻는 많은 실제가 모든 사람 관계에서 일반적이다. 우리는 인간적 경험에 신빙성이 없는 어떤 일을 실제로 취급해지 말아야한다.

     

 7. 예언

  여전히 특별한 내용을 필요로 하는 몇 종류의 상황적 내용이 있다. 이 중 하나가 예언의 영역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예언한다면 어떤가? 그러면 우리는 그 예언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다.(막13:32-37; 행1:7) 우리는 날자를 경계하는 성경적 경고를 근거로 그런 예언을 하는 사람을 책망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가 있다. 만일 사람이 캘리포니아의 어떤 지역이 이러이러한 날에 가라앉는고한다면 어떠한가? 만일 우리가 캘리포니아에 산다면 우리는 가방을 챙겨 떠나야하는가? 이런 경우에 첫 번 기준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날씨의 예언이나 혹은 경제적 징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하지만 그들이 그릇되거나 어떤 부분은 그릇되고 어떤 부분은 옳은 것을 증명하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은 일기예보나 경제징후가 성격상 비 추론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추론적이기 때문에 한낱 평행적이 아니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예언을 한 사람은 추론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예언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보통 사람은 현대의 기상이론과 경제이론을 구체적으로 모르거나역시 특별한 예보를 말하기 위하여 그런 이론에 의한 구체적인 자료를 알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일은 과거에 믿을 만 한 것으로 증명한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그 분야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예언은 하나님이 행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종류의 일인가?

  우리의 일반적인 결론은 동일하다. 분명히 성령은 인간의 예언을 생산하기 위하여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서 일할 수 있다. 역시 인간의 예언을 생산하기 위하여 추론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하신다. 다른 것보다 더욱 영적인 것은 없다. 역시 다른 것보다 더욱 무오한 것도 없다. 예언의 어떤 종류는 복종적인 신앙의 응답을 요구하는 특별한 신적 언어로 추정되지만 우리가 다른 예언을 평가할 때 미래의 상황에 관한 단순한 추정적인 정보일 뿐이다.

  일단 우리는 비 추론적인 과정에 근거를 둔 예언들이 어떤 특별한 신적 범주에 있지 않고 추론적과정에 근거를 둔 예언처럼 오류가 있음을 앎으로서 정신차려 실행할 준비를 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예언들을 완전히 거절해서도 안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드려서도 안된다.      

 

8. 명령

 그럼, 명령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포로울(R.C. Sproul)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과 관련을 시킨다. “세상에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베스타(Vesta R.C의 미래의 아내)를 취하라”. 15 어떤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주님이 가라사대 너는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고 할 때 많은 모순이 발생한다.

  부적절한 혼란스러운 위험한 말,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할 때 무오한 계시의 주장으로시작한다면 아브라함은 오히려 “주님이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는 사명을 나의 마음에 주셨음을 느끼면서”16 말해야 한다. 위험스러운 서두가 없이 행한 명령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 계시의충족성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편119:1절은 말하기를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자는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했다. 허물을 면키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의의 온전한 교훈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딤후3:16-17절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행으로 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오류가 있든 없든 성경에 더해진 어떤 명령도불법이 될 수 있다.(신4:2)

  더욱이 아브라함과 같은 명령이 실제적인 문제를 치우치게 만들 수 있다. 아브라함이 빌에게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고 했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나 솔직하게 빌은 모잠비크로 가려는 직관적인 충동을 갖지 못했다. 빌은 감동을 받는다. 만일 그가 가지 않으면 주님의 뜻일지도 모르는 어떤것에 불복종한다고 느끼게된다. 만일 그가 간다면 그는 실제로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그의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다.

  더욱이 카리스마적 그룹은 속이는 자가 변덕에 따라서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들처럼, 명령하는 자의 서글픈 경험을 하게한다. 강요하는 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명령을 이용한 다. 잘 아는 대로 어떤 지도자들은 이런 언어 형태를 완전히 금지했다. “이것은 예언에 관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침해의 위험뿐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은 신중을 기하게 되고 특별한 성경명령에 관한 어떤 의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특별한 성경적 명령은 가끔 더 밀접한 검토를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실제로 성경에 첨부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을 적용한 것이다. 그들은내가 적용적 내용이라 부르는 방면으로 떨어진다. 예를 들면 스포로울에게 떠오른 아이디어, “세상에 나아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런 말은 마가복음 16:15절에도 유사하다. 마가복음 마지막의 본문비평 문제는 마가복음 16:15절이 마가의 기록의 한 부분이라는 절대적 주장을 반대하지만 일반적으로 마태복음28:19절에서 보여진 것처럼 성경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필요의 여분이나 꼬리말에 붙은 형태로 성경에 첨가해지 말아야한다. 오히려 우리는 Sproul에게 적용된 성경적 명령을 갖는다. 적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실시할 때 우리는 그가“말씀의 공식적인 설교자가 되기에 은사와 영적인 자격을 갖추고있는가?”라고 말한 대로 어떤 정보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Sproul에 관하여 어떤 상황적 내용을 제시할 때 그 적용은 좋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은 성경적 계명과 세상에 대한 정보를 둘 다 수단으로 삼는다. 세상에 대한 어떤정보는 적용이 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끔 사람의 실수는 다만 성경적 명령과 분명한 상황적 내용이 이용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사도행전21:4절 “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를 생각해보라. 이 구절은 동의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따라왔다. 성령을 통하여 두로에 있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사도행전20:2, 오직성령이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를 주시하라) 이 정보는 비추론적 과정을 통하여 받아드려졌다. 그 제자들은 인간생명의 보호(출20:13)와 근신(잠22:3 등)에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친숙해있다. 그들이 성경적 개념을 세상적인 정보와 함께 결합시킬 때 바울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추론했다. 그러나 그런 추론은 바울의 특별한 부름 때문에 부정확하였다(행20:22-24,21:14).

  오늘날 사람들이 특별한 명령을 할 때 이런 명령은 가끔 성경적 개념과 상황적 내용을 서로 결합시킬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Sproul에게 전해진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그의 은사에 관한 상황적 내용과 마태복음 28:19절의 성경적 개념을 결합시킨다. 가끔 성경적 개념과 상황적 내용이비 추론적 과정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그러면 명령을 발행한 사람이 그 명령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의식적으로 특별화 시킬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은 비 추론적 기원을 가진 명령이다. 물론 그것은 오류가 없진 않지만 여전히 어떤 경우에 있어서 성경적 개념의 분명한 적용적 명령일 수 있다.

  그래서 분명한 명령이 비 추론적 과정으로부터 나타날 수도 있고 부인할 수 없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관찰한대로 이런 명령을 접근할 때에는 조심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지혜, 성경의 지혜, 상황과 관련된 사람에 관한 지혜는 어떤 응답이 적당한지를 분별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께서 어떤 짐을 지거나 억압적인 명령에 관한 굴욕적인 복종이 아닌(마11:28-30, 요일5:3)우리의 마음으로부터의 섬김을 바라신다는 것을(고후9:7) 강조해야한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의지는 분명하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성품을 다하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첫 계명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 두 계명을 지켰다(마22:37-39). 사람들은 주님의 분명한 뜻에 전심으로 복종하는 것을배워야한다. 덜 중요한 과정에서는 (모잠비크로 가는 것) 잠잠해야한다.

         

 9. 영적은사를  환영함

 중요한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시대의 하나님은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 일하실 수있다. 사도시대에 있어서 두 과정이 영감된 형태로 일어났다. 우리 시대에서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고 영감은 끝났다. 현대적 과정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 가운데 일어났던 과정의유추적일 수 있다. 오늘날 영적 은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대 영적 은사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하는가? 오늘날은사는 추론적 은사(예: 가르치는 은사)와 비 추론적 은사(예: 자발적으로 쉬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골4:6))을 포함한다. 은사의 두 종류의 가능성은 사도시대의 은사 종류의 유추적인 분배로부터 추론된 것이어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성령은 모든 은사의 원천이다. (엡4:7, 11 고전12;11참고) 성령이 일하실 때,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을 사용할 때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그 분이시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영적 은사를 환영하고 존중하며 받아드려야 한다.(12:14-26) 우리는특별히 사랑을 추구하고(고전13:) 교회를 세우는 이 은사들을 추구해야한다.(살전5;21-22) 우리는분별을 연습해야한다. 오늘날 은사는 항상 오류가 있다. 모든 은사는 절대 첨가할 수 없는 성경에의해서 평가받아야한다.(신4:2 계22:18-19)

  여기에 카리스마와 비 카리스마의 교훈이 있다. 어떤 카리스마는 비 추론적인 은사의 오류가 있는 혼합된 성격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추론적 은사의 가치를 배울 필요가있다. 대신에 그들은 이런 은사들이 비 추론적 은사보다 덜 영적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에 추론적은사에 대해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취급하며 지나쳐버릴 수 있다. 17

  반면에 어떤 비 카리스마주의자들은 비 추론적 은사의 가치를 배울필요가 있다. 대신 그들은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교묘히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의 기초는 성경캐논의 완성으로 마치는 비 추론적 은사에 있다. 그들이 현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영감된 비 추론적 은사가캐논의 완성으로 끝났다는 것이다.18

  역시 우리는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간의 중요한 구별에 의하여 유추가 무시되는 다이어그램3의 한 지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영감된 내용은 필자의 정의에 의하면 모든 교훈적이다. 반면에 현대적 배경에서 우리는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과 서로 싸움을 하게된다. 그래서 현대의 상황적 내용에는 엄격한 사도적 유추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사도와 성경의 모든사람은 일반적 성경적 원리를 그들의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사도가행한 적용은 영감되었고 신적, 성경적 규범의 역할을 타협하게 한다. 그러나 사도적 권위에 대한정보는 아무리 그것이 바르다고 해도 사소한 교회에 대하여 신적 권위를 가지고 영구적이며 교훈적이다.(딤후4:13) 이 점에서 그것은 신적인 방면에 속하다. 반면 우리의 현대적 상황적 정보는 신적 언어가 적용되어야하는 창조적 방면에 속한다. 우리의 오늘날의 교훈적 내용과 오늘날의 상황적 내용간의 관계는 종합적이거나 불균형적이다. 오히려 현대의 교훈적 내용은 성경을 다시 표현하는데 있어서 권위적이다. 현대의 상황적 내용은 아무리 진리성이 있다할지라도 교회사적으로볼 때 전혀 권위가 없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은 추론적, 비 추론적 수단을 통하여 상황적 내용을 우리에게 분명히 행하실수 있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야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시든지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의 종합의 부족때문에 성경에 근거한 교훈적 내용이 오직 권위적일 수 있고,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탁월한 성격을 우리는 즐겨야한다.   

 

 10. 예언의 중단에 대한 논쟁

  이제 뒤엉킨 논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신약과 초대교회의 “예언”이 절대 영감을 받았는가, 혹은 무오한가에 대하여 논쟁한다. 그것은 충분한 신적 권위를 소유했는가? 개핀(Richared B. Gaffin, Jr)은 말하기를 그것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9 구루둠(Wayne A. Grudem)은 그렇지 않다고 맛 선다. 20 많은 사람은 믿기를 이런 논쟁의 결과는 은사운동의 미래에 위기를 가져온다고믿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논쟁의 결과는 오늘날 아주 적은 실제적인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

  만일 개핀이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예언은 사도시대의 완성과 성경캐논의 완성으로 끝났다. 현대적 현상은 오류가 있고 신약의 예언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현대적 설교가 사도적 설교와 유사한 것처럼 가르치는 내용을 가진 오늘날의 비 추론적 과정은 예언과 유사하다. 그래서 고전12:-14:와 그 밖의 구절 속에 분명히 말한 것처럼 이 영적 은사와 같은 일반원리가 여전히적용적이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이 은사라고 부르는 것은 신약에 나오는 예언과 정말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오류있는 유추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것은 비 추론주의자의 과정을 통하여 오류있는 말을 하는 영적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추론주의자의 과정을 통하여 오류가 있는 영적 은사인 설교와 아주 대조를 이룬다.

  상황적 내용을 가진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성경의 예언에서 유추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마치 추론적 과정을 통한 상황적 내용에서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반면에 그루둠이 옳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예언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런 예언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구약의 영감된 예언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비 추론적인 과정을 통한 오류있는 영적 은사이다. 만일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면 그 권위는 성경에서 나와야한다. 만일그 내용이 상황적이라면 그것은 성경에 더해지지 말아야한다.(신적 권위가 없기에) 하나님 위에있는 특별한 권위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루둠은 본질적으로 개핀이 한 것처럼 실제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현대현상에 대하여 개핀과 구르둠이 일치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현상들(비 예언과 예언)에 주어진 Level에 대해서만 일치하고 신약의 현상이 동일시하거나 단지 오늘날 현상이 유추적인가에 대해서만 불일치 한다.

  개핀과 구루둠은 벌써 오늘날 현상의 유오성을 인정했다. 개핀은 오늘날 현상을 영적 은사의 신학에 통합시키려고 덧붙이는 단계를 취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신학적 통합을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이 은사들의 사용을 위한 유추적인 칭의가 존재함을 발견하게된다.

