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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보 교인처럼 되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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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인처럼 되십시오 (빌립보서 1장 1-2절)


< 행복은 기쁨과 비례합니다 >

 신앙생활은 거룩한 축제와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축제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읽으면 고난 중에도 신비한 기쁨이 생겨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신학생들에게 가끔 “졸업할 때까지 빌립보서 백번은 읽어라.”고 권면했습니다. 신학생들은 대개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기에 낙심되는 환경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빌립보서를 읽으면 신비한 힘과 기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 한 성도가 속초로 이사하게 되어 심방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설교 본문은 저의 목회 역사상 가장 길었습니다. 본문이 빌립보서 전체였기 때문이다. 본문을 함께 읽는 데에만 15분 걸렸습니다. 반면에 설교 자체는 저의 목회 역사상 가장 짧았습니다.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한 마음이 성도님을 향한 제 마음과 같습니다. 힘들 때마다 빌립보서를 많이 읽으십시오. 그리고 믿음 잃지 말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늘 기뻐하며 사십시오.”

 빌립보서는 질책이나 충고가 거의 없는 ‘사랑의 서신’입니다. 다른 많은 서신서들은 질책도 많지만 빌립보서는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말씀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읽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집니다. 또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인데도 ‘기쁨, 기뻐한다’는 표현이 아주 많아서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립니다. 왜 빌립보서에 넘치는 기쁨이 표현되었을까요?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과정을 보면 그 이유가 대략 파악됩니다.

 주후 52년 경,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행 16:9). 그 환상을 따라 배를 타고 유럽 마게도냐 지역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안식일에 강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유럽 최초의 성도가 됩니다. 그 루디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여성 주도적인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기에 교회에 세심한 사랑과 섬김이 넘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만 해도 시름이 가시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도 기쁨이 넘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교리를 통해 믿음을 도전하지만 빌립보서는 기쁨을 통해 믿음을 도전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라고만 해야 구원의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기뻐하며 살 때 그 모습을 보고 구원의 믿음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잘 키우는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부부가 늘 기뻐하며 살면 최고의 자녀교육이 됩니다. 그러면 전도도 잘 됩니다. 누군가 “왜 늘 웃고 다니세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을 믿으니까 늘 기뻐서 그래요.”라고 말만 해도 전도가 됩니다. 한 전도 왕은 복음을 잘 전해서가 아니라 늘 웃기만 해도 전도가 잘 된다고 했습니다. 늘 신비한 기쁨을 가지고 사십시오. 행복은 기쁨과 비례합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헌신 >

 사도 바울이 왜 기쁨이 넘치는 빌립보서를 썼습니까? 주후 63년경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그냥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또 갇히셨네.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하고 끝냈지만 여성 주도적인 빌립보 교인들은 기도만 하지 않고 감정이입이 되어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실까. 얼마나 배고프실까.” 그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은 즉시 위로금을 모았습니다. ‘열린 마음’을 ‘펴는 손’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교회입니까?

 저도 가끔 목회 사역이나 문서선교 사역을 할 때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 백기사 중에는 여성들이 훨씬 많습니다. 남성이 통 큰 헌신을 할 때도 자세히 보면 이면에서 그분의 아내가 “여보! 이번에 이 목사님에게 힘이 되어주세요.”라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따뜻한 배려와 섬김은 여성들의 주특기입니다. 그런 여성적인 특징을 가진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가장 앞장선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은 세심하게 돌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헌금하고 끝낼 때가 많지만 여성들은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배려합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위로금을 모아 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에바브로디도 집사를 선택해 겨울 동안 바울의 옥중생활을 수발하는 사명을 맡겨 바울 곁으로 파송했습니다(빌 2:25). 그때 에바브로디도는 그 사명에 기꺼이 순종해서 그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그런 사랑과 배려에 감격해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도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육신적인 필요도 어느 정도 풍성하게 채워졌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하나님도 그런 사랑과 배려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또한 빌립보서 4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이 세우고 은혜를 끼친 교회는 많았지만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섬김의 일에 참여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교회입니까?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헌신하니까 주변에 헌신자들이 많은 줄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 헌신하는 사람은 은혜를 아는 거룩한 별종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도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말씀에 은혜 받는 성도도 많고 특히 은혜 받는 목회자가 많으니까 후원자도 많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은혜 받은 사람 중에 주고받는 섬김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생각 외로 적습니다. 그래서 헌신적인 후원자에 대해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 후원의 손길이 없었다면 계산적으로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월새기>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변화되는 역사를 보면 그 기쁨과 고마움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 빌립보 교인처럼 되십시오 >

 당시 사도 바울은 지금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고 탈모도 심했고 일설에 의하면 뇌전증(간질) 증세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깊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가졌다가도 뇌전증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이 후퇴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돈도 거의 없어서 직접 천막을 만들어 팔아가며 자비량 선교를 했기에 큰 인물의 가능성이나 장래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장부 사업가 루디아는 사업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보았기에 사람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그녀는 사도 바울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았지만 루디아는 사도 바울로부터 엄청난 인물의 기운을 느끼고 “내가 후원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가 되겠다.”는 거룩한 사업가적인 감각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가 되었고 루디아의 영향을 받았던 빌립보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후원의 손길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주 고마워했습니다. 게다가 에바브로디도까지 파송해서 옆에서 옥중수발까지 들게 했으니 얼마나 그 고마움이 컸겠습니까?

