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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영호 목사 <3> 80리 산길 걸으며 13곳 교회 돌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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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고 이종원 목사는 6·25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상군두리 시골 교회의 교역자로 파송됐다. 당시 아버지가 받은 사례비는 옥수수 두 말과 납작 보리쌀 서 말이었다. 아버지는 성도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고 최대한 검소하게 살았다. 틈틈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 스스로 사택 난방문제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상군두리를 거점으로 서석면과 내촌면, 창촌면 등에 퍼진 기도처들을 돌봤다. 매주 한 개 면씩 순회했는데 각각 70∼80리 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30㎞ 내외의 거리다. 이렇게 도보로 산길을 오르내리며 돌본 곳은 서광교회, 서석교회, 문암교회, 율전교회, 광원교회, 동창교회, 광암교회, 창촌교회, 방내교회, 성내교회, 운두교회, 장평교회, 내촌교회 13곳에 이른다.

아버지는 70∼80리 길을 오가는 동안 배고프면 솔잎을 따서 씹다 뱉었고 목마르면 황톳물을 마셨다고 한다. 교회를 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한낮에 문암교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어떤 건장한 사내가 “서울 매형”이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이어서 갈 길을 가는데 따라오더니 “아니 내가 매형하고 불렀으면 쳐다봐야 할 것 아냐”라면서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를 해치려고 손을 든 순간 어머니가 그의 몸을 붙잡고 “주여!” 하고 외쳤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떨리면서 사지가 굳었다. 덜덜 떨던 그의 소매에서 칼이 툭 떨어졌다. 혀마저 어눌해진 그는 살려달라며 사정을 했다. 어머니는 “우린 목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성경과 찬송가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며 가방 안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자 경직됐던 그의 몸이 풀렸다. 부모님은 그에게 착하게 살라고 타이르고서 길을 떠났는데 그가 보이지 않게 된 순간부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고 한다.

난 1962년 신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계신 지역으로 파송을 받았다. 아버지가 개척하신 서석교회를 담임하면서 율전교회와 장평교회 그리고 청량리 기도처를 순회하고 돌봤다. 아버지의 방식과 비슷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아버지는 걸어서 순회했고 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성도들의 가난은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명절이 와도 떡메 치는 집은 하나 없었다.

67년 3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홍천읍 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교회는 아버지가 6·25전쟁 전에 장로로 시무했던 곳이다. 지역에선 춘천중앙감리교회 다음으로 큰 교회였다. 부임 직후 첫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 대접한다고 차려진 밥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껏 그렇게 푸짐한 밥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식사 기도를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 종이 무엇이기에…” 하고 말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평생을 산골 교회로만 다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무지 이런 상을 차릴 수 없는 성도들과 박한 음식을 드셨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77년 창촌감리교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지난해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교회들을 돌아봤다. 이제는 동네에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교회들을 보노라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정리=김상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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