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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 사랑 / 마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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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 사랑
본 문 : 마 1:18
설 교 : 이한규목사 (분당사랑의교회) 
     

< 성탄절은 벽을 깨뜨리는 날 >

가난한 한 하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옆방에 사는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지만 그는 갈 곳이 없어 홀로 자기 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벽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침대가 삐꺽거리는 소리와 이상한 신음소리였습니다. 벽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던 그는 엄청난 슬픔과 배신감에 사로잡힙니다. 순결한 처녀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옆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젊은이는 살 희망을 잃고 목을 맵니다.

다음 날, 경찰은 그 하숙집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침대에 목을 맨 청년과 옆방에서 비소중독으로 침대에 엎딘 채 죽은 처녀였습니다. 처녀의 유서에는 '고독의 고통'과 '삶에 대한 혐오감'이 구구절절이 배였습니다. 두 영혼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로움에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습니다.

태초에 인간이 죄를 지어 생긴 것이 이 벽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벽이 생겼고, 인간 사이에 벽이 생겼습니다. 또한 환경과의 벽도 생겼고, 자기와의 벽도 생겼습니다. 이 벽이 있는 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벽을 넘을 수많은 방법들을 주셨지만 어느 방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에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벽을 완벽히 넘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첫 번째 성탄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은 '벽을 깨뜨렸던 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캐롤 들으며 즐거워하고, 밤늦도록 아는 사람들과 파티를 하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탄절은 '벽을 깨뜨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벽을 허물어뜨린 힘으로 사람과의 벽을 허물고, 자기와의 벽을 허무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가장 싫었던 사람에게 찾아가서 악수해주고, 찾아가지 못할 형편이면 마음속으로 찾아가서 간절히 기도해주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의 벽도 무너뜨려 비전과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수많은 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모습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 주님의 성육신이 가르쳐주는 것 >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신비로운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는 성육신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성육신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랑을 잘 표현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언어로 그 잘 표현한다고 해도 그 사랑의 만 분의 일도 잘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자녀 삼아준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습니까? 자세히 보면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점을 하나님도 아시지만 우리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입니다. '우리의 진심'과 '하나님의 진심'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은 사랑에 있어서 항상 손해 보시는 입장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도 딴 생각을 하며 대하면 큰 모욕인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모욕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모욕으로 받지 않으시고 "허허!" 웃으시면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긴 해야 하겠는데 인간의 언어로는 마땅한 단어가 없으니까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민 21장), 그냥 '이처럼'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집념은 대단하십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심판을 면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힘들게 사시다가 우리 죄를 지고 대신 십자가에 지신 것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그 사랑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배신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배신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배신하는 모습을 보면 흥분을 합니다. 신문을 보니까 그 흥분이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야구 선수 임창용 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네티즌들이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겉으로 볼 때 임창용이 아내를 배신한 것 같이 보이니까 얼마나 임창용을 욕했습니까?

10여 년 전에 최진실은 고등학생 조성민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성민이 야구로 유명해지면서 최진실에게 편지를 해서 "누나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결국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고 마침내 결혼까지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부부싸움을 하다가 조성민이 5살 많은 누나 최진실의 뺨을 때리고 임신한 최진실을 여러 번 밀쳐 넘어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급기야 조성민이 "이혼하자!"고 합니다. 최진실은 "이혼은 못하겠다!"고 합니다.

서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조성민은 "최진실이 귀국한 후 한 달 동안 밥 한번 제대로 차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했는데 최진실이 그것을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최진실은 "조성민이 다른 여자와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배신자라고 하니까 네티즌들도 편이 갈라져서 들끓고 있습니다. 자기가 직접 배신당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들은 배신을 보면 자기가 당사자가 아니어도 분노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이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자주 배신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말로는 "저도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하면서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 얼마나 배신감이 들겠습니까? 배신을 일삼는 우리를 얼마나 죽도록 때려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죽도록 때리시지는 않고 그 죽을 자리에 예수님을 서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의 성육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 둘째, 성육신은 '실천적인 사랑과 실천적인 믿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직접 실천하심으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실천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실천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가슴으로 왔다가 손과 발로 그 실체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다다르면 신비하게 홍해를 갈라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가리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큰 망신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순종하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40일 동안 기도하는 것보다 삶의 현장에서 40일 동안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기도가 기도로 끝나면 안됩니다. 기도는 순종으로 끝나야 합니다. 사랑이 사랑 자체로 끝나면 안됩니다. 사랑은 실천에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실천적인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집사님이 예배를 드리는데 안내를 하는 집사님이 황급히 와서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까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급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 집사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집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 집에 불이 났다고 하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 불을 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떠서 보니까 집은 다 불타고 재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라는 갈대 섬으로 봄철에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한참 노는데 주변에서 불이 났습니다. 봄철에 갈대밭에 불이 붙으니 어마어마하게 타는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달려가서 불을 끄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그 친구는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인정했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색깔이 있는 구두도 신었지만 그 친구는 항상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색깔 있는 구두나 양복을 입으면 "신학생이 그게 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급한 순간에 그 친구는 불을 끄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친구들은 다 동원이 되어 불을 껐습니다. 불길이 다행이 잡혔습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기도한 친구를 향해 모두 "야! 그 친구 믿음 참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믿음이 없이 불을 껐던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되었는데, 혼자서 간절히 그렇게 기도했던 그 믿음 좋은 친구는 목사는커녕 나중에 이단에 빠져서 돌아다니다가 이제는 예수도 안 믿고 지낸다고 합니다.

