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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본 받는 자 / 엡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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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본 문 : 에베소서 5장 1절 -2 절
제 목 : 하나님을 본 받는 자
 

행동과학자들은 몇몇 동물의 발육 단계에서 각인이라고 부르는 흥미 있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단계에서 어린 동물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동물이나 사람을 자기의 부모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오리의 눈에 개가 눈에 들어오고 그 개가 오리의 머리에 각인되면 오리는 개가 자기의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5장이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러므로 라는 말씀은 곧 바울이 4장 후반부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씀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4장 후반부의 말씀을 모두 아멘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4장 후반부의 거의 모든 말씀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에게 더 높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길가에 나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굵직한 부정 부패 사건에 그리스도인이 연류 되어 있는 이유로 인하여 도둑질하지 말고 깨끗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늘 싸우는 교회를 보면서 교인들은 그만 싸우면 좋겠다 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둑질하지 않고 착하게 사는 차원에서 말씀을 마치고 있지 않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사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방인들도 하는 것입니다.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준이 거짓말이 아니라 담배 피지 않는 것에 서글픔을 느낍니다. 빈궁한 자를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아니라 술 안마시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서글픕니다. 차리라 우리 한국 교회가 술은 마셔도 좋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담배는 피워도 좋습니다. 남을 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때 뭔가 어색하듯이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도둑질하는 성도들이 아주 어색해지는 그리스도 문화가 심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의 차원이 아닙니다. 도둑질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리 속에 하나님이 각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입니다. 담배 피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도둑질하거나 거짓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여기까지입니다. 설령 우리 자신이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이 기준을 허물어뜨릴 수 없습니다. 이 기준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입었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화장을 어떻게 했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나 잘사는 지 못 사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닮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 1절 먼저 우리는 닮는 것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철저히 비지니스 철학에서 나오는 닮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르켜 벤치마킹이라고 합니다. 어느 회사가 아이템이 좋아서 성공하면 그것을 그대로 카피하는 닮음입니다. 오직 성공을 위한 카피입니다. 여기에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벤치마킹을 해서 반드시 성공해야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의 눈빛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눈빛이 번뜩일 것입니다. 눈동자가 한자리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삐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공을 위하여 성공한 사람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닮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닮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관계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먹는 것도 닮고 싶습니다. 걸음걸이도 닮고 싶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눈은 맑습니다. 선합니다. 부드럽습니다. 한 곳을 깊이 응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을 닮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니니스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닮음이란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닮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떻게 여러분을 닮아 있습니까? 자식이 나를 닮는 것은 내가 자녀에게 사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주지 않고 다른 양아버지가 내 아들을 데려다가 사랑을 주면 내 아들은 양아버지를 닮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내가 사랑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사랑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나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닮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내 것을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 온 이런 우리를 아버지는 반겨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빈 털털이로 들어온 나를 아버지는 반겨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내가 손에 가진 것이 있어야 나를 반겨 줍니다.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급할 때 돈을 빌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면 세상은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돈을 꾸어주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추석에 고향 찾는 것이 부담이 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반겨 주십니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지 않아도 반겨 주십니다. 찢어진 옷을 입고 빈털터리로 집에 들어가도 아버지는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아들은 이제부터 세상을 닮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몇몇 형제는 주일날 예배를 한번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청년 예배에서 또 예배를 드리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신림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닮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는 눈빛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한 분 그 분에게만 시선을 집중시키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는 방법은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방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나를 닮으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나를 닮으라고 말합니다. 닮는 것은 또한 따른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달라스 신학교 총장인 척 스윈돌 목사님은 20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젊었을 시절 제대로 된 교인들을 만나지 못해 갈등을 겪다가 교회를 옮겨 다녀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남 가주에 어느 교회에 와서 20년이 넘게 미국의 최고 설교자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장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따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그토록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는 얼마나 많은 심적 부담이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홍해를 건너게 했던 지도자입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게 한 지도자입니다. 게다가 여호수아 주변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들로 득실거리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는 말씀을 몇 번씩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주님을 닮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몇 번씩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버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기막힌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십니까? 느끼십니까? 감격하십니까? 1740년 스코틀랜드 캠버스랭에서는 놀라운 영적인 각성과 참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 오가나 복음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회심을 하는 중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평범한 설교자의 십자가 설교 앞에서 이 노인은 아이처럼 한없이 울며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였냐 면 바로 그 지방의 신학교에서 교리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교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속죄의 교리를 알고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속죄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전에는 십자가에 대하여 단지 알았으나 이제는 내가 가르치던 것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성경적인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격적으로 깊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가 그들의 삶을 붙잡았고 십자가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고 십자가를 찬양하며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하나님을 본받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묻음 복음을 가슴에 각인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 빛을 전한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능력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자랑한 것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로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서 기적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모든 기적이나 사랑의 본질은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은 향기로운 제물이요 생축이었다고! 여러분! 어떻게 사람의 피가 향기롭습니까? 어떻게 내 아들의 피가 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보여 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눈이 먼 분이십니다. 코도 마비된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들이 십자가에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피비린내도 향기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 가는 아들을 보고도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내 자신을 비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 그 죽음을 보시고 향기롭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존귀한 존재입니다. 혹시 육신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까?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십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의 인생을 저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 중간 단계를 생략한 하나님의 사람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위대한지 남편의 사람이 초등학교 학생이 알아야 할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생략한 채 곧 바로 대학에 들어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런 사랑을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초등학교 수준에 있는 남편의 사랑이 없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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