  반면에 구루둠은 예언의 상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예언은 유오할 수 있지만여전히 계시적이라 한다.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중요하다고 한다. 개핀과 많은 다른 사람은 그들을 이해하고 분류하기에 어려움을 발견한다. 어떤 것은 어떻게 계시적이며 여전히 계시의 충족성과 어떻게 위배되지 않는가? 나는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을 상황적인 내용으로부터 구분시킴으로서 어떻게를 설명하고자 한다. 교훈적 내용은 성경에더해져선 안되지만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을 되풀이할 수 있다. 상황적 내용은 장거리 전화를 통해서 받은 정보와 같은 상태를 이룬다. 즉  그것은 귄위에 대해 특별히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용의 두 타입이 성경의 충족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만일 은사와 비 은사가 이런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나는 현대의 영적 은사의 논쟁이 쉽게 끝나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비 추론적인 은사를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 추론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은사그룹에 몰려 다니는 경향이 있다. 각 구룹은 그들 종류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인정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위로해야 만할 사람들을 포함하는 각 은사의 중요성을 고린도전서12장에서 또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추론적 은사나 비 추론적 은사가 그리스챤 공동체의 현저한 특징이 되게 하려고 항상 지배적인 독선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고전12:11) 반면에 우리는 주님이 그의 교회를 그의 완전한성경을 통하여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목적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특별한 신적 권위적 주장을더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적인 현상은 그의 권위가 성경에서 나온 교훈적 내용에 속하게 한다.(엡4:11참고)       

                             

11. 특별한 사건에 관한 역사적 설명

 우리가 생각하려는 결론은 교회역사와 비교할 때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은 교회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추론적 과정과 비추론적 과정 둘을 다 사용하셨다. 그리스챤은 가끔 탈선된 것과 싸워야만 할지라도 균형있는 방법으로 양자의 과정을 인정할 수 있었다.

  개혁적 전통은 적절한 예를 보여준다. 이런 전통은 전적으로 중지주의자의 신학과 연결되어있다. 개혁주의 저자들은 성경의 온전성과 충족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결론을 추론하여 추론적 과정에 대한 그들의 감상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비 추론적 종류의성령의 특이한 역사를 증거할 수 있다. 다음 것은 그 실예이다.

  첫째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는 그가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제시할 때 참여한 자들 중 하나였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 후스, 위클맆, 루터가 오는 일을 예언한 것처럼 경전의 종결된 이래 오는 일을 미리 말한는 어떤특별한 사람의 3 가지 계시(정경의 계시와 확신을 주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더하는 계시의 3급 종류)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확실히 이루어졌다. 우리 스코틀랜드의 위살트(M. George Wishart)는 추기경 비톤이 성 안드레 성문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예언한대로 그가 자랑한 자기 꾀에 빠져 수치스러운 교수형을 당했다. M Knox는 하나님의 사람이 불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렌즈 경이 교수형을당할 것을 예언했다. M Ioh Davidson은 그 나라 사람에게 많이 알려진 것을 예언했는데 영국에 있는여러 경건한 설교자들이 그와 같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가족주의자들이나 도덕 폐기론자들도 아니고, 데이빗 조지, 니콜라스, 갱, 랜덜, 윌웨잍, 덴, 가족주의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거짓된 영감의 4급 종류의 예언(사탄적 예언)이 있다. 즉, 허치손 여인은 다니엘이 거짓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자 굴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보스톤 법정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예언했다.비콜드는 원수의 손아래서 문스터 마을 구원받을 것을 예언했다. 그와  그의 예언자는 고문을 당해매달려 죽었다. 데이빗 조지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난다고 예언했으나 결코  성취되지 못했다. (p43) 나는 3급 과 4급(사탄적)의 예언의 차이는 이렇게 말한다. 1. 이 위대한 개혁자들은 어떤 삶도 자신들이 예언을 성경처럼 믿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오는 사실들을 예언하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어야한다. 그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것처럼 특별한 사건과사실에 대하여 자신들의 예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심판의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행하고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의 유대인의 소명에 대한 예언과 요한계시록 1:10절과 전체를 통하여 보인 예언처럼, 스스로 성령에 의해 영감된 기관이라고 말한 일이 결코 없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것처럼, 이런 특별한 사건과 사실을 특별한 사실과 사건에 관한 예언으로 믿지 않는자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치손은 Rise Reigne 61페이지 27항에서 말하기를 그들에게 일어난사건에 대한 특별한 계시가 성경처럼 무오 하다면 성령이 이 두 저자이기 때문에...(P44) 그들의 것을 성경으로 믿어야한다고 주장한다. 2. 그리스도의 경건하고 신실한 증인들에 의해서 계시된 사건들은 말씀과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콜올드, 존 매티, 죠 스키켈스(잘못이 없는 자기 동생을 죽인), 살인치 말라는 확고한 명령 맛서 순수한 사람을 죽인 살인의 영 사탄에게 속한 다른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홥법적인 판사들을 일으켜서 죽이도록 독일의 보울러스에게 가르쳤다. 성령의 충동이나 영감의 모습으로 비극적인 종국을 예언한 경건한 개혁자들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맛서는 복음의 원수들의 영감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한것처럼 그들을 죽이는 수행자들이 아니었다. 엠 위살트는 놀만과 존 레슬리스가 추기경 비톤을 죽여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리거나 동의하지도 않았다. 2.(3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악이 악인을 좇고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해롭지 않는 비밀, 그들을 이끄는 성경의 영의 강한 충동으로서 그들을 그 예언에 거룩한 공의의 기준을 경건치 못한 사람에게 특별히 적용시켰다. 그들만이예언자들이고 그런 행동의 동조자가 아님을 알렸다. 21  

 

 John Flavel의 생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 날밤 그는(Fravel) 배를 탔다....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징후를 보았다. 그가 배에 오르자 때마침 선원들이 두려워하는 폭풍이 일어났다. 그들이 대경실색하고 있을 때, 아름답고 지혜로운 한 근엄한분이 테이불에 앉아 계셨다. 그는 요람에서 칭얼대는 한 아이를 달래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작은 휘초리를 들고 가만히 있지 않으면 때린다!”고 위협하는 어떤 아버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 꿈에대하여 흘라벨 씨는 꿈을 생각한 후, 어떤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을 먹을  풍세와 기상이 매우 좋아 그의 친구가 기분을 내고 있을  흘라벨 씨는 대답하기를 지난   때문에나는 자네들의 마음과 달리  고난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고 했다덧붙이기를 그는 자기 꿈에 이런일을  때마다 거의 그대로 되었다고 했다.

  이윽고 그들은 포틀랜드의 5 리이그(영미에서 약 3마일-역자 주) 나갔을 때 위험한 대폭풍이 일어났다. 22

  존 호우(John Howie)는 웰츠(John Welch)와 부르스(Robert Bruce)와 같은 스코틀랜드의 언약자들로부터 많은 예들을 인용한다.

  주의 날, 그의 집에서 불결을 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썼고, 퓨리탄이라고 불리는 것을 별로 좋지 않게 여겼던 웰츠는 어느날, 자기 집 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불렀다. 이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온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며 그의 경계에서 주의 날을 범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집에서 그를 내 좇으시고 그의 후손 중 어느누구도 그것을 누릴 수 없었다. 이 일이 그대로 되었다. 이런 때에 그가 좋은 외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모든 일이 그를 반대했고 그의 재산을 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구입자에게 소유물을주려고 할 때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웰츠는 참된 선지자라고 했다. 23

 

  {웰츠}는 그녀(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위하여 주님과 씨름했는데 가까운날에 한 슬픈 일이 일어날것이나 주님은 남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감독들이 그 땅에 퍼져나갔을 때 교회를 타락 시켰던 때였다.24

 

어느 날 말에 옷 짐을 싣고 온 두 상인이 마을 책임자로부터 발행한 통행증을 가지고 (이것은 흑사병이 없다는 증명이다) 물품을 팔기 위하여 찾아왔다. 이 모든 것을 본 놀란 문지기들은 책임자를 부르기까지 그들의 출입을 중지시켰다. 그들이 오자 책임자의 증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존 웰츠가 불리워져 그의 의견을 듣게되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아름다운 하늘 공간을 바라보면서 한참 생각에잠겨있었다. 비록 그가 들은 말이 없다할지라도 그는 기도하는 태도를 계속 취하면서 잠시 후에 영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큰 소리로 확신하면서, 바로 이 짐 속에 전염병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책임자들은 그들에게 떠나가라고 말했고 그들은 약 20마일 떨어진 컨낙(Cumnock)이란 마을로 가서 그들의 물건을 팔았다. 거기서 이런전염병이 생겼고 죽은 자를 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 일은 그들로 하여금 웰츠를예언자로 인정하도록 했다. 25

 

그는(웰츠) 그들(에딘버러의 두 시민)에게 말하기를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문제를일으키는 좋지 않은 두 목사가 있었다한다. 그것은 세상에 알려졌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 두사람은 바로 패리크 갤로웨이(Parrick Galloway) 와 존 홀(John Hall)이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Galloway가 갑자기 죽었고 그때에 Leith에 있던 Hall은 그의 여종이 시장에 간 사이에 집에 홀로 남아있다가 죽었는데 그녀가 돌아와 발견했다. 26

 

 오취트리와 함께 저녁에 함께 앉아있던 그는(웨츠) 종전처럼 경건한 교훈적 담화를 그 사람들과 나누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잘 받는데 교황에게 속한 한 젊은이가 웃기도하고 조롱하며 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웰츠는 잠깐 멈추고 회중으로 침묵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뛰고, 그 불량자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했다. 이윽고 그 사람이 넘어져 테이불 위에 죽었고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그 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27

  웰츠가 법정으로부터 돌아와서 월칠트리 경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다룬 탄원이 어떻게 되었냐고 했다. 그 주인은 말하기를 그것을 왕에게 올렸지만 그 왕은 목사들을 그렇게 반대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기각 당할 것이라고 했다. 웰츠는 말하기를 “아니요. 주인이여! 당신은 하나님과 나에게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전달하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그 일에 대하여 당부하였는데도 당신이 불신실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재산과 명예를 취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분명히 볼 것입니다” 이 일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재산과 명예는가족의 상속자도 아닌 일개 견습생인 캪틴 제임스(Captian James)의 아들 제임스 스튜월트에게 옮겨졌다. 28

 

(웰츠는 아일 근처의 자기 집으로 그의 아내를 보낼 때 다른 길로 가도록 말했다) “당신이 갈 때 아일에 발생한 전염병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되었다.29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하던 부르스씨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목사들이 떠나는 것이 가까웠다. 우리의 생활은 그후에 더 비참하게되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실 것을 똑똑히 보게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30

 

  캐트린 마샬은 그의 남편 피터에 관하여 이런 내용을 말한다.

 

 별이 없는 어두운 밤에 범버프(Bamburgh)로 향하는 가까운 마을로부터 돌아오던 Peter는 습지를 가로지르면서 지름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글로룸 길(Glororum Road) 곁에 깊고 험한 화강암 채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위험한 그 지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날 밤은 정말 칠흙 같았다. 그의 발자국이 옮겨질 때마다 바람소리와 야생 조류들의 소리와 때로는 양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베드로야...”하고 부르는 어떤 이의 소리를 그는 듣는다. 그 소리에는 큰 위기감이 감돌았다.

  멈추어서 그는 “예 누구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잠시동안 그는 들으려고 했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고 바람 소리 뿐이었다. 늪지는 모두 말라 버린것 같았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몇 발자국을 걸었다. 그때 또다시 더 위급한 음성으로베드로야”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칠흑같은 어두움 속을 살피면서 공포에 질려 멈췄다가 갑자기 장애물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을 때, 그는 벌려진 돌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 있었다.한 발자국만 더 가면 죽음의 공간에 떨어질 뻔하였다. 31

  카톤 매더(Cotton Mather)는 다음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일반적인 믿음 외에] 특별한 믿음(Particular Faith)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위로로서 의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나 저기그때나 지금, 보증을 받지만 절대 주권적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헌신된 신자는 그가 무엇이며 언제 될 것인지를 믿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초자연적인  때문에... .그의 마음에 강한 인상이 남는다. 그래서 눈물이 쏟아져 아주 녹아지거나 그대가 하나님에 대하여 바라시는 기도를 하도록 확신을 주신다그런 감동은 그의 마음에 분명한 빛으로서 새겨져서 마치 천상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충만한 힘이 임한다비록 그에게 강하게 증거되었다 해도 여호와는 그대가 바라는 소원을 친히 들어주신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설교(Martyrology)가 복된 순교자 홀랜드(Holland)와 관계된 것에서 어떤 실예를 볼 수 있다. 그를 반대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은 후, 그는 말하기를 지금 나는 매일 핍박하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눈물을 쏟으며 구하는 당신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을 확신한다나는 지금 그것을 담대히 말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하나님은 잔인한 너의 손을 잘라버리신다고 말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이날 후에  자리에서 불과 경멸의 시련을 주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져그는 스밑힐드에서 불타 죽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당신은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교회에서 말씀을 하는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예언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 외에, 그리스도의 많은 고백자들을 강요했던고난 속에서 아무도 이상한 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32

 

  ... 시간에 관하여 감동(Increace Mather에서 특별한 믿음의 예)이 넘치는 활동 중(1694년10월), 그의이웃가운데 스스로 선언했던 천사들에 관한 큰 흔적을 가지면서 빛나는 영의 특이한 역사가 있었다. (그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아신다) 그리고 이 일로부터 그에게 전해진 메시지(혹은 더 많은메시지)가 있었다. 즉, 그는 영국으로 가고자하는 마음에 부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되었다이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섬김이 가장 많은 것을 위하여 그렇게  것이었다하나님의 천사들은 그의 섭리가 나타나는 곳에 그에게 임할 것이다. 33

1676년에 그는 그의 마음에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11월19일에 스가랴3장7절...을 가지고 설교하라는 이상한 감동을 받았고 그 설교는 이상한 예언을 포함했는데 아주 큰 불이 일어나는 예언이었다.... 다음 주의 날에 그는 설교하기를... 주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두려운 심판을 일으키실 때 그것에 대한 경고를 주기 위하여 어떤 종의 마음을 자극시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임할 일을 준비하려면 그 경고를 기억해야만 한다.... 바로 그 날 밤, 참혹한 화제가 그 이웃에서 일어났다. 34

  그는(Increace Mather) 1678년, 그 해가 될 때 공적으로 3번 이상 경고했다. 그는 진실한 설득을 당했고 그곳에 매우 중대한 질병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의 죽음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경고가 있었다그의 친구들  어떤 이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1678년경에 일어난 “죽음의 병”을우리는 알고 있다. 작은 물집이 일어났고... 그 유명한 헨리 모어박사는 Fanatiks 가운데, 보통 계수되지 않은 사람인, 이런 현상을 해결하는 어떤 실마리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의 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능력이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역시 그가 기뻐하시면 자기 종들을 보내어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중단하지 않으신다. 부인할 수 없는 한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특별한 일들이 있는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가끔 있다. 35

