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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사는 비결 /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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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으로 사는 비결 (갈라디아서 2:20) 
이름 임경택 목사 (종로교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꼬박뽀박 잘 나오면 되는 것입니까? 십일조 잘 바치고 술담배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은 매우 기초적이고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에수믿는다고 죄를 쉽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윌치만 니 라는 유명한 목사님의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은 죄에서 떠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어느날 본문을 읽다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내가 죽어야 죄에서 해방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죽자"
말로만 죽는다고 말하지만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월치만 리는 아랬층에 주방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윌치만 니라는 사람이 죽은 것을 아세요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알렸습니다.
"여러분 윌치만 니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광고를 하고 나자 그때부터 그에게 정말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음을 선포하고 광고하십시요.
1.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설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살면 죽습니다. 죽으면 삽니다. 내가 주면 주님이 채워 주십니다. 살고 싶으면 죽으라. 죽고 싶으냐(?) 그러면 살라(네 고집, 자랑, 육체. . .)!!
기독교인은 죽는 것부터 배워야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은 거듭난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럴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의 구습과 악습, 옛 사람의 혈기, 나쁜 습관, 또한 옛사람의 정욕과 욕심, 옛사람의 고집과 자존심, 옛사람의 죄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옛사람을 포기하면 비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지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니 이제부터 나는 옛 육신에 소욕에 쫒아서 사는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경건하고 거룩함이 이르는 길에 들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옛 사람이 죽지 않음으로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단의 종노릇하다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십시요.
주님은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내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 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주님은 첫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저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맸다 이 말씀입니까?" 두 번째 제자는 무례하게도 대들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한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 준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나를 장사지낸 십자가입니다.
나의 욕심과 죄와 혈기와 이기심과 정욕과 모든 잘못된 성품이 못박혀있는 자기 십자
가입니다. 더러운 죄의 이름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지면 질수록 가벼워지는 십자가입니다.
지면 질수록, 쉬워지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십자가를 회피하면 할수록 그 십자가는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매끈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가가는 목공소에서 잘 다듬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의 더러운 습관과 죄를 죽이기 위해서 칼질을 하고 채찍질을 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런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죽은 죄의 시체를 메고 다니는 사람은 승리의 보습, 자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혈기와 정욕과 이기심과 잘못된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 살아서 꿈틀거린다면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겠습니까?
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람이 또 다시 살아서 다닌다면 온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옛 사람의 혈기, 습관, 정욕, 욕심, 고집, 자존심등 죄의 뿌리들이 죽어 있습니까?.
뿌리가 죽지 않으면 계속 자라나게 되어있습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다시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사람의 뿌리가 죽지 않으면 한 순간 열심히 해 보지만 또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죽는 회개의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한계가 있어서 제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탄했고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말씀에 “날마다 내가 죽노라” 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결심하고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되는 원인이 세상을 사랑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노에가 됩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쾌락을 날마다 쫓아 헤메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노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서 노름할 장소나 찾아 황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꾼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자랑, 유행, 권세, 정욕. . .을 사랑하고 부러워하게 되면 그것들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부인의 십자가 육체의 욕망을 장사지낸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못박지 않고 깨끗하고 화려한 십자가를 좋아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 마가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
시는 것이습니었다.
이를 본 마가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가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가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에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달라고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가에게
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마가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 받는 자 마가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가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감히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지겠습니까? 그러나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든가,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지는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
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이렇게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요. 당신은 오래
도록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다녔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젠 가식의 가면을 벗고 당신의 실체 그대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흔히 교회에 한두 번 다닌 사람을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사는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고집과 주관과 철학과 자존심과 내 욕심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주인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주관과 고집으로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겸손합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어린 아이처럼 순종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그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쓰레기 같은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면 오늘 2월 첫 주일에 다시 버리시고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자랑할 것들이 많은 당시 엘리트 중에 엘리트 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단단히 변화된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자 그는 그 때까지 세상의 모든 것
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제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
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죽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지금 죽어도 떳떳한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안에 살고 있다면 죽는 것이 뭐 그리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주안에 충성하며 살 때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까봐 하나님말씀대로 온전하게 살지도 못하면서도 내심 두려운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 바울은 십자가에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지만 지금은 유한하고 연약하여 아직도 불완전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육체 가운데 살고 십자가에 죽은 바울도 육체 가운데 삽니다.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려 대신 죽으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번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번은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 율법대로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에는 감동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한계, 이중성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았을 때는 겉으로는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삶이었지만 속은 날로 피곤하고 힘든 삶이었는데 이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사는 바울은 감동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무적으로 사는 삶과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삶은 다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의무 때문입니까? 부부사랑, 가족사랑, 자녀사랑 때문입니까?
여러분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교회나오는 것도 교인 의무 때문입니까? 주님 사랑때문입니까?
어떻게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까? 체면 때문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때문입니까?
바울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사는 이유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아니 우리 가족 전체를 살려 주신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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