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를 인하여 / 엡 2:1-10

  • 잡초 잡초
  • 292
  • 0

첨부 1


에베소서 2:1-10
은혜를 인하여
임대식 목사


연구 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리서처 센터에서 “아시아에서 스스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필리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의외로 일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조사를 보면 행복이란 GNP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행복이란 경제적인 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균적으로 일본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에 비해서 한 달을 더 일한다고 합니다. 일년 중 노동시간이 한 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출퇴근 시간도 그렇습니다. 유럽은 집에서부터 직장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30분인데, 일본은 평균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은 그 생활 속에서 얼마나 긴장감을 느끼고 살아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세계에서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부러워 하지만, 그러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기쁨이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자살하는 등 갖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자,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행복의 문제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쁘나 슬프나,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나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고 은혜가 있음을 믿을진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 새가 높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갑니다. 그러나 새가 날기 위해서는 먼저 공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배가 물 위에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갑니다. 이것 역시 추진력이 강한 엔진과 또 이것을 운전해 나가는 능숙한 선장과 기관장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를 떠받쳐 주는 물의 힘입니다. 이것을 부력이라고 하죠. 이것 없이는 아무 일도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도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부력을 믿고  부력을 이용해 몸을 움직여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운동을 수영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은혜가 먼저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먼저 있습니다. 은혜 안에 내 수고도 있습니다. 내 땀 흘림도 은혜 안에 있고, 내 모든 노력도 은혜로부터 비롯됩니다. 또 은혜 안에서 결실하는 것입니다.

이 봄에 농부가 수고하고 땀을 흘려 돌아오는 가을에는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은혜 안에서 수고했기에 은혜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 있습니다. 은혜로 살고,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희생도 했습니다. 땀도 흘렸습니다. 평생 교회를 세우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돌이켜 보니 우리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3절)

우리 인생들은 다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도덕적이고 어떤 사람은 좀 더 악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는 다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행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을 뿐이요, 사람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앗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의 생전의 일입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띠는 화려하고 높은 보좌가 있는데, 천사가 말하기를 “이 보좌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겸손한 자, 성 프란시스의 자리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아무리 제자이지만, 슬그머니 스승에 대한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는 요모조모로 성 프란시스의 약점만 찾으려 애썼습니다.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시스는 선뜻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참으로 악한 사람이지.” 제자는 이때다, 하면서 반문을 합니다. “선생님, 그것은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성자입니다. 선생님이 살인을 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온유하게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더랍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네. 나는 그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야.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도 베풀어졌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그 때에야 비로소 제자는 눈물로 회개하면서 성 프란시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과연 성도 여러분들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은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나됨은 ‘나는 본질상 이런 사람이다, 모든 사람 중에 참으로 고약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 안에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될 때에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은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 속에 살고 은혜 속에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라야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겸손하게 되고, 자기됨을 알게 되고,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고, 은혜의 그 깊고 넓은 뜻을 알게 됩니다.

남미의 브라질에는 아마존이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이 있습. 그 강의 하구가 얼마나 넓은지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강인지 잘 구분이 안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배가 바다에서 항해를 하다가 그만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마존 강에 와서 식수를 얻어가려고 그 방향으로 키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강인지 통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한참을 헤메다가 옆에 지나가는 배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물을 얻기 위해 아마존 강으로 가는데,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그랬더니 대답이 “당신들은 벌써 아마존 강에 들어와 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미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누리고 있는 은혜의 은혜됨을 모르기에 여전히 불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귀한 것. 믿어지지 않으면 제아무리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배웠어도 믿어지지 않는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 구원의 사건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선물이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것은 그 속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 선물을 물질로만 받으면 그것은 뇌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에 담겨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게 될 때에 비로소 선물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 겸손하게 받아야 합. 그 사랑의 뜻을 모르고, 그 사랑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본래 어떤 보수나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철왕이라고 불리는 카네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카네기는 원래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온 식구들이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친구 되는 핸더슨 부인이 선뜻 20 파운드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언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멀리 낯선 땅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준 것입니다.

카네기 가족은 너무 고맙고 감격했습니다. “빌려간 돈은 꼭 갚겠습니다” 거듭 약속을 했습니다. 미국에 가서는 열심히 악착스럽게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50센트씩 핸더슨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해 저축을 했습니다. 어느덧 어렵게 모아둔 그 돈이 20파운드와 맞먹는 200불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카네기 가족은 200불을 송금수표로 바꾸고 나서 그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제 빚을 갚고 자유하게 되었다.” 참 기뻐했습니다. 그 날 카네기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가족 여러분,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갚을 수 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빚은 갚을 수 있으니 은혜는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 평생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린 돈은 갚을 수 있지만, 그가 나에게 준 사랑은 결코 갚을 수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입니다.

때론 우리가 변변치 않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공로로 돌리면 거기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칭찬을 받으면서 이것이 자기 때문인양 착각하면 문제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어디까지가 내 노력입니까? 몇 %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몇 %가 내 노력의 결실입니까? 건방진 사람들은 99%가 내 노력이고, 1%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100%가 다 은혜요, 내가 수고한 그것도 은혜요, 내가 믿은 그것도 은혜요, 내게 주신 열심, 감격, 깨달음 그것도 다 전부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은혜가 은혜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선물.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이요, 신앙의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공동번역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실험삼아 만들어 본 습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온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낸 걸작품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되는대로 반죽해서 함부로 쓰다가 버려도 될 싸구려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를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하늘나라의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의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리고 지으신 선한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