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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 /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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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제목 :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
본문 : 히12:1-3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보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3.1운동을 일으킨 애국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남강 이승훈 선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오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지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1백억 가까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했을 대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7년 어느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상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 연하인 안창호에게 허리를 굳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승훈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훌륭한 일들을 하는데 자기는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어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보곤 했습니다. “저 놈은 눈망울을 보니깐 여간 총명한 게 아니야!” 어느날 총명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일선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공부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그의 부모에게로 갔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를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는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드디어 사재를 털어 정주 오산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오산은 정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로 다섯 개의 살이 둘러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운 다음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온 이승일이란 이름 대신 이승훈이라고 바꾸었고 호를 남강이라고 정했습니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적미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 고문 매 달리는 고문 두들겨 패는 고문 등을 당했지만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구치소에 갇혀 그 동안 수 없는 고문을 달게 받으면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지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습니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 한 60이나 되셨을 겁니다. [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너댓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둘째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한 달 만에 교회를 지은 사람입니다. 재목을 사 들이고 돌을 날랐습니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정주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두번째 투옥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라고 속으로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습니다. 3월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고 합니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습니다. 오산교회의 예배는 단정하고 질서정연해서 오산교회를 방문하는 저명한 목사들이 그 단정함과 질서정연 함에 감탄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승훈 장로는 1919년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습니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셋째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만나 동지로 포섭하였고,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기독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러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로를 신음처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이승훈 선생이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인 한경직 목사였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과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값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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