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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를 받음에 / 행 8: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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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음에 / 행 8:35,36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그를 장사했습니다. 유대의 공회는 기독교를 해로운 종파로 선포했고, 이것을 근거로 남녀를 끌어 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핍박자는 공회의 임명을 받고 그 명령을 시행하던 사울이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여러 도시로 피신해 갔습니다. 대부분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신했고 어떤 이는 다메섹과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그 흩어진 성도들은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는 특별히 빌립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이방 선교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본받아 행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선교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마리아 성에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마리아에서의 빌립의 복음 전도의 성공이 예루살렘에 알려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 곳으로 보내서 선교 사역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사마리아 교회에 새로운 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해묵은 반목이 이제 그리스도의 새 질서 안에서 깨끗이 사라졌음을 특별히 확증하는 증거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안수 할 때 성령께서 오순절 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와 같은 방식으로 곧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전에 원수였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의 대대적인 전도를 성공리에 마친 빌립은 주님의 지시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가사 길로 향했습니다. 그 길은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의 신앙과 생활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대순례 절기들 가운데 한 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었다고 봅니다. 그는 그 곳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구했고, 돌아가는 길에 그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읽는 부분은 이사야 5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인으로서는 그 내용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니다. 그때 빌립이 다가왔습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본문의 말씀을 설명해 줄 깃을 간청했고, 빌립은 예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인은 성령의 깨우침을 받고 흐르는 물을 보자 빌립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며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하며 세례를 받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례를 받음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음에

빌립은 유대인의 핍박을 피하여 사마리아성에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성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곳이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는 지시를 하시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의 회심을 몰랐던 아나니아가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행 9:11-14)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라고 반문했습니다. 빌립도 반문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은 성령의 지시에 반문 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와 하늘의 축복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데서 나옵니다.

빌립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갔습니다. 광야에 이르렀을 때 빌립은 한 사람을 보았고,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는 두 번째 지시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 빌립은 성령이 지시하신 일이 무엇인지, 자기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빌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마22장9절의 "사거리 길로 가라"는 말씀은 이방인을 부르실 것을 예언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뜻밖의 곳으로 가서 전도할 기회의 문을 여십니다.

택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성령으로 역사하사 빌립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 세례를 받음에 거리낌이 없게 하시고 세례를 받게 하신 줄 믿습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시니 복음을 전하여 듣는 자들로 믿고 세례 받고 구원 받도록 주어진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음에

내시는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권세 있는 자였으나 자신의 부와 권세 때문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였다고 봅니다. 비록 구약의 율법을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예배의 행위를 위해 먼 예루살렘까지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실 메시아를 약속한 구약과 그 율법만으로도 이 같은 열정을 갖고 예배하려 예루살렘을 찾은 내시를 통해 예배의 태도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복음의 전모를 밝히 알면서도 하나의 형식에 그치는 무미건조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헛된 예물에 격노하셨고 가증한 예배를 싫어하셨습니다.

(호 9:4)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말 1:8-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껍질만 남은 당시의 예배와 간다게 여왕의 내시가 드린 정성스러운 예배를 살펴보신 줄 믿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줄 믿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 간다게는 정식 유대교인은 아닌, 유대교의 구약성경을 읽고 집회에만 참여하는 '준회원'격인 사람입니다.

이러한 내시가 고적한 사막의 길에서 '구약의 복음장'이라 불리는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을 때 빌립 집사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주권적 섭리아래서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때로 사막 같은 세상 중에 '나 홀로 내어 던져진 존재'라고 느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명과 고난에 참여한 성도들은 그 고독감이 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과 지혜로우신 손길은 한 순간도 우리 곁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히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쁨 속에서 이웃과 사명을 만나게 되고, 사막 같은 삶의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시는 에디오피아 사람으로서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으며 피로한 여행 중에도 성경을 읽는 자였습니다(27,28절).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하며 성도를 지도하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복음은 형식이나 철학, 변론이 아닙니다. 오직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그에게 빌립 집사님이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그에게 다가 갔습니다. 국고를 맡은 자로서 교만의 유혹을 받기 쉬운 자리에 있었지만 자기의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낯선 여행자를 초청하여 자기의 옆자리에 앉힐 수 있는(31절) 넓은 아량과 겸손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 한 메시아를 알게 된 줄 믿습니다.

