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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1> 불우한 어린 시절 교회 성경학교 다니며 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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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고향인 아버지는 4대 독자로 6·25전쟁 중 월남했다. 아버지는 강릉에서 유랑극단 활동을 하다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양가 집안 모두 기독교 신앙과 무관했다. 친가는 종교가 없었고 외가는 무교와 불교 사이에 있었다.

낭인같은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4형제를 어머니에게 맡겨 두고 늘 집 밖을 나돌았다. 어린 나이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면 아버지는 술과 마작에 빠져 있었고,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4형제가 밀가루와 술지게미로 끼니를 채우던 기억이 아련하다. 동네 막걸리 공장 입구에 술지게미를 사려고 길게 늘어선 행렬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 부엌에서 형과 함께 수제비 반죽으로 비행기와 차 모양을 만들어 냄비에 넣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동네 꼭대기에서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종종 찾아 나선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사업이 잘 풀린 아버지는 계모와 곧 헤어지고 성북구 장위동에 정원이 있는 넓은 양옥집으로 어머니와 나, 형제들을 불렀다. 아버지의 가정적인 모습을 본 적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방학은 대부분 경기도 일산 고모 댁에서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사촌 여동생에게 이끌려 여름성경학교에 참가했다. 교회를 처음 만난 순간이다. 집에서 논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야 했던 교회를 여름방학 내내 오전·오후 두 번을 왕복했다. 교회 예배당 종탑과 작은 예배당, 교회 뒤편 높은 둑 너머로 흐르던 강이 기억난다. 한동안 나는 그 교회 주변에 집을 짓고 가축을 키우며 글을 쓰며 사는 꿈을 꿨다.

난생 처음 만난 교회를 방학 내내 그토록 성실히 다닐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여자 친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름성경학교에서 만난 교회 선생님들 덕이었다.

하루는 그 여자 친구를 좋아하던 동네 남자아이들이 교회 가는 길목을 막고 내가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것을 여자 친구가 흩어 주었다. 그 소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같은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교회 선생님들은 서울 아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신경을 더 써 주신 것 같았다. 그림에 솜씨가 전혀 없던 나의 그림도 따뜻한 시선으로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는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들어서니 낯선 사람들이 집 안의 가구와 짐들을 커다란 트럭에 싣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가족들이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정원 연못 나무 뒤에 아끼던 물건을 숨겨 두고는 언젠가 꼭 그 집을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에 월세를 얻었지만 아버지는 다시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다시 생계를 책임졌다. 어느 겨울에는 한동안 월세를 내지 못해 오후 내내 동네를 배회하다 밤에만 주인집 거실에서 잠을 자며 보내야 했다.

약력=△1960년 경기도 평택 출생 △연세대 신학과 △성공회대 신학대학원 사목신학연구원 △성공회 서울교구 희년교회 신부 △한국 샬렘영성훈련원 운영위원장 △한국영성상담학회 부회장 △성공회 브랜든 선교연구소 소장 △성공회 나눔의 집 설립(1986) △숨과 쉼 설립(2014)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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