  2월 6일에... 나는(Increace Mather) 잠시동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주 안에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단지 나는 “하나님이  잉글랜드를 구하신다하나님이 뉴잉글랜드를 구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도록 큰 위로와 확신에 의해서 끓고있던 무릎을 일으켰다.  내가 바라는 이 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4월14일에 [영국에서 오는]작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그 날(2월6일), 즐거운 승리와 완전한 패배로인하여 컬크(Kirk)가 뉴잉글랜드의 정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36

  매더 씨는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영국에서 영국민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일을 준비하셨다는 강한 설득을 당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정말 그는 이런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기를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용기를 얻는 감동을 받았다. 신중한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그가 현실화되었을 때 말했다. 37

 

  어떤 이들은 카니살드(Camisards)에서 “예언적인” 현상을 인용할지도 모른다. 38 그러나Camisards 가운데 일어난 일들은 무질서와 거짓 예언을 포함한다. 심각한 박해와 훈련된 지도자들의 소수가 사람들을 비평적인 분별력이 없고 훈련의 의지와 기술이 없게 만든다. 훗날에 1715년초기에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안토니 법정(Antonie Court)은 그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중(노회)의 안내자요 중심이었다,. 다른설교자들은 불신과 자만으로부터  자유하려 했고 억지로 잘못되거나 교훈의 부족으로부터 자유하려 했기에 그를 싫어했다. 오직 그들은 더 나은 상담자와 인도자를 원했다.... 성경은 믿음의 유일한법칙으로 주장되어졌고 반 성경적 위험한 특별계시는 거절되어졌다.(1715년의 총회) 39

 

  Camisards가운데 혼합된 현상의 성격은 Mather, Rutherford,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즐겼던 신중성을확고하게 해준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사도의 무오성과 후기 비 추론적인 과정의 유오성 사이를구분시키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독자들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위의 보고들이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묘사하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다. 그들은 변이의 과정을 통하여 묘사되었는가? 최소한도로 그 보고는 보고자들이하나님이 할 수 있는 분이심을 가리킨다. 소수의 예외를 제켜두고, 그 보고자들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한 개혁 신학적 전통 안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보고자들은 하나님의 비상 섭리적 활동에 관한 개혁주의적 사고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런 특별한 현상의 모든 일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3절에 주어진 설명에 포함되어있다. 즉“보편적인 섭리가운데서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시되 그것 없이, 그것 위에서, 그것 반대로 행하시는데 있어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시며 자유로우시다”. 그렇게 묘사된 하나님의 일은 확실히모든 비 추론적인 과정을 포함시킨다. 이런 많은 확실한 비 추론적인 과정은 이런 “수단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경륜의 비밀에 대한 강한 위탁 때문에 이 고백서는 보편적 방법의 수단들과 결합되지 않은 역사도 행하실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경우에 긍극적 결정적 요소는"그의 기뻐하심”에 달려있는 것이다. (*)

 

 Footnotes

* 뻔 포이츠레스(Vern Poythress)는 웨스트민스터 신약 해석학교수이다. P.O. Box 27009, Philadephia, PA 19118.

  1. 참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1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Qq.23-26

  2. 이 다이어그램은 Edmund P. Clowney의 강의실에서 발췌한 것으로 조금 변경되었다.

  3. 카리스마 편에는 구루둠의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Westchester;Crossway, 1988) 277-297; 비 카리스마의 경우, 리델보스, The Authority of the New Testament Scripture(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3); R.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Studies in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Baker, 1979) 89-93를 보라

  4. 또다시 나는 이 개념에 대하여 Clowney의 강의에서 발췌한다.

  5. J Deer의 Surpri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Grand Rapids: Zondervan, 1993) 64-71,에서 오늘날 신유은사와 사도적 은사간의 순순한 동일시보다 오히려 유사성에 대하여 어떻게 논의했는지를 주의하라. 이 점에 있어서 그의견해는 나의 견해와 마찬가지다.

  6. 메시야적 은사의 수준은 우리 주님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의 관계에 신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석하기가 어렵다. 그의 인성의 관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은 추론적 과정(요10:35-36, 마22:31-32)과 비 추론적 과정(17:27, 눅10:18)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7. O.P. Robertson, the Final Word: A Biblical Response to the Case for Tongues and Prophecy Today (Carlisle: Banner of Truth, 1993)84.

  8.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직접적 간접적 전달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직접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요한 자신의 심리적인 말과 구약의 다니엘이나 에스겔에 대한 요한의 이전 묵상을 배경으로 하든하지 않든지 계시록의 환상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의 시장한 상황을 수단으로 삼든지 않든지 사도행전10장의 환상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구약의 베드로의 이전 지식과 누가복음 24:44-49절의 예수님의 교훈을 알고 있는지 아니든지 설교를 주실 수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분명히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역시 전달의 결과적인 언어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대답하는 것은 필요하다. 역사적 연구의 수단에 대한 누가의 사용은 그 산물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못한다. 직접성은 단순히 한 산물의 권위를 토론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지 못한다.

  9. 연속성의 최상의 토론은 아마 구루둠의 Gift일 것이다. W.A.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I Corinthians(Washington: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2). 중지주의자의 경우는 Gaffn의 Prospectives: R.F White, "Gaffin and Grudem on Eph2:20: In Defencese of Gaffin's Cessationist Exegesis," WTJ 54 (1992) 303-320: “Richard Gaffin and Wayne Grudem on 1 Cor 13:10: A Comparison of Cessationist and Noncessationist Argumentation," JETS 35/2 (1992) 173-181.

  이런 질문에 대한 글들은 부피가 있다. 그러나 구루둠과 개핀은 두 중요한 위치의 가장 특별한 사람이면서 훨씬 폭넓은 범주를 취급한다.

  10. E.W. Bacon, Spurgeon: Heir of The Puritans (Grand Rapids : Eerdmans, 1968) 156.

  11. ibid.

  12. O. Guinness, the Dust of Death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73) 299

  13. 다른 많은 사람을 따라서 로벗손은 “그들이 삶을 위한 그의 뜻”을 특정화하면서 “주님의 말씀이라고”주장하는 어떤 특별한 말씀과 아주 관련을 시킨다. (Final Word 88-95, 특히 p89)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유동적이며 혼란되고 강압적인가를 지적한다. 그러나 나의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간의 구분은 그 문제를 설명한다. 아마설명된 상황적 내용은 그의 뜻에 대한 교훈적 의미에서, 전혀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고 단순히 상황적 정보일 뿐이다. 만일 내가 나의 이를 닦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의 뜻을 알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가없다.

  14. C. Brumback, What Meaneth This? (Springfield: Gospel Publishiung House, 1947) 259; K McDonnell, Charismatic Renewal and the Churches(New York: Seabury, 1976) 145-146

  15. R.C. Sproul, "Striking a Chord in the Heart of the Beliiever," Table Talk 14/11(November 1990) 13.

  16. Cf, Grudem, Gift 260

  17. 이 교훈은 ibid. 253-263에서 말하는 강조를 포함한다.

  18. 그래서 예를 들면 개핀은 Perspectives p120에서 오늘날 비 추론적 은사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즉“가끔 예언이라고 말하는 바가 실제적으로 성경에 대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적 적용이며 특별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성경적 교훈이 갖는 갑작스러운 증거의 다소일 수있다. 모든 그리스챤은 성령에 대한 더욱 자유로운 역사를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개핀은 필자가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서 나온 교훈적 내용으로 분류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로벗손은 Final Work p84에서 유사한 현상을 허용한다. 

  19. Gaffin, Perspectives

  20. Grudem, Gifts

  21. Samuel Rutherford (sic), A Survey of Spirituall Antichrist. Opening the Secrets of Familisme and Antinomianisme in the Antichristian Doctrine of John Saltmarsh, and Will.Del, the Present Preachers of the Army now in England, and of Robert Town, Tob. Crip, H. Denne, Eaton, and Others...(London: Andrew Crooks, 1648). part I, chap. 7, pp. 42-44.

  22. "The Life of the Late Rev. Mr. John Flavel," The Works of John Flavel (London: Banner of Truth, 1968) I.vill

  23. J Howie, The Scots Worthies (rev.ed.; Edinburgh/London: Oliphant, Anderson and Ferrier, 1902)123

  24. Ibid. 124

  25. Ibid. 124-125

  26. Ibid. 130

  27. Ibid.

  28. Ibid. 131

  29. Ibid. pp.132-133, 135-136에 다른 예언들과 죽은지 48시간 후에 깨어난 사건이 포함된다.

  30. Ibid. 145.

  31. C. Marshall, A Man Called Peter: The Story of Peter Marshall(New York: McGraw-Hill, 1951)14.

  32. C. Mather, Parentator: Memoirs of Remarkables in the Life and the Death of the Ever-Memorable Dr. Increase Mather (Boston: B. Green, 1724) 189-191. 역시 매더는 pp.191-196페이지에서 조심스럽게 소개하며 반대견해를 논증한다.

  33. Ibid. 193-194

  34. Ibid. 78-79

  35. Ibid. 80

  36. Ibid 98

  37. Ibid. 106

  38. E.g. P. Joutard, Les Camisards (Paris:Gallimard/Julliard, 1976) 57-101

  39. G. de Fe'lice, History of the Protestants of France(New York: Edward Walker, 1851) 450.

선신학의 성령론에 대한 확신을 잘 대변해 주었다고 보았기에 관심을 끄는 논문이다.  포이츠레스 교수는 조화 신학(Symphonic Theology)” “모세오경에서의 그리스도의 그림자(The Shadow of Christ in the Law of Moses)” “세대주의자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Dispensationalism)”와 같은 책들을 썼으며 획일적인 관점에 치우치기 쉬운 개혁주의자들의 딜레마를 잘 극복하도록 새로운 통찰력으서 전통적인 개혁자의 신앙을 파수해 나가게 한다. - 역자 주

 

 

오늘날의 영적 은사가 사도들의 신적 권위적 은사와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그 유사성을 나는 주장한다. 분명한 아무 명시가 없기 때문에 사도적 가르침과 성경의 캐논은 신적 권위를 갖는다. 다른 면에서 서로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적 은사가 여전히 교회에서 순수하게 사용될 수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인정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 사이에 중간 노선이 존재한다.

 

  1. 은사의 기독론적 중심

 

  이 견해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중요한 구분을 필요로 한다. 첫째 우리는 성령의은사에 대해 생각하는 성경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

  신약 그 자체가 영적 은사의 신학적 원천이다. 중요한 열쇠가 에베소서4:7-11절에서 발견된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성령의 모든 은사를 주시는 분이다.(11절) 그는 승리하셨고(8절)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기 때문에 그 자신의 풍성한 소유로부터 나눠주신다(10절). 사도행전 2장33절은 교회에 성령을 부으시는 서론으로서 그리스도가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이 그림을 보충시킨다. 그리스도의 성령 충만하심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대로” 충만히 받는다(엡4:7).

  자연히 이런 반성은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유사할 뿐 아니라 종속되는 결론으로 나가게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마지막 위대한 선지자이시다(행3;22-26).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께 종속된 선지자들이 되었다.(2:17-18) 그리스도는 큰 목자이시며(벧전5:4) 교회의 통치자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그는 종속된 목자들을 임명하시며(5:1-3;행20:28) 양떼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돌보는 은사를 주신다(고전12;28; 엡4;11)[목자들]).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다.(마20:28) 역시 그는 섬김의 은사를 주셨고(롬12:7-8) 우리 형제에게 목숨을 다하여 섬기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요일3:16).

  전통적으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 직무, 즉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 분류하는 것이편리할 수 있다. 1 그리스도는 우리(선지자)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왕), 우리를 섬기시려고(제사장) 자기생명을 주셨다. 세 기능 모두가 히브리서 1:1-3절에 함께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우리는 그의 모습으로 옮겨지고 그의 형상을 닮는다(고후3:18; 롬8:29; 엡4:24). 우리는 그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선지자가 되었다.(골3;16) 우리는 우리가 책임지는 영역에서그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왕이다(엡2:6;6:4). 우리는 서로 서로 섬기는 제사장이다(요일3:16).

  적절한 성경적 구절이 보여주기를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모든 방면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엡4:7) 말하는 은사가강한 곳에서 사람들은 교사들을 인정했다.(4:11) 다스리는 은사가 강한 곳에 장로들이나 감독들을인정하였다(벧전5:1-4) 섬기는 은사가 강한 곳에 긍휼히 여기는 봉사자와 수여자가 인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섬김은 특별히 집사의 사역과 일치하도록 제안한 바 있다.(디아코니아라는 “섬김”를 뜻하는 말이 이 사실을 지지한다)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은사의 세 범주는 서로간에 분리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나 그의 백성들의 생애 가운데 전형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선지자적이고 행정과 기적적 능력과 치유의 은사는 왕적이다. 그러나 어떤 은사는 한가지 이상의 것으로 분류되어 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치유의 은사는 치료받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은사이기 때문에 제사장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긍극적으로 선지자적, 왕적 그리고 제사장적 기능은 하나님 백성의 전체의 삶의 관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투명한 복사판으로 나누지 말아야한다.그렇지만 이런 분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신약 속의 은사의 목록들 중어느 하나도 배제시키지 않게 한다.  

                                                       

 2. 은사 받은 자들의 피라밋

 

  은사가 다양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약은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은사를 위한여러 기능적 수준을 인정한다. (다이어그램 1을 보라) 그들은 무엇인가?

 

    다이어그램 1 2

                            영적은사

 

       1단계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2단계 사도적                            사도와 사도적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3단계 특별한 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4단계 일반은사                                   모든 신자들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첫째로 메시야적 은사가 있다.(Level 1)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으로 마지막 선지자이요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자신을 준비하셨다.

