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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떠남의 원리 / 출 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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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의 원리
12:1-13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고집쟁이 성도 길들이기

소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려고 하면 불빛을 무서워하는 소는 영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외양간에 있는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서야 소는 그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시고자 할 때 사람이 깨어지지 않고 고집부리며 자기 뜻대로 하려 하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잠시 치우시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어도 깨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플 때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병만 나으면 이제 예수 잘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병이 나으면“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나?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지.”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말로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밥통이 엎어지면 주님 앞에 나옵니다. 몸에 심한 병이 들고 직장을 잃고, 하는 일마다 안되어 올 데 갈 데 없으면 그 때에는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되고 평안할 때에 주님께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출애굽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떠났습니다. 룻은 모압을 떠났고, 베드로는 그물과 배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였고,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났고 선교사들은 미국을 떠나 우리나라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확장되어 간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1400여 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400여 년 전에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유월절(逾越節)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 사건은 성경전체의 중심사상이요, 구약을 풀어 가는 열쇠요, 출애굽기의 핵심입니다.

어린양을 준비하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치시기 위하여 들어오시는 날은 애굽에게는 죽음의 날이요 멸망이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날이요, 새 출발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달로 달의 시작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양을 준비하여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각 사람은 어린양을 취하되 각 가족대로 취하고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하나를 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보호할 것입니다. 즉 애굽의 전지역에서 죽음의 곡성이 울리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살길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린양을 준비하도록 명하신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친히 어린양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준비하라

유월절 준비는 집을 중심으로 외부적인 면과 내부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외부적인 준비는 어린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들을 칠 때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어린양의 피의 효력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속에서 실제화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의 구원에도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내부적인 준비는 그 밤에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긴박성을 보여 줍니다. 이 밤, 즉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밤에 애굽의 모든 신들은 무기력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기록과 그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몇 년 전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의 입구에는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치하에서 참혹한 인종 차별 정책으로 600만 명이 죽어갔고 동구권에 흩어져 살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생생한 기록과 현장들을 보여주고 있는 그 박물관에는 연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아픈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현장 체험입니다.

400년의 기나긴 세월을 억압과 고통과 아픔의 역사에서 해방하시던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직접 제정해 주시고 그런가 하면 유월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아 주시면서 지난날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어떠한 자리에서 구원하셨는가를 후대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지침서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각자 어린양을 취하라고 하신다.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會衆)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每人)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400년 동안 온갖 억압과 고통과 서러움을 받아오던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게 되던 날 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가족대로 매인(每人)이 어린양을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취하되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흠 없는 어린양과 각 가족대로 잡은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과 원리가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없다고 하여서 아무 양을 취해서도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한 어린 양으로 하되 흠 없는 어린 양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공로나 선행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어린양의 피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구원의 방법과 원리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을병에 걸려 암 덩어리를 떼어 내어야 산다고 하는데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항생제를 투여하고 식이요법만을 한다면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수술을 통해서 암 덩어리를 떼어 내어야 산다면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수술이라는 한 가지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은 유월절(Passover)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 년 동안 살던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출애굽이란 말을 영어로 exodus 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탈출한다 또는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해서 자주 말씀했습니다.“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13:1).“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쌔"(눅9:31). 여기 별세란 말의 원어는 exodus 인데 출애굽 한다 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별세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뜻' 으로 헬라어로 '엑스도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엑스도스'는 출애굽이라는 말인데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별세한다'는 말을 쓰신 것은 혼자 별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죽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2절)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떠나는 별세고, 부활하는 것은 다른 세상의 별세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 한마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날마다'라는 말을 썼는데 날마다는 매일 같이 사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듯이 너도 스스로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을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본 신앙고백으로 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고 몸을 떠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4:6).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의 하나는 주변성이라고 했는데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사마리아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즉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과 나그네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이든지 강요를 당하든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을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떠나 가난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떠남은 죽음을 의미한다

떠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종교요 애굽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고 택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별세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하기 위하여 믿고 별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별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바울의 신앙이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대해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어린양들을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 대신 어린양을 잡아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잡아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만을 따랐던 사도 바울의 생애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고 죽으면 생명에 이른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나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와 산지에 유리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도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바울의 죽음은 바울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이지만 실상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요 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게 되고 죽으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건짐 받은 것이 저희의 무리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군대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 하나님이 저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유월절을 가장 큰 절기로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못할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선한 씨, 의의 씨, 사랑의 씨, 진리의 씨, 평화의 씨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계속 뿌리노라면 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날, 세계평화의 날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이 된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잡으며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며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떠남이 중심에 서는 길이고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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