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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11> 인천시립합창단 첫 연주회 제목 ‘예배’로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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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대우합창단이 해체된 뒤 8개월 동안 깊은 실의에 빠졌었다. 하나님께만 의지하던 시간이었지만 너무 괴로워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프로 합창단만 안 맡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아마추어 합창단을 만들기로 했다. 대상은 선명회합창단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합창단이 바로 ‘서울레이디스싱어즈’였다. 젊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레이디스싱어즈는 선명회합창단과 같은 컬러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성인 합창단이었다. 인기가 대단했다.

1989년 3월 창단한 뒤 1993년부터 세계합창심포지엄에 초빙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고 미국합창지휘자협회(ACDA) 컨벤션에도 단골로 초청받는 합창단으로 성장했다. 연습은 살인적인 일정으로 진행됐다. 해외 연주회를 앞두고 서울 강남구의 연습실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잠시 휴식시간이 되면 20대 여성 단원들이 일제히 공중전화로 달려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느 날 그 옆을 지나다 얼핏 듣게 됐는데 일단 전화 연결이 되면 모두 “지휘자 때문에 짜증나 죽겠다”는 말들을 했다. 웃음이 났다. 하지만 단원들은 합창이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날로 실력이 좋아졌다. 젊은 단원들이다 보니 생활 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난 심술궂은 할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밤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자야 했고 식사도 직접 챙겼다. 잘못 먹고 탈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준 단원들 덕분에 레이디스싱어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합창단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갔다.

1996년 어느 날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 주어졌다. 인천문화예술회관 관장이 우리 집엘 왔다. 다짜고짜 “선생님, 인천시립합창단 지휘를 맡아주십시오” 하는 게 아닌가. 다시는 프로 합창단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다. 게다가 인천시립은 지휘자와 단원들의 갈등으로 해체된 일도 여러 차례였다. 대우합창단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내도 반대했다. 그런데 도전정신이 문제였다. 합창에 대한 열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지휘를 맡기로 했다.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직책도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였다. 난 ‘전임 작곡가’를 요구했다. 오디션을 통해 25명의 단원도 새로 뽑았다. 중앙대에는 6개월 안식년을 신청했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열정은 연습에서 출발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주 5회의 연습이 시작됐다. 대우합창단에서의 경험을 자양분 삼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지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이곳에서도 움직이는 합창을 시도했다. 낯설었기 때문에 반발도 컸다. 하지만 대부분 단원들은 지도를 잘 따라줬다. 인천시립합창단은 점점 정상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첫 연주회 준비가 시작됐다. ‘타이틀을 뭐라고 할까.’ 기도하던 중 예배라는 뜻을 가진 ‘미사(MASS)’를 택했다. 타이틀은 ‘인천 MASS’였다. 원칙적으로 시립합창단에선 종교음악 연주가 허용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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