  둘째로 사도적 은사 혹은 기초적인 은사가 있다.(Level 2) 그리스도는 사도를 증인으로 임명하셨다.(행1:21-22) 그들은 직접 보고 들은 것에 근거하고 자신들을 영감시킨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여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을 항상 권위적으로 증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구술적 증거로서 사도적 역할을 불연속적으로 수행했다. 사도들과 마가, 유다와 같은 “사도적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섬김은 신약의 정경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감독하는 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결정을 이루었다.(행6:,8:, 10:-11:,15:20) 그들은 불연속적인 왕적 역할을 수행했다. 사도들은 최초의 집사들을 임명했고 섬김과 긍휼의 사역을 수행케 했다.(6:1-7) 이 모든 분야에서 사도들의 역할은 반복될 수 없었다.

  셋째로 우리는 탁월한 반복적 은사를 갖는다.(Level 3) 사람들은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구제의 은사를 가질 때 교회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의 역사는이런 수준을 “특별직”으로 규정했다. 그것은 교회내의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는 단계를 본다.(Level 4) 성경이 보여 주는 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다.

  충분한 신적 권위와 거기에 종속된(영감되지 않은) 은사들과의 구분은 지금 분명해졌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요1:1,20:28) 교회의 주인이시다.(엡5;24) 그의 사역은 충분한 신적 권세를갖는다. 사도와 사도적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위탁된 자들로 그의 권위를 갖는다. 이러므로그들의 말과 공적활동은 신적 권위를 갖는다.(예: 고전14:37, 살전2:13) 특히 그들의 직무수행에 있어서 사도의 말은 구조적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감된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말씀하신것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입 기운을 받은 것이므로(딤후3:16) 절대적 신적 권위를 갖는다.

  역시 성령은 목사들, 교사들, 일반신자들에게 가르치고 말하는 은사를 수여하는데 있어서 종속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신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들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와 완전을 수행하는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은 말씀에 대한 넓은 의미에서 영감 받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령이 현존하심을 인정한다. 우리는 역사하는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사가 적절히 수행될 때 성령이 능력으로임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오류가 있고 성경의 표준에 의해서점검되어야한다. 성령에 의하여 오늘날 사역의 검증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계시의 종결성(히1:1-3)과 사도의 가르침의 근본인 성경(엡2:20) 곧 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카리스마와 비카리스마적 대표자들 모두 이것을 인정한다. 3

     

 3. 말씀과 활동의 근거에 관한 이해

 

  역시 우리는 이미 세운 분류법에 따라서 다른 많은 방법으로 성령 은사의 기능을 분류할 수 있다.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훈련된 은사, 그리스도인을 향한 은사, 세상에 향한 은사(크리스챤 공동체 밖에 있는)로 구분할 수 있다. 4  목적상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인식에 초점을 맞춘 구분을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첫째, 사람들은 성경의 특정 구절에서 그들의 행동 개념을 의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면강해설교를 행한 어떤 설교자는 성경의 어떤 특정한 귀절에 의도적인 근거를 둘 수 있다. 술에 유혹 받은 젊은이들을 상담하는 어떤 장로는 의식적으로 술 취함에 대한 경고 귀절에 근거를 둘 수있다. 개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어떤 집사는 마음에 롬12:15절을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은사의 이런 타입을 추론적인 과정에서 생각해 보자. 그 활동은 성경의 한 구절 혹은 더 많은 구절에서추론되어진다.

  둘째, 다른 때에 사람들은 예측하고 느끼거나, 혹은 직관으로 행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해야만하고 특별한 일을 행해야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떤 상황을 볼 수 있거나 자연스럽게 다시행하거나 혹은 특별한 환상이나 환청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유일한 근거가 되는 성경의 특별한 구절이나 일연의 귀절을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그들의 경험은 그들이 더 이상 분석하지 않은 (아마 할 수 없는) 개인적인 추론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이런 예가 비 추론적인 과정에서 흘러나온다.

  셋째, 사람은 행동의 근거를 부분적으로 의식함으로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성경에 나오는 어떤 모델의 상황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성경적 상황과 평행이지만 비교의 성격을 판단하기에 적합한 모든 요소를 의도적으로 느끼려고 한다. 이런 과정들이 부분적으로는 추론적이다. 우리는 그들을 혼합된 과정, 혹은 창조적 분별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는 추론적이든 비 추론적이든지 다른 한 쪽으로 더 많은 초점을 맞추려 할 수 있다.

 위의 세 Levels은 평가 없이 의도적으로 묘사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든 인정하지않든지 여러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바를 묘사하였다.

 우리는 이런 세 타입의 예를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도적 설교는 추론적 과정을 포함한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28:23-24) 바울은 추론적 과정을 보여주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의존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사도적 설교는 구약의 특별한 본문에 의해서 해석하고 논증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의 청중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바가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기(17:11) 때문에 그들을믿었다.

  계시록과 다른 곳의 이상은 비 추론적인 과정을 묘사한다. 요한은 이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그가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다.(계22:8)

  또 혼합된 과정과 창조적 분별 과정의 가능한 예는 사도행전15장에서 발견되어진다. 사도와 장로들은 분명한 성경에 창조적으로 호소함으로서 부분적으로 모순된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행15:16-18)

  이 세 타입의 과정이 가진 경계선은 분명히 유동적이다. 한 행동을 위한 근거의 의식은 정도의 문제이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다소 의식할 수 있다.

  사도적인 경우, 적절한 추론적, 비 추론적 과정은 모두 영감되었고 신적 권위를 갖는다. 반면에다른 경우, 그런 과정들은 영감되지 못했다. 사실상 그들은 마귀적일지도 모른다. 마귀들은 마4:6딤후2:25-26에서 추론적인 과정을 사용하였고 누가복음4:34, 겔13:7, 12:24절에서는 비 추론적인 과정을 이용하였다. 비 추론적인 과정은 다윗이 슬픔에 빠졌을 때(삼하19:4) 요압이 그의 임무를 환기시키기는 과정에서 나타난다.(19:5-8) 일반적으로 추론적, 비 추론적 과정 어느 것이 내적으로더 탁월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양자는 사도의 모범에 의하면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둘 다 비영감적일 수도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그림과 연결시키는 것은 얼마나 적합한 일인가? 다이어그램 1은 우리가 사도에 의해서 실행된 은사의 유추에 의해 성령의 현대적 은사에 대하여 생각해야한다고 말한다. 5  원리상,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 그리고 혼합적인 과정의 은사 기능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셈이다. 현대적 예는 이런 관계를 분명히 해준다. 어떤 사람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분명한논증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의 은사는 추론적인 과정을 이용한다. 다른 이들은 성경의 오랜 연구와 소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마음에 진리지식으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서 옳은 것을 알고 자신들의 결론을 정당화하는 특정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은사는 비 추론적인 과정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은 전형적으로 어떤 것을 의식하지만 그들의 행동의 모든 성격을 알지 못한다.

  이런 다양한 과정은 구술적 은사 혹은 지식과 언어의 은사와 특별한 관련을 갖는다. 즉 왕적, 제사장적 은사에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선지자적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분명한 구절로부터 나온분명한 이론에 근거하여 우선적으로 알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복음과 일치하는 것의 직관적 의식에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다이어그램 2)

 

 

                          다이어그램 2

 

                    추론적 은사와 비 추론적 은사

 

 

       Level 1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Level 2 사도적                           사도들과 사도적 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아래

 

   Level 3 특별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Level 4 일반은사                                    모든 신자

 



                 추론적  비추론적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다이어그램 1, 2에서 현대은사는 항상 특별은사와 일반은사로 불리우는 Level 3, 4 에 속하는 것을주목하라. 현대 은사는 모두 다 유오하다. 그들 모두는 성경에 의존하고 정경을 더 할 수는 없다.그들은 유추적이고 사도적 은사(2 단계)나 메시야적 은사(1단계)와 일치되지 못한다.

  어떤 예를 생각해보자. Level 2에서 사도적 설교는 특별히 추론적 과정을 포함시킨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추론적 과정을 사용함으로 기록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비 추론적 과정을 예로 제시한다. 6

  Level 3, 4는 현대에 어떻게 진행되는가? 추론적 과정은 현대 설교와 정상적인 성경공부와 가르침을 포함한다. 비 추론적인 과정은 성경적 개념이나 귀절들이 마음에 자발적으로 생기지만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아는 수납자를 알지 못한다. 가끔 어떤 놀라운 예가 생긴다. 꿈과환상가운데 어떤 사람이 세마포를 입은 한 여인을 본다. 그녀는 진흙탕을 걷고 있었다. 진흙이 그옷에 튀어 올랐다. 그녀는 궁정문에 들어갔다. 밖에 서서 그녀는 더러움때문에 슬피울었다. 어떤사람이 그녀에게 아름다운 밝은 옷을 입혔다. 그녀는 옷을 입고 기쁨으로 궁정에 들어갔다. 혹은어떤 남자가 한 천사가 책을 기록하는 장소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 책 위에 그 사람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 아래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들과 자신이 받아드렸던 악한 사상이 기록되어있었다. 어떤사람이 피로 얼룩진 양손바닥을 보이면서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 책 페이지 위에다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읽어라는 한 음성이 들려 왔을 때, “피때문에 그것을 읽을 수가 없나이다”고 그 천사는 대답했다.      

  정말 사도적 설교는 오늘날 설교에 대하여 유추적인가? 확실히 사도적 설교는 영감되었고 절대적이다. 오늘날 설교는 사도적 설교에 첨가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추론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을 유추적이라고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 있어서 이 둘은 정말 유추적이다. 설교자들과 전달자들은 항상 사도의 모본과 심지어 절대적인 예수의 모본에서 교훈을 끌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계시록이 오늘날의 환상, 꿈의 유추인지 아닌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설교의 경우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계시록은 영감되었고 절대적이다. 오늘날 영감,환상은 성경에 더해 질 수 없고 단지 그것에서 추론된 것일 뿐이다. 이런 추론적 성격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예들, 진흙이 묻는 옷과 피가 뿌려진 책의 이야기 속에서 잘 나타난다. 이 둘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용서와 칭의의 가르침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 둘은 성경에서 나온 주제와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가 한 특정한 사람에게 칭의의 진리를 적용한다면 첫째는 더욱 일반적인 것이된다. 둘째 것은 오직 그것의 특별한 적용에 의해서 성경과 동 떨어졌고 모든 사람이 그 메시지의합법성을 인정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환상이라고 부른 것은 현실적으로 성경진리를 그의 생활에적용하시는 성령에 의한 적용일 수 있다”. 7

  사실상 설교문맥에서 우리는 본문을 유추해서 사용함으로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사야 6장에있은 이사야 이상은 절대적이면서 말씀 사역자들의 교훈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날 설교의 모델이다. 고린도전서 12:-14:은 오늘날 영적 생활의 훈련을 위한 기본적 원리가 된다.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은사의 대부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람들은 가끔 다른 특이한 것과 관련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사도적 설교와 계시록이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계시를 포함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할 지도 모른다. 반면에 현대설교와 성경적 환상과 직관은 옛 지식의 되새김을 포함시킨다. 그러나 실제라 할지라도 여기 있는 그 차이는 과장하기에 예민하고 용이하다. 사도적 가르침은 구약과 그리스도생활의 사건들, 예수님의 지상 생애(눅24:25-27, 44-49)에 근거한 것으로 많은 범위를 차지한다. 비록 그 메시지가 처음 듣는 많은 사람에게 새롭게 들릴지라도 절대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계시록은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그리고 다른 성경원천에서 나온 주제적인 재료로 많이 엮어간다. 초기의 사건을 기록함으로서 누가와 사도행전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이 사건에 덧붙인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고 소개한다. 더욱이 신적 권위는 옛것이든 새것이든 아무 데도 없다. 신명기가 어떤 것을 새롭게 소개할 때와 같이 초기의 계시를 반복함으로서 권위적인 것과 같다. 8

  현대적 상황에서 어떤 의미에서 옛것이라 하여도 설교, 이상, 꿈은 다른 것의 새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것들은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전달할 수 있다. 더욱이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적용이 있다.(피가 발린 책의 사람 이름처럼)

  그러면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모든 현대과정은 완전한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추론적이다.현대설교는 성경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한에 있어서 권위를 갖는다. 동시에 현대의 직관, 꿈, 이상,다른 모든 비 추론적 과정을 갖는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과 오늘날 과정에 관한 유효성을 중요하게 취급해야만 한다. 이 원리는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과 관련된다. 추론적 과정의 경우에 있어서 설교자는건전한 교훈 아니면, 이교의 교훈을 설교할 수도 있다. 직관적인 예감이나 꿈 (해석될 때)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현대의 문맥 속에서 추론적인 과정과 비 추론적인 과정은 성경과는 다른 더 많은 가르침을 덧붙일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현대의 환상이나 환청은 설교의 추론적인 과정보다 더욱 놀랍고 더욱 분명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기를 그것은 직접 성경으로부터 나왔기에 무오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신13;1-4, 살후2:9-11절은 이런 말과 모순된다. 현대의 놀라운 어떤 경험도 아무리 특이하고 놀랍다해도 근본적으로 성경에 덧붙여질 수는 없다. 사실상 그것은 반대되는 기적일지도 모른다. (살후2:9-11의 의미에서) 또는 그것이 성경적 진리의 반복일 수도 있으나 여전히죄악된 인간의 수납으로 경멸을 당할 수도 있다. 아니면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다음을 보라). 아니면 그것이 진리와 비진리를 섞은 혼합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무오한표준으로 믿고 이런 모든 경험을 시험하는 것이다.

 

4. 내용을 위한 추론적 초점들

 

  우리는 하나의 최종적인 명료성, 즉 과정보다 오히려 내용과 관련된 구분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말하려는 과정에 관하여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내용에 주의를 기우려야한다. 이런 내용은 성경의 내용을 다시 표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를둘러싼 상황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하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둘의 결합일 수도 있다.

