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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믿는체 말라 / 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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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김의환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6:1-8
제  목 : 잘 믿는체 말라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신앙집단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주역을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처했습니다. 십일조를 틀림없이 드렸고 금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리새파’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고 주장하며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라는 원색적인 말로 가장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기에 주님은 그렇게 혹독하게 비판하셨을까요?

오늘날 특별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이 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누룩을 삼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은 번져가는 특성이 있는데 이 바리새적인 신앙은 잘못하면 이웃에게 전염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르게 변질되는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영적 실패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들의 실패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율법주의적 구원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다른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내가 전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다른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 노력으로, 스스로 자구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바치고 금식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등 이런 자기들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관된 진리는 옛날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삼았더라고 했고,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 누구도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본질적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종교는 구제나 적선, 명상이나 좌선 등의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시체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번지를 구유로 택하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놓고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왕궁도 아니고 부끄럽게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그것이 기독교 구원관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진동 속에서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고,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가 차서, 즉 하나님의 타이밍이 되어서,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미리 약속하신대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에서 장차 태어날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하신 이 원시복음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날 것을 이사야 선지가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예언하시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났을 때 천군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 스스로의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성경이 일관적으로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저 감사하고 겸손하게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서 주님을 섬기는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섬기고 시간과 헌금을 더 많이 바치고 기도를 더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랑으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자기과시적 수단으로 오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원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특별히 시편을 연구하며 깨달은 진리는 내가 노력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그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도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로로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후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리를 가지고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근본적 실수는 자기 스스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착각한 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도 더 엄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자연히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잘 지키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더 세부적인 해석을 가해가지고, 십계명으로도 무거운데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종교관 때문에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가는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의 초청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가만히 보면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갖고 잘 믿는 체 하면서 자기의 율법적인 주장을 강요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기성교단을 비판하고 나온 일부 작은 교단이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는 ‘기성교회는 이미 신사참배를 했으니까 하나님이 떠났다’라고 주장하면서 기성교회를 ‘마귀당’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속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돌다가 어느 교회에 불이 켜져 있길래 그 앞에서 찬송을 했더니 자기 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문을 탁 닫으면서 “재건하시오! 우리는 당신들의 찬양방문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라며 문전박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성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동참죄’라고 하면서 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교 기숙사에 함께 있던 선배 신학생의 부인이 그 교단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에게 자기와 함께 그 교단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남편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선배는 기숙사에서 예과 2년, 본과 3년, 5년 동안 홀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 8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한 집에 살지만 같이 동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독한 율법주의지요.

  또 제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장이 주일에 택시를 타고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님을 배웅하러 부두에 갔습니다. 그 때는 비행기 편이 많지 않아서 배편을 이용했는데 배가 연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 예배를 선교사님과 교장 선생님 두 분이 선실에서 드렸더니 신학교 이사회에서 어떻게 신학교 교장이 주일날 택시를 타고 또 주일 예배를 빠지고 선교사와 함께 배에서 예배를 드리느냐고 그 교장 선생님을 파면을 시켰습니다. 바로 그 분이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세계적인 성경학자 박윤선 박사입니다.

그럴 수가 없지요. 그 다음에 제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아주 지도급에 있던 목사님인데 설교를 하시다가 성가대 대원 중에 파마를 한 교인을 발견하시더니 대노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런 머리를 어떻게 전기로 지져서 이상하게 꾸몄느냐?” 하시면서 성가대원 모두를 연대책임을 지워서 다시 성가대를 못서게 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 성가대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야 예수를 잘 믿는 것인가?’ 제가 마음속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제가 미국에서 8년 만에 돌아와 그 목사님 댁에 갔더니 사모님이 파마를 하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일부러 항의를 했습니다. “사모님도 물러나셔야 되겠네요. 성가대원은 파마하면 안 되고 사모님은 됩니까?” 목사님께서 그제서야 “내가 상대적인 상황에 너무 절대적인 해석을 했다. 내가 실수를 했다” 하시면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시더라구요.

