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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글 편견과 싸우는 당신, 틀린 소수에게 빌미제공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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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과 다름은 다르다.

틀림은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가 기준이다.
틀과 기준이 존재하며 그 기준에 부합되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보편적 진리라고 하며, 개신교는 성경에 근거한다.

다름은 특성, 성격, 기능, 방향 등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같은 뜻을 지닌 사람도 방법이 다를 수 있다.
개혁주의에서 급진파와 온건파로 목표는 틀리지 않지만, 방법은 다른 것이다.

이렇듯 한 사회적 현상에는 틀림과 다름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각각을 따로 구분하여 가치판단을 해야한다. 즉, 분별을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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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공존할 수 있다.




# 소수와 약자의 자기연민

근래에 소수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호의적이다.
자본주의와 경쟁사회에서 대중들은 늘상 소외되는 개인과 사회적 약자로 내몰리는 자신의 모습에 '소수'와 '약자'라는 단어를 언제나 자기 것으로 준비해야 하기으로 생각된다.

언제든지 소수와 약자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집단적 반응이, 직접적인 권위에 대항하기 보다는 소수 자체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회장님께 직접 항의할 수 없다.
개인으로 거대한 조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약자로서 사회적 강자를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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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외쳐도 변화되지 않는 철옹성같은 기득권을 보면 소수는 좌절하게 된다.
이제 무기력한 소수로서의 자존감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에 대한 자기연민을 투영한다.

또 기득권에 대항하는 정치적 세력인 진보라는 진영과 씁쓸한 동거를 이루면서, 소수 자체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진보세력은 애초에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합된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 소수와 약자는 무조건 인정?

앞서 소수와 약자라는 자기연민에 빠진 자들은, 소수와 약자를 동일시하며 그것이 '옳은 것인가'보다는 동정심에 기초한 소극적 지지자가 된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그동안 움츠려왔던 사회적 질병들이 소수라는 가면을 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동성애나 소아성애자나 일부다처제 등 사회적 질병 취급되던 것들이 소수와 약자의 인권을 대표하는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인권에 목마른 대다수의 진짜 사회적 약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사회적 질병이 세상으로 탈출하는데 동조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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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권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소수, 약자라는 수식어만 갖추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받아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듯하다. 그것이 사회적 질병일지라도 말이다.

# 악한 소수 VS 선한 소수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봉건적인 가정분위기,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했던 기독교세력의 부패와 윤리적 타락이 이들에게는 분명히 비판의 빌미를 가져다 주었다.

이들의 행위의 열매가 잘못된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사회를 이끄는 주도적 세력이었을 때의 정책적, 의식적 교육의 실책이 가장 큰 잘못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는 무엇인 선하고 악한 것인가를 가르치지 못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아도 성공했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악을 지배논리로 삼았다.
권력과 돈이면 사회에서 초법적인 존재로 건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진리와 사실에 기초한 판단보다 상황논리로 기준없는 사회적 판단력을 행사해왔다.

선과 악의 기준이 없는 소수는 재앙이다.

# 고통과 고난의 분별

사회적 눈물을 흘리는 자는 두 종류다.
죄 때문에 받는 벌로 인해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자.
선한 진리를 위해 고단을 통해 눈물을 흘리는 자.

강간과 살인을 한 자가 감옥에 가면 죄값을 치루는 것이지 소수와 약자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소수라는 숫자와 약자라는 힘의 논리가 아닌, 선과 악의 기준으로 세상을 읽기를 바란다.

편견없는 세상, 다름을 인정하는 세상, 차이를 존중하는 세상! 그 이상은 실현되어야 할 아름다운 가치이다.

하지만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듯, 틀림도 인정해야 한다.

편견과 싸우는 선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편견을 이용하는 악한 자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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