  (1) 사람들은 교훈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명하는 바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언어의 내용을 교훈적 내용(teaching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2)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 주변에 일어나는바를 우리에게 말한다. 또는 그들은 과거에 일어난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또는 (그들이 어떤 것을예언했다면) 일어날 것을 말한다. 이런 언어를 상황적 내용(circumstantial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3) 사람들은 성경적 가르침과 상황적 가르침, 둘 다를 결합시키는 내용을 목표로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성경이 현재의 상황에 적용되는 바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이런 언어를 적용적 내용(applicatory content)이라고 불러보자. (다이어그램 3을 보라)

  신약 안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바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든지 역사에 대하여 말하든지 그들의 상황에 대하여 말하든지 적용에 대하여 말하든지 그것은 교훈적 내용이다. 그러면 상황적 내용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우리의 현재적 상황에 적용하려고 할 때 들어온다. 신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삶에 하나의 분별 방법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도록 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접한다.(엡5:16-17, 롬12:1-2) 이런 적용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필연적으로 상황적 내용과 적용적 내용을 다루어야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며, 그런 경우에 역사적 이야기는 분명한 신적 보증이 없이 비 영감된 사람들과 행동을 포함한다.

  첫 예로서 역대하 25:3-4절의 내용을 생각해보자.  나라가 굳게 서매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함이라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것이라 오직  사람은 자기의 죄를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여기 묘사된 행동가운데 우리는 세 종류의 내용을 발견한다. 4절의 첫 번 원리를 생각해 보라 아비를 죽이지  것이요 오직 각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그러나 이 원리는 신명기24:16절에서 인용한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교훈적 내용의 실예이다. 아마시아는 그가 분별하기 전에 이런 교훈적 내용을  환기했을 수 있다.

  둘째로 32절은 아마시아가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암살에 대한 사실들을 발견해야만 되었다고 말한다. 그와 그의 신하들은 율법의 정한 과정을 따른다면 요아스의 죽음의 사실을 충분히 확신해야만 했다. (참고 신19:15-21) 이 사실의 확인은 상황적 내용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아마시야는 그문제에 관한 진리를 확신했으나 그의 진리지식과 진리의 진술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그것은 단순히 보편적 지식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살해 행동은 적용적 내용을 표함한다. 그런 수행 에서 아마시야는 신24:16절로부터 교훈적 내용을 포함시킨다. 더욱이 살인에 관한 교훈적 내용(창9:6)과 이 특별한 내용의 유죄에 관한 상황적 내용인 신24:26절의 교훈적 내용과를 연결시킨다.

  역대하 25:3-4절의 전체의 내용은 영감되었기에 교훈적 내용의 실예이다. 그러나 아마시아의 직무 가운데 사실적인 정보의 초기 사건과 변동은 영감되지 못했다.

 

                        다이어그램 3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

 

       Level 1 메시야적                     예수그리스도

 

  Level 2 사도적                           사도와 사도적 사람들

  

 

                                            신적권위

                                            성경적권위 아래

 

   Level 3 특별은사                                    목사들

                                                      교사들

                                                      장로들

                                                      집사들

 

   Level 4 일반은사   교훈적내용

                      적용적내용

                      상황적내용                     모든 신자

 

           

 

                 추론적  비추론적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적인 실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예를들면 왕상1:43-48절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관한 요나단의 비 영감된 기록에 대한 영감된 기록이다. 1:43-48절에서 그것의 영감된 기록과구별된 요나단의 언어는 상황적 내용을 갖는다. 이런 기록은 아도니아와 그의 손님들의 적용적 활동의 근거가 되었다. (1:49-51) 마찬가지로 사사기20:29-32은 적용적 내용의 경우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싸워 승리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하셨다.(20:28) 그러나 매복에 대한 그들 계획의 특징은 분명히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령관들은 군대의 전략과 베냐민이 기대 하는 바에 관한 상황적 지식을 설명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상황을 분별하는 신적 기초이다. 성경의 교훈은 오늘날 성령의 교훈적 역사의 기초이다. 그러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성령이 우리 자신과 상황에 관한 세속적인 교훈을 포함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욥32:8 시94:10, 잠1:2-7) 넓은 의미에서 성령은 아마시아를 그의 아버지 살해에 관한 진리를 아는 자리로 인도하는 도구적 역할을 한다. 성령은 그들이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대장관에게 제공하셨다. 잠언2:6절이 가르치는대로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했다. 여호와로부터온 이런 지식은 잠언의 나머지가 특별히 말하는 일생생활의 지혜와 지식을 포함한다. 모든 지식은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온다.

  물론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 특별한 권위를 갖지 못한다. 반대로 성경은 신적권위를 소유한다. 그래서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의 상황과 성경시대의 상황에 관한 성경 진술 사이에 큰 간격이놓여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분명한 관계가 존재한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우리 자신시대와 같이 문제와 고민과 상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원리에 대한 그들의 적용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우리의 성경적 적용과 평행을 이룬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훈하는데 간섭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 원리적지식과 우리가 응답해야만 하는 특별한 상황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신다.  



5. 현대의 카리스마 은사에 관한 질문

  우리는 지금 현대 카리스마 은사를 우리의 일반적 구조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 카리스마와 비 카리스마 양자 사이에 여러 종류의 은사가 여러 과정을 통하여 활동한다. 그들 모두를 살피는 것은불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모순된 은사의 종류에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특별히 카리스마그룹이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들, 방언 통역하는 은사로 분류하는 구술적은사에 대해서 더욱 더 그러하다.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이들은 예언, 영 분별, 방언 은사들은 오늘날 계속된다고 믿는다. 반면에다른 이들은 그것들이 사도의 사역과 특별계시의 완성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9 필자는 현대 카리스마 은사는 영감된 사도적 은사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을 신약에 사용된 것들과동일한 용어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 할 수도 있다. 나는 용어에 대한 논쟁보다 오히려 현대은사가 실제적으로 다이어그램 3의 구조에서 실제적으로 행하는 것을 직접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우리의 처음 분류에 의하여 이 모든 모순된 은사들은 비 추론적 과정에 속한다. 그들의 기초가 더욱 모호하고 개인적이다. 즉 그 기초는 비 추론적이며 직관적이다.

  반면에 추론적 과정은 그들이 성경에 호소하기 때문에 모순 될 수가없다. 물론 추론적 과정은 여전히 오류적이다. 교리적으로 건전한 설교자가 이단교훈을 퍼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성경이 호소하는 그럴듯한 논의를 줄 수 있다면 더욱 위험해질수 있다. 그래서 추론적인 과정은 여전히 최종 표준인 성경으로 점검되어야한다. 그러나 성경을믿는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을 설명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원리상 이런 과정과 연결될 수 있다.

  비 추론적 과정은 문제들을 제시한다. 어떤 은사론자들은 그 기초가 더욱 개인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이며 다른 과정보다 오류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이런 생각이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이미 관찰했다. 누가복음은 계시록보다 덜 영감된 것이 아니다.더욱이 특별히 기적적인 것이라도 반대의 자료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살후2:9)

  그래서 우리의 일반적인 영적 은사에 의하면 추론적이고 비 추론적인 은사는 단순히 특별하지않은 보통은사들과 함께 한다. 모든 은사와 같이 그들은 성경과 일치된 것으로 점검되어야한다.(고전14:37-38)

  그러나 이런 비 추론적인 경우는 성령의 은사로 불러야하는가? 우리는 이미 시94:10, 욥32:8잠2:6절에서 인간생명의 창조자요 섭리주이신 성령이 그들이 가진 모든 지식을 주시는 분이심을관찰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은사들이다. 더욱이 이런 일을 “은사”라고 한 것은 우리가그들을 무오하다고 볼 수 없는 “은사”를 가리킨다. 설교의 은사가 참되다 할지라도 그 은사가 인간의 죄와 성향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에 현대설교자를 무오하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비추론적 은사에도 적용된다.

  많은 비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이 주장하고 내적으로 점검할 수 없기 때문에 비추론적인 과정의문제를 갖는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대하여 확고한 바를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교회의 기초적인절대적 역할을 혼란케 할 위험으로 나가게된다.

  그러나 비 추론적 과정의 모든 예가 같은 문제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방언의 애용이 합리적 추론적으로 분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방언을 제켜놓는다. 다른 구술적 은사를 위하여 우리는 교훈적 내용, 상황적 내용, 적용적 내용으로 분석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훈적 내용은 본문이 없는 특별한 설교와 같다. 만일 그 과정이 비추론적이라면 말하는 자가 근거하는 본문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듣는 자는 적절한 본문을 의식하게 될 수 있다. 만일 그 내용이성경적이면 이런 본문이 존재한다. 만일 그 내용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말하는 자는 믿어지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이런 타입의 내용은 검토될 수 있다. 성경을 잘 알거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아는 것과 연결시킬지 연결시키지 않을 지 알 수가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이런 검토는 힘있는 자, 소위 카리스마적 단체의 많은 “예언들”은 성경적 구절론(phraseology)에 많이 걸려있다. 그들의 성경적인 일반적 성향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물론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조금 더 쉽다. 본문은 분명하다. 청중은 그것을 직접접촉한다. 그들은 본문을 설교자들의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교묘한 이단은 그럴듯하게 본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비 이교적인 설교자들은 의도적내지 그 순간의충동으로 본문을 이탈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과정이 추론적이든지 비 추론적이든지 교훈적 내용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시 사람들이 분별하는 방법도 서로 다르다는 것에 주의하라. 어떤 사람의 분별은 일반적으로추론적일 수 있다. 그들이 마음에 설교자가 말하는 것과 그것과 모순되는 것을 확고하게 하는 성경적 본문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은 비 추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설교자가 말하는 것이옳은지 그른지를 느낀다. 그들은 특정한 본문을 가리킬 수없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동질화하거나 소화한 것을 근거하여 알게된다. 그들의 소화된 지식이 그들을 분별하는데 의식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이 메시지는 어떤 점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성령이 신자의 생활에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물론성령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길에도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성경적 지식이나 그자신의 생산된 지식의 수단을 통하여 일하신다. (고전2:10-16) 인간편으로부터 사람은 우선적으로추론적이거나 비추론적인 과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묘사는 성령이 일하고 있다는사실과 모순이 없다.(또다시 누가복음과 계시록의 예를 생각하라)

  다른 타입의 사람들은 상호보완적이다. 결국 추론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은 메세지의 평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성경본문을 직접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점이 그릇 되었다고 비 추론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추론적 분별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이 들며 마침내 메시지의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에 본문이 오게된다.        

 

6. 비추론적인 과정을 통해 인정된 상황적 내용

 

  지금까지 우리는 교훈적 내용을 토의했다. 지금은 내용의 이차적 종류인 상황적이 내용을 생각해 보자. 이런 범주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할 수 있다. 미국교회에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는 상해에 있는 우리 자매교회가 원수의 공격 때문에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했다. 챨스 스펄죤은 그의 설교에서 젊은이들을 가리키면서 “젊은이들이여 당신의 주머니 속의 글러브를 왜  바치지 않는가?” 10 라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스펄죤은 ”구두 수선공이 앉아 있었다.주일날 가게를 열었다. 지난 안식일 아침에도 열었다. 그는 9페니를 벌었고 4 펜스의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4 펜스에 팔렸다“ 11 고 지적했다. 스위스의 한 여인은 귄닌스(Os Guinness)가 강의하려는 엑세스(Essex) 강의실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한 이상한 소녀가 그 모임을해체하려했다. 12 이런 모든 일들이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 얻어진 상황적 교훈의 경우이다.

  이런 내용의 종류가 분명히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정보가 분명한 챈널을 통하여 얻어진 정보와는 내용이 다른지 아닌지를 깨달을 때 그 난관은 사라진다. 예를 들면 원리상, 상해에 있는 그 교회는 미국의 형제자매에게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다. 스펄죤은 글로브를 훔친 사람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일요일에 상점을 여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얻을 수있다. 귄니스는 스위스의 그 자매에게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다. 이런 관여된 정보는 놀라운 것이못된다. 놀라운 것은 정보가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왔다는 것이다. 분명한 장거리 전화가 없거나다른 분석할 과학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그 정보가 어떻게 수납자에게 찾아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어그램 3에 의하면 이런 정보는 일반 신자의 수준(Level 4)이나 특별한 은사의 수준에서 활동하는 영적 과정의 생산물이다. 만일 캐논이 온전하다면 이런 정보다. Level 2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정보가 Level 1, Level 2에 속할 이유가 실제로 필요치 않다. 수납자가 정보를 받고 정보가 특별한 상태를 갖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정보가 장거리 전화, 신문, 직접적인 관찰을 통하여 받아진 정보가 광의적 정보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세상에 대한 단순한 정보이다. 원리상, 내가 매일 아침 이를 닦는지 아닌지에 관한 정보처럼 성경의 충족성을 위협하는 것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3

  사람들이 분명한 수단의 부족 때문에 비 추론적 과정에 난관을 갖는 것을 나는 추측한다. 비 추론적 과정에 포함된 경우에 있어서 장거리 전화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해는 되고 질문한 사람은하나님으로부터 온 정보로 받아드려지게 된다. 이렇게 그 정보는 직접 영감을 받고 충분한 신적권위를 제공한다. 이 마지막 결론은 가장 고통스러운 난관을 만들어낸다. 이는 결론이 사실이라면받아드려진 정보는 성경의 권위를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지주의자들은 성경권위의 충족성과 절대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런 과정의 타입을 완전히 벗어나려 할 것이다. 반면에 비중지주의자는 현대자료의 오류적인 성격에 반대하는 정보에 무비판적으로 수납하려는 경향을 갖게된다.

