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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습니다. /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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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습니다.
본 문 : 마가복음 10:35-45.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슈테판 밀러라는 독일인이 이상한 사진을 한 장 발견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종목에서 두 사람의 동양인이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 자리에 서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메달리스트에게서 볼 수 있는 감격과 기쁨 대신 침통한 표정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슈테판 밀러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을 그 사진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슈테판 밀러는 사진의 두 사람을 추적하게 되었습니다.

1988년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성 때 백발이 성성한데도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복하게 달리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1936년,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메달 리스트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4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 주익 언덕에서 일본과 독일선수를 따돌리고 한국의 황영조가 우승하였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시상대의 감격을 그대로 안고 관중석에 있던 한 노인에게 금메달을 드리며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관중석의 할아버지는 56년 전에 웃었어야 할 함박웃음을 그제야 가득 머금고 즐거워하셨습니다.

바로 이분이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손기정 선수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 옆에 섰던 분은 동메달을 딴 남승용 선수였습니다. 그들은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로 하는 금메달을 얻고도 왜 침통한 모습으로 섰어야만 했을까요? 개인에게 뿐 아니라 국가의 명예였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용 선수에게는 금메달보다도 더 소중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해방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우승의 기쁨은 56년 뒤, 그들의 후배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후에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남다른 꿈이 그들로 하여금 가장 기뻐해야 할 때 가장 슬픈 장면을 연출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본문 앞 문단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대신해서 사역을 계속할 제자들에게 아마도 해 주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과 가까운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조용히 찾아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르실 때 저희 두 사람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세워주십시오!” 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구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질문하시며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먼저는,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우리는 좀더 높아지고자, 좀더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철학자 니체는 사람들의 본능 속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주도권을 잡느냐 아내가 주도권을 잡느냐를 두고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 조차 영향력 있는 자리, 존경받는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만의 게임일까요?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이런 욕구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것만 구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구하라.”하십니다. 잠시 잠깐 땅에서 누리는 존귀한 자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 앉아 영원히 누리게 될 그 자리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진정 사모해야 할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주님이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주님이 말씀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시피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 처럼 파멸과 분열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제자들이 택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이 땅에서는 혹시 가능할지라도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과 좌편의 자리는 얻지 못합니다. 이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앞서 말한- 중에 오늘 특별히 집중적으로 생각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 좌우편에 오를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앞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 보좌의 좌우편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세우는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45절 말씀을 보시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언뜻 보면 섬김에 대한 말씀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존재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본문의 전체 주제 구절일 뿐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부활하여 승천케 하사, 모든 이름이 그 이름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드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각각 좌우편에 세워 달라고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왜 화가 났습니까?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어느 자리에 앉든지 분할 일이 없습니다. 누가 앉든 축복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화를 내고 논쟁과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모두들 마음속에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여 사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자 합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기도문 중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이라는 기도문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부디 얼어 죽을 만큼 춥게 하소서.
그래서 너무 추워서 세상의 닭살 커플들이 밖에 절대 싸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소서.
추워도 옷 꾸역꾸역 껴입고 기어 나오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지하철, 버스, 택시 싸그리 파업하게 하소서.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소서.
그래도 서로 연락하려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휴대전화, 집 전화 다 불통되게 하소서.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게 하소서.
자가용 커플들이 있으니
일주일 전부터 물가가 100배정도 뛰게 하소서.
그래서 600원하던 커피 한잔이 60만원하게 하소서.
돈 많은 커플들이 있으니
오후 7시를 기점으로 교회를 제외한 시내 모든 점포들이 정전되게 하소서.
그래서 카페, 술집, 나이트클럽, 음식점, 극장 다 깜깜하게 하소서.
그래도 싸돌아다니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만나면 사소한 걸로도 머리 터질 만큼 싸우게 하소서.
그래서 집에 그냥 들어가게 하소서.
올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눈 내리지 마소서.
눈마저 내리면 내 눈엔 피눈물이 납니다.
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낮에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TV에 재미난 것만 하게 하소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했던 재방송은 하면 안 됩니다.
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잠 많이 자게 하소서.
오후 일곱 시부터 스스로 잠들어 중간에 깨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논스톱으로 잠들게 하소서.
차라리 잠들어 있고 싶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 마음속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한, 다시 말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축복하지 못합니다. 물론 육체를 가진 우리는 남들이 잘 될 때 축복하지 못하고, 내가 못하는 것은 남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사람들은 신앙생활과 생각, 행동에 있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위한 삶인가 하는 목표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 초기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지, 어떤 고생을 하던지,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다.’ 고 고백했습니다. 

땅에서 얻는 높은 지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왕 욕심을 가지려면, 더 큰 욕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를 확인해 보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십시오! 하나님 보좌 좌우편의 자리는 바로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 앉아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사람은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에 받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느냐?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고난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말씀을 좇는 결과로 따라오는 고난과 역경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혹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가고자 몸부림치는 선한 자존심을 가진 삶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고 후손들이 전합니다. 순교 직전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로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집으로 가지 않고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일본고등계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를 토하듯이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나는 이 순간, 다섯 가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두 번째, 장기간의 고난을 잘 견디게 하소서. 세 번째로, 나의 노모와 처자와 사랑하는 교우들을 주님 돌봐 주시옵소서.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주기철 목사님은 오래 살거나, 위대하게 사는 삶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삶 속에 십자가 주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변치 아니하도록, 죽음 앞에서도 변절치 않도록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당하는 고난을 감당하며 끝내는 주의 영광 위해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결국 승리자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작은 장애에도 신앙적으로 타협합니다. 날씨가 안 좋으면 주일날 주님 앞에 나오는 시간을 쉽게 생각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조그마한 갈등과 다툼이 생기면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없다!’고 합니다. 고난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우리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말씀하십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 교회 한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학교 공부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해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어요. 세상이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도록 만들지를 않네요.” 형제의 갈등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감당하는 자가 주님 나라의 영광스런 자리에 세워진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보좌 좌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섬기는 삶을 삽니다. 43절, 44절 말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남을 부리기 좋아합니다. 권세 갖기를,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곳에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 다른 사람을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자리는, 오늘 내가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자리와 힘을 포기하고 되레 섬기는 모습에서 준비됩니다.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주님은 제자들과 식사 하시던 자리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세숫대야를 놓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바로 종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종처럼 섬기며 살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은 얼마나 높이셨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하여야 하리라”

주님은 복음을 섬김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 원하셨습니다. 153전도 운동 때의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가 그 가정의 아이를 정성스레 돌보았고, 성도의 사랑에 감동된 두 분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입구에서부터 “저리 가시오.” 저리가면 이리가라 몇 번 반복한 끝에 다시 돌아갔다 합니다.

섬김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섬김은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오늘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눈, 상대방의 영혼과 내면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야 됩니다. 그 후에 우리 손을 뻗어 행동으로 옮길 때 ‘섬김’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권면하십니다. 정말 욕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누릴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자리에 앉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귀한 자리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따라가는 데에 따라오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얻을 것입니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슬픔이 1992년 황영조 선수가 획득한 금메달로 인해 기쁨과 환희로 변했듯이, 주님 재림하셔서 남이 알지 못했던 우리의 섬김과 고난을 갚아주실 소망을 품으십시오. 이 땅에서가 아니라, 진짜 위대한 야망인 하나님 나라에서 그 빛난 자리를 누리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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