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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복음 / 롬 16:25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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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의 복음
본문 : 로마서 16:25 - 27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사슴을 얻고자 하면 토끼를 돌보지 않는다'는 축록자불고토(逐鹿者不顧兎)란 말은 사도 바울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부터 그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신앙의 열조들이 걸어갔던 길을 갔습니다. 그가 자신의 자존심처럼 키웠던 학벌과 가문과 사회적 지위를 한갓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빌 3:8-9).

영감 넘치는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Prologue)을 하나님의 의의계시로 출발하여 끝(Epilogue)을 문안과 축복으로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1장에서 언급한 복음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은 그가 주님의 직접 계시에 의해서 받은 메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에 의해서 직접 받은 나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Ⅰ.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나타내신 바 된 복음입니다.

본문 16장 25-26절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나의 복음}이란 말은 로마서 2장 16절이나 디모데후서 2장 8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바울의 설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해서 바울 자신의 것이라는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 복음이 바울에게 직접적으로 계시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좋은 소식(사 40:9; 52:7; 롬 10:15), 기쁜 소식(눅 2:10)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Gospel은 God-story의 복합명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나라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장차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을 통괄하여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설교의 촛점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도덕적으로 의인의 길을 찾으나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의인에 이를 수 없고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인의 길을 찾으나 율법은 오히려 인간의 무능만을 폭로합니다. 믿음이란 순수하게 행함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행함이란 의인의 선행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은 같이 일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2, 26). 여기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는 말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갈 4:4) 침묵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났고 성령에 의해서 보증이 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취어졌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역사의 무대에 드러났으니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알도록 나타난 것입니다.

수천년 혹은 수백년 전 구약시대부터 점진적으로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계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도성인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직접 나타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아들을 통한 구원이 확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Ⅱ.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케 할 복음입 니다.

본문 16장 26절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케 하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의 글』은 '구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떠나서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구약의 예언에 기초하지 않는 복음은 거짓복음 곧 다른 복음입니다.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은 믿음에서 자생적으로 발산되는 복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라고 하므로 유독이 자신만이 전하는 그 복음을 강조했습니다.
바울 자신의 생각에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견고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환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그들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절대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요구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 세상 종말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절대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명령을 받는 자가 아니고 명령하는 자입니다. 복음은 낮은 자가 아니고 높은 자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가 아니고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케 할 가치 있는 것입니다.

Ⅲ. 빚진 자로서의 반드시 갚아야 할 복 음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는 틀림없는 자유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에는 항상 빚진 자라는 의식 속에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빚('맛솨아', )을 남에게 빌린 돈이나 물건을 갚아야하는 말로 사용해 오다가 신약에서의 빚('오페일레테스', )은 죄와 의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주기도에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에도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물리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신약에서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인 죄를 의미했습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채무자로서의 무거움에 항상 눌려 있었습니다. 그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다음 성경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1)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9절에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일루리곤』(Illyricum)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에 해당합니다. 예루살렘은 동양이고 일루리곤은 서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넓은 지역에 걸쳐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편만하다』는 말은 부족한 것을 채워가면서 빈틈없이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의 대상을 전세계와 모든 종족으로 삼고 있었다는데 오늘 우리는 상당한 의미를 가져야만 합니다.

2) 개척지를 찾아가서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20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울의 선교 철학이었습니다. 여기에 『힘썼노니』(필로티무메논, )라는 말은 필로스( ) '사랑함'이라는 말과 티메( ) '명예'의 합성어로써 '영예로운 일로 간주한다', '열성적으로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곳에 전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선교 정책은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고자 차별화 하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① 다른 전도자들의 활동을 존중한다는 의도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② 그리고 복음전파에 대한 경제성을 위한 것입니다. ③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은 사역자들마다 다를 수 있으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한 바른 복음 자체를 귀하게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3) 다양한 사람들을 향해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에 참예하고자 한다』는 말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 위하여 나누어주고 싶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될 것은 전도자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퇴폐한 곳에서 퇴폐한 행동을 해가면서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날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는 설교 내용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다윗을 왕으로 세웠고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사실을 증거했습니다(행 13장).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 에비구레오와 스토익 철학자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의 이야기는 하지 아니했고 종교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행 17장). 그렇다고 복음의 진수를 전하지 아니했다는 말이 아니라 결국 예수 십자가 복음의 진수를 증거했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접근방법과 전개방법을 그 대상과 상황에 맞게 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받은 것이라는 일차적인 것 외에 자신이 그 복음과 함께 일체를 이룬다는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복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속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삶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딤후 4:1-2).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은 곧 우리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나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신구약 성경 66권이라고 말하면 단순히 자신이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할 때는 ① 그 복음의 속성과 함께 일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복음과 함께 그 복음을 위하여 내가 복음에 소유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존재 의의입니다. 전파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마치 빛과 소리가 모든 어두운 곳과 모든 공간에 편만하듯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들려지게 해야 합니다.

② 나의 복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각자가 주께로부터 받은 각각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신앙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기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엄청난 것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할 때 내가 오히려 그 복음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요 15:4-8).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안에 있어 나의 기쁨이 충만케 됩니다(요 15:11). 어쩔 수없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몸된 교회는 바로 우리의 교회인 동시에 내 교회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선교 지역인 동시에 내가 전해야 할 내 선교지역입니다.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내가 보낸 선교사들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갚아야 합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복음과 차별화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책임의식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속성에 대한 사명수행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복음에 대한 정확한 우리의 변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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