 어느 날, 헌신적으로 옥중수발을 하던 에바드로디도가 병들게 되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수고하다 병들었으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빌립보 교인들도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가 죽으면 너무 슬픈 일이기에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간절히 치유기도를 드렸습니다. 에바브로디도도 자신이 죽으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간절히 치유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 기적적으로 그의 병이 낫자 사도 바울 빨리 그의 건강한 모습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를 돌려보내며 그 편에 빌립보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빌 2:27-28).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생각해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고 바울은 외롭고 힘들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해서 다시 그를 돌려보내는 모습을 보십시오.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얼마나 아름다운 선순환의 역사입니까? 특히 옥중수발을 자청해서 그 먼 길을 갔던 에바브로디도의 모습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상황이었기에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쁨과 감격이 넘쳤고 빌립보서에도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애정이 구구절절이 표현된 것입니다.

 어려운 때 후원해주면 큰 힘이 나고 그 일이 오래 기억됩니다. 빌립보 교인처럼 사랑과 헌신이 넘침으로 줄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아는 성도가 되십시오. 주는 것은 물론 받는 것에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상징물의 소통을 통해 마음의 교감을 이루십시오. 물질을 주고받을 때는 물질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마음을 읽으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격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물질 때문이 아니었고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문제에 처한 사람이 헌신하면 더 감격이 됩니다. 그렇게 계산과 사심이 없이 헌신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얼마나 복된 존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지갑 안에 있는 돈복만 빼낼 생각부터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십시오. 감동적인 사랑의 후원을 받으면 후원받은 사람은 기쁨이 넘쳐서 축복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 손길을 기억해주소서!”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질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칭찬했습니까? 그렇게 칭찬해서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 헌신이 풍성한 축복을 받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4:17-1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발적으로 바친 순수한 헌신은 결코 손해나지 않습니다. 헌신의 축복과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면 인색함이 사라집니다.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큽니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채워주실 때 마구 채워주시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채워주십니다.

< 복된 성도에게 필요한 의식 >

 사도 바울은 기쁨과 애정을 가지고 빌립보서를 쓰면서 가장 먼저 빌립보 교인들의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는 축복기도를 해주었습니다(2절). 그 축복기도를 해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1절). 그는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과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자의식이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특히 3가지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주의 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도 내 것이 아니다.”는 고백입니다. 종은 자기 소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종 자체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은 자기 과시나 자랑도 없어야 하고 오직 주인에게 충성하면서 칭찬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주의 종 의식을 가지면 섭섭할 일도 없고 속상할 일도 없습니다.

 둘째, 사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쓴 이 표현은 “나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표현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은혜를 받게 힘써야 진짜 은혜 받은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과 다른 거룩한 사명을 늘 인식해서 크게 꿈꾸고 크게 성공하고 크게 나누려고 하십시오.

 셋째, 축복권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축복기도(축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런 패턴은 바울 서신의 중요한 패턴입니다. 말씀을 풀어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마음을 여는 것이기에 마음 문이 열리도록 먼저 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에서 하나님이 초점에서 사라지고 복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복주의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복을 구하는 것은 결코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축복의 말과 기도를 많이 해주면 자신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삶에는 ‘기쁜 만남’도 있지만 ‘싫은 이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남도 고안하셨지만 이별도 고안하셨습니다. 성숙함이란 “삶에는 이별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20세 이전에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지만 부모님 돌아가시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못 살 줄 알았습니다. 속으로는 부모님을 많이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고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시간대로 더 좋고 편안한 곳으로 가셨다고 믿었고 저도 많이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누군가 헤어져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그 상황도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대처하면 더욱 성숙한 믿음과 복된 관계를 얻습니다. 남이 나를 멀리해서 헤어지는 상황도 잘 승화시키십시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을 축복해서 보내주십시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맡기고 잊으십시오. 때로는 사랑과 공의의 실천적인 교훈을 위해 내가 멀리해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 상황도 잘 승화시키십시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멀리는 하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신학적으로 “일반 성도에게 축복권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혹시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축복권은 없다고 해도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늘 복을 많이 빌어주십시오. 힘써 남을 축복해주는 것이 자신을 축복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축복을 많이 해주면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인간관계도 새롭게 열리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떠나면 새로운 누군가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더욱 복된 존재일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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