내시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극명하게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예언한 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32절).
그는 인생을 대신해서 고난 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의미로서의 고난인지를 빌립에게 물었습니다(34절).

기독교로 개종한 유명한 랍비 긴스버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바로 그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유대교 랍비였던 자신의 부친께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부친께 재차 질문했다가 그는 성경을 빼앗기고 뺨을 맞았습니다. 후에 기독교 신자에게서 그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즉시 복음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빌립 집사는 성경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35절)했다고 합니다. 빌립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 가르쳤다고 봅니다.

사 53:7,8의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하신 말씀이 메시야의 고난임을 설명하고 그 메시야가 예수님임을 밝히고 예수의 가르치심과 수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그 내시에게 가르쳤다고 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합니다. 빌립과 내시는 바로 이 성경의 진리가 계시하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모든 삶의 의미와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적 삶을 통해 삶의 진정한 사명과 목적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진정한 죽음의 의미인 심판성 형벌성을 알게 되고 인간 '목숨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불의 앞에 잠잠했던 그분의 삶 자체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의인이신 그분이 '공변된 판단'(33절)을 받지 못한 비극 속에서 우리는 나와 이 세계의 죄악된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을 통해 참된 소망을 깨닫고, 재림을 통해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은 '하나님을 믿음'인 줄 믿습니다.

37절을 우리 개역 성경은 없음이라 하고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가 있음 이라고 합니다.

흠정역 성경등 많은 성경이 (NKJV,NIV,ASV,NASB,NSSV,YLT)  본문으로 넣고 있습니다.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는 내가 예수에 관하여 너에게 가르친 이 교리를 네가 믿는다면 또 하나님께서 이 예수에 관하여 기록하신 말씀을 네가 받아들인다면 너에게 인을 치는 세례를 베푸는 것이 가하리라"는 뜻입니다.

"만일 네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로써 네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것이요 또 네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세례로써 교회와 연합하는 것이 가하니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35절).

이처럼 전도자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에게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복음 전도자가 전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가 전해 줄 수 있는 것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며 또 핵심입니다. 복음전도 대상자에게 당장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전해 주면 일단은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것은 무용한 것이 되며 그는 똑같은 곤핍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전해 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당장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그는 근본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는 갈함을 느끼지 않게 되는 줄 믿습니다(요 3:10, 14).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난외주).

이는 복음을 믿고 공식적으로 만인 앞에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하여 내시가 고백한 신앙고백은 짤막하였지만 그것은 포괄적이고 목적에 맞는 만족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결단력 있는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에티오피아인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신앙인이 되었고, 에디오피아에 복음의 문도 연 줄 믿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말씀대로 말씀을 가르쳐 지키며 세례 받도록 협력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음에

(행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물 있는 곳'은 그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는 장소보다는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요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세례의 바른 재료는 물로 씻는 것입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물로 씻음은 도덕적 정화를 위한 상징입니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합니다.

이 씻음의 은혜는 죄의 결과인 죄책과 오염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신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며 참된 신자라면 이미 정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이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36)라고 한 내시는 복음을 듣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겨 세례를 받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권세 있는 지위와 여행 중이라는 위치를 고려하여 한 번쯤 망설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모든 형식적인 것들을 과감히 무시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행 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자는 기뻐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더 이상 어둠과 멸망의 권세에 놓여 있지 않고 빛과 생명의 은혜 아래 살기 때문입니다.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태어난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갔습니다.(39절) 이 기쁨은 순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본질의 것이었습니다. 내시가 기뻐하며 걷는 모습은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내시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이 기쁨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명 감당한줄 믿습니다.

학습 세례(입교) 받고 십자가를 감당하며 주어진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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