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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영호 <6> 나눔·섬김 몸에 밴 아내 덕에 목회 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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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남자는 평생 어머니와 아내의 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간직했던 이삭, 그리고 이런 남편을 어머니의 사랑과 아내의 사랑으로 위로할 줄 알았던 현숙한 아내 리브가…. 이 결혼은 믿음의 결혼이었고 하나님이 맺어주신 결혼이었다.

196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시골 교회로 파송 받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목회하던 방식 그대로 3∼4개 교회를 순회하며 돌봤다. 64년 늦가을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치던 이환신 교수님이 내 목회지로 불쑥 찾아오셨다. 내가 목회를 잘하고 있나 보러 오셨다고 했다. 교수님과 며칠을 보낸 뒤 아쉬운 마음에 교수님을 따라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날 아는 장로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장로님이 마침 잘 찾아왔다며 내게 좋은 처자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독신 목회를 결심했던 난 장로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다. 장로님은 서울 올라온 김에 만나보라고 강권했다. “만일 장로님께서도 아들이 있다면 그 처자를 며느리로 들이시겠습니까”라고 여쭤보니 숨도 안 쉬고 그럴 거라고 했다. 처자는 농협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처자의 퇴근시간을 기다려 그녀를 만났다. 마음에 들었다.

강원도로 내려간 뒤 아버지에게 서울에서 선 본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그 장로님이 추천하는 분이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이라고 허락했다. 그녀와 이듬해인 65년 5월 26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가난한 전도사라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실이었다. 홍현설 학장님께 축복기도를 받고는 첫날밤을 왕십리 처가에서 보냈다. 다음 날 강원도 산골 임지로 돌아오자 근처 상인들은 총각 전도사님이 결혼을 했나보다며 웅성댔다. 면사무소 옆길을 지나 교회 언덕으로 올라오는데 나와 아내를 지켜보신 장로님이 교회 종을 치기 시작했다. 성도들끼리 미리 의논이 오갔던 모양이다. 성도들은 종소리를 듣고 한 광주리씩 음식을 머리에 이고 교회로 모여들었다. 장로님 인도로 성도들과 결혼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나 이영호는 아내 이광자를 아내로 맞아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따라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이 약속을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난 이 혼인서약이 결혼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구구절절 부담되지만 이 약속에 신랑신부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오늘날 결혼 풍속을 보자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나님은 내 약점과 부족함을 아시고 내게 꼭 맞는 아내를 배필로 주셨다. 아내는 넉넉하지 않은 교회와 가정 살림, 숱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과 5남매 아이들 양육을 묵묵히 맡아주었다. 어느 교회를 가든 성도들이 “우리는 사모님 복을 받았다”고 했다. 나누기 좋아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이 섬기는 아내 덕분에 내 목회가 순탄했다. 혼자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정리=김상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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