  우리 한국 교회에는 율법주의적인 면이 참 많아요.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미 받은 사람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계율과 율법도 우리를 맬 수가 없고 우리가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의 구원의 완성을 믿을 때,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에게 적심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을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따르는 것이 좋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히브리서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을 하나님이 보내셨는데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하고 또 제사하고 그랬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바쳐진 제물이기 때문에 그 분을 믿으면 구약시대처럼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방언에 대해서는 성경에 분명히 은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방언을 받아야 더 잘 믿겠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나 박윤선 목사나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은 방언을 안 해도 하나님을 잘 믿겠으니까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누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말하기를 예수를 주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는 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알게 하시는 이는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계시로 말미암아 믿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는데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깨달으시고 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실에 감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구원을 위하여 율법의 올무를 씌울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 사실에 항상 감격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가 이 감격 때문에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서 전 세계와 로마 교황을 향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외친 것입니다. 그 당시는 교황이 전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진리를 갖고 전 유럽과 싸웠습니다. 그는 이 진리로 승리했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는 루터가 깨달은 이신칭의의 진리 때문에 이렇게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본질적으로 내가 너보다 더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람이다’ 라고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바리새인의 실패는 외식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말미암아 받았으면 외식할 필요가 없지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에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의를 행했던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꼭 회당에 가서 기도하려고 하고 회당까지 가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서 가다가 길에서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기도는 죄인이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제사인데 그것이 왜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쇼로 나타나야 합니까.

  그러나 오늘날 잘못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은근히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내세우는, 그래서 자기 앞에 나팔을 부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 한 번도 안 빠졌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제 선배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새벽마다 엎드려서 기도를 하면서 제일 늦게까지 기도를 하는 전통을 지켜왔는데 앞자리에 와서 기도하는 권사님 한 분이 늦게까지 안 가시고 기도하시는 바람에 그 전통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가끔가다가 그 권사님이 가셨나하고 기도하다가 얼굴을 들고 살펴본답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니지요.

오늘 말씀에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 오히려 기름을 발라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골방에 가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요 아무리 골방에서 기도를 해도 밖에다가 ‘금식기도중’이라고 써놓고 기도하면 더한 거지요. 그리고 금식하는 분들이 일부러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서 ‘몇 일을 금식했더니 머리에 기름을 발라도 기름이 잘 받질 않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더 흉한 사람이지요.

더러 부흥사들 가운데 “아, 내가 금식을 자주 하는데 40일 금식을 세 번째 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하면서 자신의 영적체험을 과시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금식을 했겠습니까? 그런 주제에 뭘 금식을 자랑합니까? 예수님이 40일을 하셨으면 겸손하게 20일 정도 할 것이지 그것도 세 번씩이나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자랑을 합니까? 금식은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겸손하게 ‘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린다’ 할 때 진정한 금식이 가능한 것이지 금식 자체가 어떤 메리트가 되는 식으로 금식을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영적 축복과 자유를 바로 이해하고 감사가 충만할 때 나오는 금식이 바른 금식이며, 그렇게 금식한 사람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하나님 앞에 물질을 바치고도 벌을 받았습니까? 외식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신앙을 과시하려고 하다가 그랬지요.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신전의식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누리고 있는데 그들은 외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미국 문화는 수직적인 면을 강조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죄책문화입니다. 반면 우리 한국의 문화는 유교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봉급명세서에 보면 이 세상에서 한국에만 있는 명목으로 ‘체면유지비’가 있어요. 어떻게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선비들이 밥을 굶어도 사람들에게 굶은 것을 안 나타내려고 이쑤시개를 쓰면서 ‘갈비를 먹었더니 끼었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체면이고 자기과시지요. 그것이 우리나라의 교회에도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도 누가 얼마 했다고 과시해야 하니까 체면 때문에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외식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은 극과 극이기 때문에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식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세 번째 실패는 비교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시면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세리요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은혜를 받아 놓고도 주의 은혜에 편승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구원받은 성도의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옆에서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하나님,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 세리와 달리 십의 일조도 드렸고, 금식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것도 모자라 두 번 하였습니다.” 즉 자기 자랑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서 시간도 바치고 물질도 바치고 가능하면 십의 일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 이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산 제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랑거리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나 헌금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하는 자랑은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잘 믿는 체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더러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하고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내용이 전혀 자기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벌써 초월했고 ‘저 말씀은 어느 집사에게 딱 맞는데 그 집사가 오늘 왔어야 되는데’ 라고 남의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겸허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남을 비판하지 말라. 오히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 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 정도를 가지고 난리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남을 비판하기보다 내 자신을 항상 살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사는 신앙생활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미가서 6장 8절에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은총에 감사해서 남을 비판하지 말고 주님을 섬길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고 갚으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장차 주님을 만날 하늘나라에서 상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믿는 성도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상급과 칭찬을 받으려고 바리새인처럼 잘 믿는 체하지 아니하고 외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신령한 교훈을 통해서 이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중에 우리의 남은 생이 겸허하게 주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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