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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가는 길(1) / 사 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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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가는 길(1) 사 44:1-5
범어교회 장영일 목사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1. 정신적 공항 가운데서 

이 창동 신임 문공부 장관이 얼마 전 청와대 각료회의에서 대구 시민을 두고 표현하기를 "정신적 공항 상태"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지하철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길거리 곳곳에 내 걸린 조의 현수막은 집단적 우울증을 갖도록 하는 듯 합니다.

한동안 대구 시민들은 서울 시민 못지 않은 정신적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계속 배출하면서 우리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의 산실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대구에 산다고 자랑하며 다녔고, 타지에 갔다가 돌아오면 아늑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 대구가 권부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소외감과 함께 이젠 대형 사고의 산실처럼 되어 저마다 부끄러움을 가지며 살고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대구 경제의 주력이었던 섬유산업이 사양길을 걷고 있고, 몇몇 잘나가던 대형 건설회사가 무너지면서 경제 사정이 최악의 상태라고 합니다.

이로 인한 여파들이 각 개인과 가정에 크게 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오늘 설교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믿음과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2. 정체성을 확립합시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환난가운데서 자기들이 누구에게 속한 존재들인가를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5절)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이 분명했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타내고 다녔습니다. AD 70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나간 유태인들이 중세기 이후에 게토(ghetto)라고 불리우는 집단촌락에 모여 살면서 주변의 기독교도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불이익을 당하는 중에서도 그들은 가슴에 유태인을 나타내는 노랑색의 별표를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하여 낮아졌을 때 자기를 숨깁니다. 다른 사람보다 늦어지면 아예 자기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성공하고 앞선 자만이 자기를 나타냅니다. 일의 승패가 존재의 승패는 아닌데도 우리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일찍이 독일 태생 유태계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란 책을 통하여 이 문제를 깊이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일의 승패가 산업 사회에서는 곧 물질의 소유와 연결되어지기에 남보다 많은 것을 지니게 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며 과시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람됨을 잃어버리고 오직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어리석은 사회가 되어버리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프롬은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난 사회를 만들려면 다음 몇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무한한 성장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인 성장을 지향한다. 바꾸어 말하면 무한히 소비하려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소비한다. 둘째,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중시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깨달음에 삶의 중심이 있다는 뜻이다. 셋째,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보장받아야 하며,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조직이나 제도에 휘둘려서 살지 않고 각자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뭏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찍이 소유에 의한 삶이 아니라 존재에 의한 삶을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11세기 스페인에서 태어난 유태 낭만주의 시인 유다 하 레비는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당신을 버리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고
당신 곁에 있으면 죽음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막스 디몬드, 세계 최강 성공 집단 유대인, 동서문화사, 200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며 삽시다. 이것은 곧 찬양의 삶이며 노래부르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3대 표지는 곧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녀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며, 우리들의 정체성일 것입니다.


3. 신앙의 근본을 재확립합시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우리에게 근본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1-2절)

즉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자시오 나는 그의 피조물이란 신앙입니다. 이 근본 신앙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나에 대한 주권과 소유권 모든 것을 잡고 계심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대표적 신앙인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시편 23편이 그 결정체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어느 장로님께서 저의 설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설교가 "만절필동"이라고 하십디다. 중국 황하강을 두고 만들어진 글귀입니다. 굽이굽이 만 번이나 그 방향이 바뀌어 흘려도 끝내 황하는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내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만절필천"이요 "만절필선"할 것입니다.

한 번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시면 우리는 어딜 가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향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그 약속이 3-4절입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3-4절)


4. 마무리하며

베청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달달 무슨 달, 00같이 둥근 달"에 교과서의 정답은 "쟁반"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쟁반만 쓰지 않고 어떤 아이는 "대야"라고 쓴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어떻게 생겼든지, 무슨 직업을 갖고 살든지, 그의 소유가 얼마가 되든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 . "고 손으로 쓰며 삽시다.

이 믿음이 바로 하늘가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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