  양면이 모두 잠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잘못은 인간의 피조물성과 인간 죄의 참여에 대한 부족과 그런 생산물에 대한 충분한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참여를 서로 혼동한다는 점이 중대한 과오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목초를 자라게 하려고 바람을 불게 하시는데 직접 관여하신다. 그는가축이 자라는 풀을 주시도다.(시104:14) 그러나 풀을 자라게 하는 것은 영감되지 않았다. 더욱이사람들이 그들의 생각, 말씀과 비죤에 대한 어떤 원천을 의식적으로 모른다할지라도 그들의 인격의 방면으로부터 이런 원천과 자원은 여전히 존재한다. 은사주의자들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예언을 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잘 안다. 즉 그 지도자들은 어떤 비 추론적 과정이 심리적동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4

  꿈이 좋은 실예가 된다. 대부분 서양인들은 본래 꿈을 자유로운 사상의 무의식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신약시대 역시 흔히 많은 보편적인 꿈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꿈은 계시적이다(마1:20-24). 행10:10절은 하나님이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을 적절한 꿈과 환상을 일으키는 어떤수단과 추구자처럼 이용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우리는 꿈이란 어떤 개인적 심리적 경향의 산물이요 어떤 개인의 관심에상황적 내용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도있다. 예를 들면 잠자러 가기 전에 샐리와 그의 남편은 그날 밤에 특별한 모임을 위해 먼 거리를 드라이빙하는 자기 고모, 앰마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그날 밤, 샐리는 앰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아주 두렵고 놀라운 꿈을 꿀 수 있다. 그 차는 아주 부서졌지만 다행히 앰마는 다치지 않았다. 그 꿈은 무오한 것이 될 수 없고 성경에 더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꿈은 하나님이 샐리에게 중요한 때 기도를 시키시는 심리적 경험이지만 오류가 있다.

  누가와 계시록의 중요한 예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추론적 과정이든(누가복음) 비 추론적 과정이든(계시록), 모두다 직관적인 탁월한 영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정경을 생산하는 경우에있어서 두 과정은 모두 영감되었다. 이 둘은 원리상 마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딤후2:24-26, 눅8:32 행16:17-18) 이 둘은 인간의 일반적인 오류에 의해서 혼란한 오류의 성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감이 정경의 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현대적 모든 자료들은 오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이 모두 오류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들은 원리상 성경의 절대권위에 위험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을발견할지도 모른다. 내용의 명료성은 어떻게 점검되어야하는가? 만일 우리가 비 추론적 과정에 대한 어떤 신용을 준다면, 그들이 성경에 의하여 직접 점검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려져야 하는가?

  우리는 그 내용이 교훈적 내용, 혹은 교리적, 교훈적 내용일 때, 청중은 성경과 비교함으로서 그것을 점검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적 내용은 어떻게 점검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하여 한 청년이 그의 글로브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 주장을 믿어야하는가 안 믿어야하는가?

  그런 상황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생각을 피한다. 많은 경우 우리가 믿는 바가 매우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의심 속에 남으면서 자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의 모든 오류에 의해서 의심속에 남아있도록 충고를 잘 받는다. 스펄죤 생애의 경우에 있어서 회중은 모든 사람이그들의 특별한 필요와 죄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일반적인 교훈의 예를 가지고 있다. 만일 스펄죤이 말한대로 훔친 글로브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젊은이는 그것을 알게되고 매우 특별한 명령을 받게된다. 만일 스펄죤이 그릇되어서 (그가 오류 속에 있을 수 있다) 명령을 받을 사람이란 아무도 없지만 그것은 전체 회중을 위한 일반적인 교훈으로 남게된다.

  더욱이 우리는 그 상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정확한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이 현실적이라고 하나님의 아심을 이해 할 때, 그젊은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개인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한설교자가 특별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되고 결국에는분명히 반 성경적이되어 버린다.(잠10:18, 골3:8 벧전2:1 등) 그래서 설교자는 책망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어떤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들은 따라야할 이유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상해로부터 오는 장거리 전화를 받을 때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 추론적 과정을 가질 때 우리는 일어나는 것을 확실히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어떻게 응답해야하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정보에 대한 응답을 위하여 많은 상황의 타입에 익숙해있다. 결국 장거리 전화는 오류가 있는 것이다. 전화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의 다른 편에 있는자는 상하이에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대하여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미친 짓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들은 음성은 비 인격자에 의하여 위조될 수도 있다. 이런오류에도 불구하고 장거리전화를 응답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다른 각도를 생각해보자. 만일 전화를 받는 다른 편의 사람의 과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말하는 바를 무시하게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비 추론적 과정을 믿을수 없다면  그의 불신실성에 대하여 말한 바를 경멸하게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비 추론적 과정에서 이전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외인과의 관계를 갖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을 다소무시할 것이다. 신빙성을 묻는 많은 실제가 모든 사람 관계에서 일반적이다. 우리는 인간적 경험에 신빙성이 없는 어떤 일을 실제로 취급해지 말아야한다.

     

 7. 예언

  여전히 특별한 내용을 필요로 하는 몇 종류의 상황적 내용이 있다. 이 중 하나가 예언의 영역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예언한다면 어떤가? 그러면 우리는 그 예언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다.(막13:32-37; 행1:7) 우리는 날자를 경계하는 성경적 경고를 근거로 그런 예언을 하는 사람을 책망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가 있다. 만일 사람이 캘리포니아의 어떤 지역이 이러이러한 날에 가라앉는고한다면 어떠한가? 만일 우리가 캘리포니아에 산다면 우리는 가방을 챙겨 떠나야하는가? 이런 경우에 첫 번 기준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날씨의 예언이나 혹은 경제적 징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하지만 그들이 그릇되거나 어떤 부분은 그릇되고 어떤 부분은 옳은 것을 증명하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은 일기예보나 경제징후가 성격상 비 추론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추론적이기 때문에 한낱 평행적이 아니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예언을 한 사람은 추론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예언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보통 사람은 현대의 기상이론과 경제이론을 구체적으로 모르거나역시 특별한 예보를 말하기 위하여 그런 이론에 의한 구체적인 자료를 알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일은 과거에 믿을 만 한 것으로 증명한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그 분야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예언은 하나님이 행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종류의 일인가?

  우리의 일반적인 결론은 동일하다. 분명히 성령은 인간의 예언을 생산하기 위하여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서 일할 수 있다. 역시 인간의 예언을 생산하기 위하여 추론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하신다. 다른 것보다 더욱 영적인 것은 없다. 역시 다른 것보다 더욱 무오한 것도 없다. 예언의 어떤 종류는 복종적인 신앙의 응답을 요구하는 특별한 신적 언어로 추정되지만 우리가 다른 예언을 평가할 때 미래의 상황에 관한 단순한 추정적인 정보일 뿐이다.

  일단 우리는 비 추론적인 과정에 근거를 둔 예언들이 어떤 특별한 신적 범주에 있지 않고 추론적과정에 근거를 둔 예언처럼 오류가 있음을 앎으로서 정신차려 실행할 준비를 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예언들을 완전히 거절해서도 안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드려서도 안된다.      

 

8. 명령

 그럼, 명령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포로울(R.C. Sproul)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과 관련을 시킨다. “세상에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베스타(Vesta R.C의 미래의 아내)를 취하라”. 15 어떤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주님이 가라사대 너는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고 할 때 많은 모순이 발생한다.

  부적절한 혼란스러운 위험한 말,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할 때 무오한 계시의 주장으로시작한다면 아브라함은 오히려 “주님이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는 사명을 나의 마음에 주셨음을 느끼면서”16 말해야 한다. 위험스러운 서두가 없이 행한 명령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 계시의충족성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편119:1절은 말하기를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자는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했다. 허물을 면키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의의 온전한 교훈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딤후3:16-17절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행으로 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오류가 있든 없든 성경에 더해진 어떤 명령도불법이 될 수 있다.(신4:2)

  더욱이 아브라함과 같은 명령이 실제적인 문제를 치우치게 만들 수 있다. 아브라함이 빌에게 모잠비크의 선교사로 가라고 했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나 솔직하게 빌은 모잠비크로 가려는 직관적인 충동을 갖지 못했다. 빌은 감동을 받는다. 만일 그가 가지 않으면 주님의 뜻일지도 모르는 어떤것에 불복종한다고 느끼게된다. 만일 그가 간다면 그는 실제로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그의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다.

  더욱이 카리스마적 그룹은 속이는 자가 변덕에 따라서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들처럼, 명령하는 자의 서글픈 경험을 하게한다. 강요하는 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명령을 이용한 다. 잘 아는 대로 어떤 지도자들은 이런 언어 형태를 완전히 금지했다. “이것은 예언에 관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침해의 위험뿐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은 신중을 기하게 되고 특별한 성경명령에 관한 어떤 의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특별한 성경적 명령은 가끔 더 밀접한 검토를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실제로 성경에 첨부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을 적용한 것이다. 그들은내가 적용적 내용이라 부르는 방면으로 떨어진다. 예를 들면 스포로울에게 떠오른 아이디어, “세상에 나아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런 말은 마가복음 16:15절에도 유사하다. 마가복음 마지막의 본문비평 문제는 마가복음 16:15절이 마가의 기록의 한 부분이라는 절대적 주장을 반대하지만 일반적으로 마태복음28:19절에서 보여진 것처럼 성경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필요의 여분이나 꼬리말에 붙은 형태로 성경에 첨가해지 말아야한다. 오히려 우리는 Sproul에게 적용된 성경적 명령을 갖는다. 적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실시할 때 우리는 그가“말씀의 공식적인 설교자가 되기에 은사와 영적인 자격을 갖추고있는가?”라고 말한 대로 어떤 정보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Sproul에 관하여 어떤 상황적 내용을 제시할 때 그 적용은 좋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은 성경적 계명과 세상에 대한 정보를 둘 다 수단으로 삼는다. 세상에 대한 어떤정보는 적용이 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끔 사람의 실수는 다만 성경적 명령과 분명한 상황적 내용이 이용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사도행전21:4절 “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를 생각해보라. 이 구절은 동의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따라왔다. 성령을 통하여 두로에 있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사도행전20:2, 오직성령이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를 주시하라) 이 정보는 비추론적 과정을 통하여 받아드려졌다. 그 제자들은 인간생명의 보호(출20:13)와 근신(잠22:3 등)에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친숙해있다. 그들이 성경적 개념을 세상적인 정보와 함께 결합시킬 때 바울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추론했다. 그러나 그런 추론은 바울의 특별한 부름 때문에 부정확하였다(행20:22-24,21:14).

  오늘날 사람들이 특별한 명령을 할 때 이런 명령은 가끔 성경적 개념과 상황적 내용을 서로 결합시킬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Sproul에게 전해진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그의 은사에 관한 상황적 내용과 마태복음 28:19절의 성경적 개념을 결합시킨다. 가끔 성경적 개념과 상황적 내용이비 추론적 과정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그러면 명령을 발행한 사람이 그 명령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의식적으로 특별화 시킬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은 비 추론적 기원을 가진 명령이다. 물론 그것은 오류가 없진 않지만 여전히 어떤 경우에 있어서 성경적 개념의 분명한 적용적 명령일 수 있다.

  그래서 분명한 명령이 비 추론적 과정으로부터 나타날 수도 있고 부인할 수 없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관찰한대로 이런 명령을 접근할 때에는 조심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지혜, 성경의 지혜, 상황과 관련된 사람에 관한 지혜는 어떤 응답이 적당한지를 분별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께서 어떤 짐을 지거나 억압적인 명령에 관한 굴욕적인 복종이 아닌(마11:28-30, 요일5:3)우리의 마음으로부터의 섬김을 바라신다는 것을(고후9:7) 강조해야한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의지는 분명하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성품을 다하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첫 계명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 두 계명을 지켰다(마22:37-39). 사람들은 주님의 분명한 뜻에 전심으로 복종하는 것을배워야한다. 덜 중요한 과정에서는 (모잠비크로 가는 것) 잠잠해야한다.

         

 9. 영적은사를  환영함

 중요한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시대의 하나님은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 일하실 수있다. 사도시대에 있어서 두 과정이 영감된 형태로 일어났다. 우리 시대에서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고 영감은 끝났다. 현대적 과정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 가운데 일어났던 과정의유추적일 수 있다. 오늘날 영적 은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대 영적 은사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하는가? 오늘날은사는 추론적 은사(예: 가르치는 은사)와 비 추론적 은사(예: 자발적으로 쉬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골4:6))을 포함한다. 은사의 두 종류의 가능성은 사도시대의 은사 종류의 유추적인 분배로부터 추론된 것이어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성령은 모든 은사의 원천이다. (엡4:7, 11 고전12;11참고) 성령이 일하실 때, 추론적 과정과 비 추론적 과정을 사용할 때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그 분이시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영적 은사를 환영하고 존중하며 받아드려야 한다.(12:14-26) 우리는특별히 사랑을 추구하고(고전13:) 교회를 세우는 이 은사들을 추구해야한다.(살전5;21-22) 우리는분별을 연습해야한다. 오늘날 은사는 항상 오류가 있다. 모든 은사는 절대 첨가할 수 없는 성경에의해서 평가받아야한다.(신4:2 계22:18-19)

  여기에 카리스마와 비 카리스마의 교훈이 있다. 어떤 카리스마는 비 추론적인 은사의 오류가 있는 혼합된 성격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추론적 은사의 가치를 배울 필요가있다. 대신에 그들은 이런 은사들이 비 추론적 은사보다 덜 영적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에 추론적은사에 대해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취급하며 지나쳐버릴 수 있다. 17

  반면에 어떤 비 카리스마주의자들은 비 추론적 은사의 가치를 배울필요가 있다. 대신 그들은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교묘히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의 기초는 성경캐논의 완성으로 마치는 비 추론적 은사에 있다. 그들이 현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영감된 비 추론적 은사가캐논의 완성으로 끝났다는 것이다.18

  역시 우리는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간의 중요한 구별에 의하여 유추가 무시되는 다이어그램3의 한 지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영감된 내용은 필자의 정의에 의하면 모든 교훈적이다. 반면에 현대적 배경에서 우리는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과 서로 싸움을 하게된다. 그래서 현대의 상황적 내용에는 엄격한 사도적 유추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사도와 성경의 모든사람은 일반적 성경적 원리를 그들의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사도가행한 적용은 영감되었고 신적, 성경적 규범의 역할을 타협하게 한다. 그러나 사도적 권위에 대한정보는 아무리 그것이 바르다고 해도 사소한 교회에 대하여 신적 권위를 가지고 영구적이며 교훈적이다.(딤후4:13) 이 점에서 그것은 신적인 방면에 속하다. 반면 우리의 현대적 상황적 정보는 신적 언어가 적용되어야하는 창조적 방면에 속한다. 우리의 오늘날의 교훈적 내용과 오늘날의 상황적 내용간의 관계는 종합적이거나 불균형적이다. 오히려 현대의 교훈적 내용은 성경을 다시 표현하는데 있어서 권위적이다. 현대의 상황적 내용은 아무리 진리성이 있다할지라도 교회사적으로볼 때 전혀 권위가 없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은 추론적, 비 추론적 수단을 통하여 상황적 내용을 우리에게 분명히 행하실수 있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야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시든지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의 종합의 부족때문에 성경에 근거한 교훈적 내용이 오직 권위적일 수 있고,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탁월한 성격을 우리는 즐겨야한다.   