우리 믿음이 자기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심부름만 시키는 믿음, 하나님을 하인 취급하고 내가 해야될 일을 하나님께 다 미루어 버리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기도에는 항상 실천이 따라야 하고, 사랑에도 항상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없는 기도, 실천이 없는 사랑은 거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도는 요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행동해야 될 때 행동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고 두려움과 불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종과 실천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행동하는 사랑을 먼저 실천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행동하는 사랑과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셋째, 성육신은 '헌신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에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드렸습니다. 즉 성육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향하심이고,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육신에 반응해야 합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에게도 우리 자신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를 하려거든 먼저 성육신의 자세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전도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희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준다는 것은 전도 대상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가끔 우리는 고난을 당합니다. 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육신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가서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지금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신앙이 좋은 말이 아니라 방정맞은 말입니다. 그 말은 절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침묵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유일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먼저 자식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가서 위로하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고난받는 분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고난받는 자에게 성육신의 위로가 있게 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도 '영혼 구원'과 '영혼 위로'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설교 이상입니다. 어떤 분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전철이나 버스에서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선포 이상입니다. 어떤 분은 전도한다고 하면서 "성도에게 고난이 왜 올까?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하는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잘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설득 이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전도의 개념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씀합니다(롬 10:15). 만약 전도하는데 설교와 선포와 설득이 중요하다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입이여!"라고 했을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찾아가는 성육신'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전도하러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 정신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풍성함을 추구하십시오. 부요함도 추구하십시오. 그래서 부요함을 얻었거든 혼자만의 부자가 되지 마시고 사명적인 부자가 되시고, 의로운 부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낮은 자를 위해 쓰고,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더욱 행복하게 살고 보람된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예비하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찾아가는 성육신의 사랑 >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찾아가는 사랑이 상실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기주의적인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와 '성도'는 본질상 정반대 말인데 지금 '이기주의적인 성도'라고 하는 이상한 괴물이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봐도 내가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성경 말씀을 나의 편의를 위해 맞추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교인이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기도한 후 눈을 떴더니 옆에 앉은 손님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가십니까?" "예!" 그들은 곧 친해졌습니다.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한 사람이 김밥을 꺼내서 먹었습니다. 옆 사람이 몇 개는 주겠지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계속 혼자만 먹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참 못된 교인이다!" 그 낌새를 느끼고 이 교인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기 말라고 하셨는데 남의 것을 탐내다니 참 못된 교인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남을 향해 "못된 교인이다!"라고 하는 이기적인 성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적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이 나를 찾아와 주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찾아가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해서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되었다면 남의 위치에까지 내가 낮아지는 성육신의 사랑이 없으면 알맹이가 빠진 신앙이 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때문에 당하신 주님의 성육신의 희생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밤, 양 우리에 이리 떼가 나타나 양들을 무참히 찢어 죽였습니다. 양들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아침에 주인은 양떼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양들은 이리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인기척이 나면 다 도망갑니다. 강제로 한두 마리 붙잡았지만 주인도 몰라보고 앙탈을 부렸습니다. 양들을 사랑했던 주인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주인의 아들이 보고 말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양들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을 찾아다녔습니다. 양을 만날 때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양처럼 소리를 내고, 양처럼 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머리는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고, 목은 쉬었고, 손과 발은 찢겨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마리, 한 마리 찾아 12마리를 찾았지만 결국 아들은 양을 찾다가 입은 상처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냥 지켜봤던 아버지는 너무 매정했습니다. 어떻게 양 몇 마리 때문에 아들을 죽게 놔둡니까? 또한 그런 모습을 자행했던 아들은 너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양 몇 마리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립니까?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양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첫 번째 성탄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아 우리는 주님처럼 찾아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연말입니다.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많이 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우리의 발걸음이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아름다운 발걸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이 '찾아가는 성육신의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는 귀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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