 

 10. 예언의 중단에 대한 논쟁

  이제 뒤엉킨 논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신약과 초대교회의 “예언”이 절대 영감을 받았는가, 혹은 무오한가에 대하여 논쟁한다. 그것은 충분한 신적 권위를 소유했는가? 개핀(Richared B. Gaffin, Jr)은 말하기를 그것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9 구루둠(Wayne A. Grudem)은 그렇지 않다고 맛 선다. 20 많은 사람은 믿기를 이런 논쟁의 결과는 은사운동의 미래에 위기를 가져온다고믿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논쟁의 결과는 오늘날 아주 적은 실제적인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

  만일 개핀이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예언은 사도시대의 완성과 성경캐논의 완성으로 끝났다. 현대적 현상은 오류가 있고 신약의 예언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현대적 설교가 사도적 설교와 유사한 것처럼 가르치는 내용을 가진 오늘날의 비 추론적 과정은 예언과 유사하다. 그래서 고전12:-14:와 그 밖의 구절 속에 분명히 말한 것처럼 이 영적 은사와 같은 일반원리가 여전히적용적이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이 은사라고 부르는 것은 신약에 나오는 예언과 정말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오류있는 유추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것은 비 추론주의자의 과정을 통하여 오류있는 말을 하는 영적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추론주의자의 과정을 통하여 오류가 있는 영적 은사인 설교와 아주 대조를 이룬다.

  상황적 내용을 가진 현대의 비 추론적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성경의 예언에서 유추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마치 추론적 과정을 통한 상황적 내용에서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반면에 그루둠이 옳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예언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런 예언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구약의 영감된 예언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비 추론적인 과정을 통한 오류있는 영적 은사이다. 만일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면 그 권위는 성경에서 나와야한다. 만일그 내용이 상황적이라면 그것은 성경에 더해지지 말아야한다.(신적 권위가 없기에) 하나님 위에있는 특별한 권위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루둠은 본질적으로 개핀이 한 것처럼 실제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현대현상에 대하여 개핀과 구르둠이 일치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현상들(비 예언과 예언)에 주어진 Level에 대해서만 일치하고 신약의 현상이 동일시하거나 단지 오늘날 현상이 유추적인가에 대해서만 불일치 한다.

  개핀과 구루둠은 벌써 오늘날 현상의 유오성을 인정했다. 개핀은 오늘날 현상을 영적 은사의 신학에 통합시키려고 덧붙이는 단계를 취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신학적 통합을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이 은사들의 사용을 위한 유추적인 칭의가 존재함을 발견하게된다.

  반면에 구루둠은 예언의 상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예언은 유오할 수 있지만여전히 계시적이라 한다.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중요하다고 한다. 개핀과 많은 다른 사람은 그들을 이해하고 분류하기에 어려움을 발견한다. 어떤 것은 어떻게 계시적이며 여전히 계시의 충족성과 어떻게 위배되지 않는가? 나는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을 상황적인 내용으로부터 구분시킴으로서 어떻게를 설명하고자 한다. 교훈적 내용은 성경에더해져선 안되지만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을 되풀이할 수 있다. 상황적 내용은 장거리 전화를 통해서 받은 정보와 같은 상태를 이룬다. 즉  그것은 귄위에 대해 특별히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용의 두 타입이 성경의 충족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만일 은사와 비 은사가 이런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나는 현대의 영적 은사의 논쟁이 쉽게 끝나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비 추론적인 은사를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 추론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은사그룹에 몰려 다니는 경향이 있다. 각 구룹은 그들 종류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인정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위로해야 만할 사람들을 포함하는 각 은사의 중요성을 고린도전서12장에서 또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추론적 은사나 비 추론적 은사가 그리스챤 공동체의 현저한 특징이 되게 하려고 항상 지배적인 독선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고전12:11) 반면에 우리는 주님이 그의 교회를 그의 완전한성경을 통하여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목적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특별한 신적 권위적 주장을더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적인 현상은 그의 권위가 성경에서 나온 교훈적 내용에 속하게 한다.(엡4:11참고)       

                             

11. 특별한 사건에 관한 역사적 설명

 우리가 생각하려는 결론은 교회역사와 비교할 때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은 교회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추론적 과정과 비추론적 과정 둘을 다 사용하셨다. 그리스챤은 가끔 탈선된 것과 싸워야만 할지라도 균형있는 방법으로 양자의 과정을 인정할 수 있었다.

  개혁적 전통은 적절한 예를 보여준다. 이런 전통은 전적으로 중지주의자의 신학과 연결되어있다. 개혁주의 저자들은 성경의 온전성과 충족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결론을 추론하여 추론적 과정에 대한 그들의 감상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비 추론적 종류의성령의 특이한 역사를 증거할 수 있다. 다음 것은 그 실예이다.

  첫째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는 그가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제시할 때 참여한 자들 중 하나였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 후스, 위클맆, 루터가 오는 일을 예언한 것처럼 경전의 종결된 이래 오는 일을 미리 말한는 어떤특별한 사람의 3 가지 계시(정경의 계시와 확신을 주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더하는 계시의 3급 종류)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확실히 이루어졌다. 우리 스코틀랜드의 위살트(M. George Wishart)는 추기경 비톤이 성 안드레 성문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예언한대로 그가 자랑한 자기 꾀에 빠져 수치스러운 교수형을 당했다. M Knox는 하나님의 사람이 불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렌즈 경이 교수형을당할 것을 예언했다. M Ioh Davidson은 그 나라 사람에게 많이 알려진 것을 예언했는데 영국에 있는여러 경건한 설교자들이 그와 같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가족주의자들이나 도덕 폐기론자들도 아니고, 데이빗 조지, 니콜라스, 갱, 랜덜, 윌웨잍, 덴, 가족주의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거짓된 영감의 4급 종류의 예언(사탄적 예언)이 있다. 즉, 허치손 여인은 다니엘이 거짓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자 굴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보스톤 법정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예언했다.비콜드는 원수의 손아래서 문스터 마을 구원받을 것을 예언했다. 그와  그의 예언자는 고문을 당해매달려 죽었다. 데이빗 조지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난다고 예언했으나 결코  성취되지 못했다. (p43) 나는 3급 과 4급(사탄적)의 예언의 차이는 이렇게 말한다. 1. 이 위대한 개혁자들은 어떤 삶도 자신들이 예언을 성경처럼 믿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오는 사실들을 예언하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어야한다. 그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것처럼 특별한 사건과사실에 대하여 자신들의 예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심판의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행하고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의 유대인의 소명에 대한 예언과 요한계시록 1:10절과 전체를 통하여 보인 예언처럼, 스스로 성령에 의해 영감된 기관이라고 말한 일이 결코 없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것처럼, 이런 특별한 사건과 사실을 특별한 사실과 사건에 관한 예언으로 믿지 않는자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치손은 Rise Reigne 61페이지 27항에서 말하기를 그들에게 일어난사건에 대한 특별한 계시가 성경처럼 무오 하다면 성령이 이 두 저자이기 때문에...(P44) 그들의 것을 성경으로 믿어야한다고 주장한다. 2. 그리스도의 경건하고 신실한 증인들에 의해서 계시된 사건들은 말씀과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콜올드, 존 매티, 죠 스키켈스(잘못이 없는 자기 동생을 죽인), 살인치 말라는 확고한 명령 맛서 순수한 사람을 죽인 살인의 영 사탄에게 속한 다른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홥법적인 판사들을 일으켜서 죽이도록 독일의 보울러스에게 가르쳤다. 성령의 충동이나 영감의 모습으로 비극적인 종국을 예언한 경건한 개혁자들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맛서는 복음의 원수들의 영감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한것처럼 그들을 죽이는 수행자들이 아니었다. 엠 위살트는 놀만과 존 레슬리스가 추기경 비톤을 죽여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리거나 동의하지도 않았다. 2.(3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악이 악인을 좇고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해롭지 않는 비밀, 그들을 이끄는 성경의 영의 강한 충동으로서 그들을 그 예언에 거룩한 공의의 기준을 경건치 못한 사람에게 특별히 적용시켰다. 그들만이예언자들이고 그런 행동의 동조자가 아님을 알렸다. 21  

 

 John Flavel의 생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 날밤 그는(Fravel) 배를 탔다....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징후를 보았다. 그가 배에 오르자 때마침 선원들이 두려워하는 폭풍이 일어났다. 그들이 대경실색하고 있을 때, 아름답고 지혜로운 한 근엄한분이 테이불에 앉아 계셨다. 그는 요람에서 칭얼대는 한 아이를 달래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작은 휘초리를 들고 가만히 있지 않으면 때린다!”고 위협하는 어떤 아버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 꿈에대하여 흘라벨 씨는 꿈을 생각한 후, 어떤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을 먹을  풍세와 기상이 매우 좋아 그의 친구가 기분을 내고 있을  흘라벨 씨는 대답하기를 지난   때문에나는 자네들의 마음과 달리  고난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고 했다덧붙이기를 그는 자기 꿈에 이런일을  때마다 거의 그대로 되었다고 했다.

  이윽고 그들은 포틀랜드의 5 리이그(영미에서 약 3마일-역자 주) 나갔을 때 위험한 대폭풍이 일어났다. 22

  존 호우(John Howie)는 웰츠(John Welch)와 부르스(Robert Bruce)와 같은 스코틀랜드의 언약자들로부터 많은 예들을 인용한다.

  주의 날, 그의 집에서 불결을 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썼고, 퓨리탄이라고 불리는 것을 별로 좋지 않게 여겼던 웰츠는 어느날, 자기 집 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불렀다. 이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온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며 그의 경계에서 주의 날을 범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집에서 그를 내 좇으시고 그의 후손 중 어느누구도 그것을 누릴 수 없었다. 이 일이 그대로 되었다. 이런 때에 그가 좋은 외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모든 일이 그를 반대했고 그의 재산을 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구입자에게 소유물을주려고 할 때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웰츠는 참된 선지자라고 했다. 23

 

  {웰츠}는 그녀(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위하여 주님과 씨름했는데 가까운날에 한 슬픈 일이 일어날것이나 주님은 남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감독들이 그 땅에 퍼져나갔을 때 교회를 타락 시켰던 때였다.24

 

어느 날 말에 옷 짐을 싣고 온 두 상인이 마을 책임자로부터 발행한 통행증을 가지고 (이것은 흑사병이 없다는 증명이다) 물품을 팔기 위하여 찾아왔다. 이 모든 것을 본 놀란 문지기들은 책임자를 부르기까지 그들의 출입을 중지시켰다. 그들이 오자 책임자의 증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존 웰츠가 불리워져 그의 의견을 듣게되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아름다운 하늘 공간을 바라보면서 한참 생각에잠겨있었다. 비록 그가 들은 말이 없다할지라도 그는 기도하는 태도를 계속 취하면서 잠시 후에 영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큰 소리로 확신하면서, 바로 이 짐 속에 전염병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책임자들은 그들에게 떠나가라고 말했고 그들은 약 20마일 떨어진 컨낙(Cumnock)이란 마을로 가서 그들의 물건을 팔았다. 거기서 이런전염병이 생겼고 죽은 자를 묻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 일은 그들로 하여금 웰츠를예언자로 인정하도록 했다. 25

 

그는(웰츠) 그들(에딘버러의 두 시민)에게 말하기를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문제를일으키는 좋지 않은 두 목사가 있었다한다. 그것은 세상에 알려졌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 두사람은 바로 패리크 갤로웨이(Parrick Galloway) 와 존 홀(John Hall)이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Galloway가 갑자기 죽었고 그때에 Leith에 있던 Hall은 그의 여종이 시장에 간 사이에 집에 홀로 남아있다가 죽었는데 그녀가 돌아와 발견했다. 26

 

 오취트리와 함께 저녁에 함께 앉아있던 그는(웨츠) 종전처럼 경건한 교훈적 담화를 그 사람들과 나누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잘 받는데 교황에게 속한 한 젊은이가 웃기도하고 조롱하며 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웰츠는 잠깐 멈추고 회중으로 침묵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뛰고, 그 불량자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했다. 이윽고 그 사람이 넘어져 테이불 위에 죽었고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그 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27

  웰츠가 법정으로부터 돌아와서 월칠트리 경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다룬 탄원이 어떻게 되었냐고 했다. 그 주인은 말하기를 그것을 왕에게 올렸지만 그 왕은 목사들을 그렇게 반대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기각 당할 것이라고 했다. 웰츠는 말하기를 “아니요. 주인이여! 당신은 하나님과 나에게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전달하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그 일에 대하여 당부하였는데도 당신이 불신실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재산과 명예를 취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분명히 볼 것입니다” 이 일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재산과 명예는가족의 상속자도 아닌 일개 견습생인 캪틴 제임스(Captian James)의 아들 제임스 스튜월트에게 옮겨졌다. 28

 

(웰츠는 아일 근처의 자기 집으로 그의 아내를 보낼 때 다른 길로 가도록 말했다) “당신이 갈 때 아일에 발생한 전염병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되었다.29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하던 부르스씨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목사들이 떠나는 것이 가까웠다. 우리의 생활은 그후에 더 비참하게되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실 것을 똑똑히 보게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30

 

  캐트린 마샬은 그의 남편 피터에 관하여 이런 내용을 말한다.

 

 별이 없는 어두운 밤에 범버프(Bamburgh)로 향하는 가까운 마을로부터 돌아오던 Peter는 습지를 가로지르면서 지름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글로룸 길(Glororum Road) 곁에 깊고 험한 화강암 채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위험한 그 지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날 밤은 정말 칠흙 같았다. 그의 발자국이 옮겨질 때마다 바람소리와 야생 조류들의 소리와 때로는 양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베드로야...”하고 부르는 어떤 이의 소리를 그는 듣는다. 그 소리에는 큰 위기감이 감돌았다.

  멈추어서 그는 “예 누구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잠시동안 그는 들으려고 했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고 바람 소리 뿐이었다. 늪지는 모두 말라 버린것 같았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몇 발자국을 걸었다. 그때 또다시 더 위급한 음성으로베드로야”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칠흑같은 어두움 속을 살피면서 공포에 질려 멈췄다가 갑자기 장애물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을 때, 그는 벌려진 돌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 있었다.한 발자국만 더 가면 죽음의 공간에 떨어질 뻔하였다. 31

  카톤 매더(Cotton Mather)는 다음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일반적인 믿음 외에] 특별한 믿음(Particular Faith)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위로로서 의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나 저기그때나 지금, 보증을 받지만 절대 주권적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헌신된 신자는 그가 무엇이며 언제 될 것인지를 믿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초자연적인  때문에... .그의 마음에 강한 인상이 남는다. 그래서 눈물이 쏟아져 아주 녹아지거나 그대가 하나님에 대하여 바라시는 기도를 하도록 확신을 주신다그런 감동은 그의 마음에 분명한 빛으로서 새겨져서 마치 천상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충만한 힘이 임한다비록 그에게 강하게 증거되었다 해도 여호와는 그대가 바라는 소원을 친히 들어주신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설교(Martyrology)가 복된 순교자 홀랜드(Holland)와 관계된 것에서 어떤 실예를 볼 수 있다. 그를 반대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은 후, 그는 말하기를 지금 나는 매일 핍박하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눈물을 쏟으며 구하는 당신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을 확신한다나는 지금 그것을 담대히 말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하나님은 잔인한 너의 손을 잘라버리신다고 말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이날 후에  자리에서 불과 경멸의 시련을 주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져그는 스밑힐드에서 불타 죽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당신은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교회에서 말씀을 하는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예언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 외에, 그리스도의 많은 고백자들을 강요했던고난 속에서 아무도 이상한 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32

 

  ... 시간에 관하여 감동(Increace Mather에서 특별한 믿음의 예)이 넘치는 활동 중(1694년10월), 그의이웃가운데 스스로 선언했던 천사들에 관한 큰 흔적을 가지면서 빛나는 영의 특이한 역사가 있었다. (그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아신다) 그리고 이 일로부터 그에게 전해진 메시지(혹은 더 많은메시지)가 있었다. 즉, 그는 영국으로 가고자하는 마음에 부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되었다이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섬김이 가장 많은 것을 위하여 그렇게  것이었다하나님의 천사들은 그의 섭리가 나타나는 곳에 그에게 임할 것이다. 33

1676년에 그는 그의 마음에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11월19일에 스가랴3장7절...을 가지고 설교하라는 이상한 감동을 받았고 그 설교는 이상한 예언을 포함했는데 아주 큰 불이 일어나는 예언이었다.... 다음 주의 날에 그는 설교하기를... 주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두려운 심판을 일으키실 때 그것에 대한 경고를 주기 위하여 어떤 종의 마음을 자극시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임할 일을 준비하려면 그 경고를 기억해야만 한다.... 바로 그 날 밤, 참혹한 화제가 그 이웃에서 일어났다. 34

  그는(Increace Mather) 1678년, 그 해가 될 때 공적으로 3번 이상 경고했다. 그는 진실한 설득을 당했고 그곳에 매우 중대한 질병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의 죽음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경고가 있었다그의 친구들  어떤 이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1678년경에 일어난 “죽음의 병”을우리는 알고 있다. 작은 물집이 일어났고... 그 유명한 헨리 모어박사는 Fanatiks 가운데, 보통 계수되지 않은 사람인, 이런 현상을 해결하는 어떤 실마리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의 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능력이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역시 그가 기뻐하시면 자기 종들을 보내어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중단하지 않으신다. 부인할 수 없는 한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특별한 일들이 있는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가끔 있다. 35

  2월 6일에... 나는(Increace Mather) 잠시동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주 안에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단지 나는 “하나님이  잉글랜드를 구하신다하나님이 뉴잉글랜드를 구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도록 큰 위로와 확신에 의해서 끓고있던 무릎을 일으켰다.  내가 바라는 이 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4월14일에 [영국에서 오는]작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그 날(2월6일), 즐거운 승리와 완전한 패배로인하여 컬크(Kirk)가 뉴잉글랜드의 정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36

  매더 씨는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영국에서 영국민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일을 준비하셨다는 강한 설득을 당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정말 그는 이런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기를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용기를 얻는 감동을 받았다. 신중한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그가 현실화되었을 때 말했다. 37

 

  어떤 이들은 카니살드(Camisards)에서 “예언적인” 현상을 인용할지도 모른다. 38 그러나Camisards 가운데 일어난 일들은 무질서와 거짓 예언을 포함한다. 심각한 박해와 훈련된 지도자들의 소수가 사람들을 비평적인 분별력이 없고 훈련의 의지와 기술이 없게 만든다. 훗날에 1715년초기에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안토니 법정(Antonie Court)은 그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중(노회)의 안내자요 중심이었다,. 다른설교자들은 불신과 자만으로부터  자유하려 했고 억지로 잘못되거나 교훈의 부족으로부터 자유하려 했기에 그를 싫어했다. 오직 그들은 더 나은 상담자와 인도자를 원했다.... 성경은 믿음의 유일한법칙으로 주장되어졌고 반 성경적 위험한 특별계시는 거절되어졌다.(1715년의 총회) 39

 

  Camisards가운데 혼합된 현상의 성격은 Mather, Rutherford,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즐겼던 신중성을확고하게 해준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사도의 무오성과 후기 비 추론적인 과정의 유오성 사이를구분시키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독자들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위의 보고들이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묘사하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다. 그들은 변이의 과정을 통하여 묘사되었는가? 최소한도로 그 보고는 보고자들이하나님이 할 수 있는 분이심을 가리킨다. 소수의 예외를 제켜두고, 그 보고자들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한 개혁 신학적 전통 안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보고자들은 하나님의 비상 섭리적 활동에 관한 개혁주의적 사고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런 특별한 현상의 모든 일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3절에 주어진 설명에 포함되어있다. 즉“보편적인 섭리가운데서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시되 그것 없이, 그것 위에서, 그것 반대로 행하시는데 있어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시며 자유로우시다”. 그렇게 묘사된 하나님의 일은 확실히모든 비 추론적인 과정을 포함시킨다. 이런 많은 확실한 비 추론적인 과정은 이런 “수단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경륜의 비밀에 대한 강한 위탁 때문에 이 고백서는 보편적 방법의 수단들과 결합되지 않은 역사도 행하실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경우에 긍극적 결정적 요소는"그의 기뻐하심”에 달려있는 것이다. (*)

 

 Footnotes

* 뻔 포이츠레스(Vern Poythress)는 웨스트민스터 신약 해석학교수이다. P.O. Box 27009, Philadephia, PA 19118.

  1. 참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1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Qq.23-26

  2. 이 다이어그램은 Edmund P. Clowney의 강의실에서 발췌한 것으로 조금 변경되었다.

  3. 카리스마 편에는 구루둠의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Westchester;Crossway, 1988) 277-297; 비 카리스마의 경우, 리델보스, The Authority of the New Testament Scripture(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3); R.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Studies in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Baker, 1979) 89-93를 보라

  4. 또다시 나는 이 개념에 대하여 Clowney의 강의에서 발췌한다.

  5. J Deer의 Surpri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Grand Rapids: Zondervan, 1993) 64-71,에서 오늘날 신유은사와 사도적 은사간의 순순한 동일시보다 오히려 유사성에 대하여 어떻게 논의했는지를 주의하라. 이 점에 있어서 그의견해는 나의 견해와 마찬가지다.

  6. 메시야적 은사의 수준은 우리 주님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의 관계에 신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석하기가 어렵다. 그의 인성의 관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은 추론적 과정(요10:35-36, 마22:31-32)과 비 추론적 과정(17:27, 눅10:18)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7. O.P. Robertson, the Final Word: A Biblical Response to the Case for Tongues and Prophecy Today (Carlisle: Banner of Truth, 1993)84.

  8.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직접적 간접적 전달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직접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요한 자신의 심리적인 말과 구약의 다니엘이나 에스겔에 대한 요한의 이전 묵상을 배경으로 하든하지 않든지 계시록의 환상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의 시장한 상황을 수단으로 삼든지 않든지 사도행전10장의 환상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구약의 베드로의 이전 지식과 누가복음 24:44-49절의 예수님의 교훈을 알고 있는지 아니든지 설교를 주실 수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분명히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역시 전달의 결과적인 언어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대답하는 것은 필요하다. 역사적 연구의 수단에 대한 누가의 사용은 그 산물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못한다. 직접성은 단순히 한 산물의 권위를 토론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지 못한다.

  9. 연속성의 최상의 토론은 아마 구루둠의 Gift일 것이다. W.A.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I Corinthians(Washington: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2). 중지주의자의 경우는 Gaffn의 Prospectives: R.F White, "Gaffin and Grudem on Eph2:20: In Defencese of Gaffin's Cessationist Exegesis," WTJ 54 (1992) 303-320: “Richard Gaffin and Wayne Grudem on 1 Cor 13:10: A Comparison of Cessationist and Noncessationist Argumentation," JETS 35/2 (1992) 173-181.

  이런 질문에 대한 글들은 부피가 있다. 그러나 구루둠과 개핀은 두 중요한 위치의 가장 특별한 사람이면서 훨씬 폭넓은 범주를 취급한다.

  10. E.W. Bacon, Spurgeon: Heir of The Puritans (Grand Rapids : Eerdmans, 1968) 156.

  11. ibid.

  12. O. Guinness, the Dust of Death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73) 299

  13. 다른 많은 사람을 따라서 로벗손은 “그들이 삶을 위한 그의 뜻”을 특정화하면서 “주님의 말씀이라고”주장하는 어떤 특별한 말씀과 아주 관련을 시킨다. (Final Word 88-95, 특히 p89)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유동적이며 혼란되고 강압적인가를 지적한다. 그러나 나의 교훈적 내용과 상황적 내용간의 구분은 그 문제를 설명한다. 아마설명된 상황적 내용은 그의 뜻에 대한 교훈적 의미에서, 전혀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고 단순히 상황적 정보일 뿐이다. 만일 내가 나의 이를 닦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의 뜻을 알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가없다.

  14. C. Brumback, What Meaneth This? (Springfield: Gospel Publishiung House, 1947) 259; K McDonnell, Charismatic Renewal and the Churches(New York: Seabury, 1976) 145-146

  15. R.C. Sproul, "Striking a Chord in the Heart of the Beliiever," Table Talk 14/11(November 1990) 13.

  16. Cf, Grudem, Gift 260

  17. 이 교훈은 ibid. 253-263에서 말하는 강조를 포함한다.

  18. 그래서 예를 들면 개핀은 Perspectives p120에서 오늘날 비 추론적 은사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즉“가끔 예언이라고 말하는 바가 실제적으로 성경에 대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적 적용이며 특별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성경적 교훈이 갖는 갑작스러운 증거의 다소일 수있다. 모든 그리스챤은 성령에 대한 더욱 자유로운 역사를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개핀은 필자가 비 추론적 과정을 통해서 나온 교훈적 내용으로 분류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로벗손은 Final Work p84에서 유사한 현상을 허용한다. 

  19. Gaffin, Perspectives

  20. Grudem, Gifts

  21. Samuel Rutherford (sic), A Survey of Spirituall Antichrist. Opening the Secrets of Familisme and Antinomianisme in the Antichristian Doctrine of John Saltmarsh, and Will.Del, the Present Preachers of the Army now in England, and of Robert Town, Tob. Crip, H. Denne, Eaton, and Others...(London: Andrew Crooks, 1648). part I, chap. 7, pp. 42-44.

  22. "The Life of the Late Rev. Mr. John Flavel," The Works of John Flavel (London: Banner of Truth, 1968) I.vill

  23. J Howie, The Scots Worthies (rev.ed.; Edinburgh/London: Oliphant, Anderson and Ferrier, 1902)123

  24. Ibid. 124

  25. Ibid. 124-125

  26. Ibid. 130

  27. Ibid.

  28. Ibid. 131

  29. Ibid. pp.132-133, 135-136에 다른 예언들과 죽은지 48시간 후에 깨어난 사건이 포함된다.

  30. Ibid. 145.

  31. C. Marshall, A Man Called Peter: The Story of Peter Marshall(New York: McGraw-Hill, 1951)14.

  32. C. Mather, Parentator: Memoirs of Remarkables in the Life and the Death of the Ever-Memorable Dr. Increase Mather (Boston: B. Green, 1724) 189-191. 역시 매더는 pp.191-196페이지에서 조심스럽게 소개하며 반대견해를 논증한다.

  33. Ibid. 193-194

  34. Ibid. 78-79

  35. Ibid. 80

  36. Ibid 98

  37. Ibid. 106

  38. E.g. P. Joutard, Les Camisards (Paris:Gallimard/Julliard, 1976) 57-101

  39. G. de Fe'lice, History of the Protestants of France(New York: Edward Walker, 1851)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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