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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상의 두 강도 / 눅 23:3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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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식목사 
십자가 상의 두 강도 누가복음 23장 32절 ~43절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 기쁜 날입니다. 부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부활의 기쁨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를 따라 해주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부활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재림 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지 않게 심어 주는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되지 않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무덤이 우리나라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그 주검을 되도록 집에서 멀리 매장을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가족들은 깊은 산 속으로 슬피 울며 뒤 따라 갑니다. 이런 문화가 죽음은 버려지는 것이라거나 죽음은 깊은 산 속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을 보시면 다릅니다. 일본은 동네 마당 한 가운데 화장한 조상들의 유골과 위패가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농사짓는 밭 한 가운데 무덤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출석하는 교회 마당이 공동묘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삶과 구별짓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공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있는데 그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주검을 안치하는데 돌무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흙으로 돋우는 것이 아니라 돌로 무덤 입구를 봉해 버립니다. 절대로 나갈 수도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무덤입니다.

그러나 각 민족의 장례 문화가 어떻든 간에 죽음은 인간에게 무서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간에 구분 지어야 할 것은 죽는 것을 극복하는 것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구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죽는 것을 극복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에 많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인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을 예로 들라면 소크라테스를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싸우거나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라크 전쟁 때 자살 특공 조들이나 9.11 테러를 행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것을 극복하는 사람은 주변에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분 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소크라테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는 것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사약을 마시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비록 소크라테스는 의연하게 죽었지만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는 것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의지가 강하고 자기의 목표가 분명 한 사람은 죽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영입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가는 자신을 사람들 앞에 의연하게 보여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나 독립운동가들처럼 그렇게 의연하게 죽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리면 눈물 흘리는 사람입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눈을 감는다 할 지라도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 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평생 강도 짓을 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32-33절

아마도 이 둘은 강도이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대로 살아 왔을 것입니다. 또한 사회학자들은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로마를 전복하려는 불순 분자에게 내리는 형벌이기 때문에 이 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독립 운동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죽는 것에 대해서 이미 초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4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단순한 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4절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 해 달라고 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혼자가 아니고 양쪽에 강도 둘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이 거물급이면 혼자 십자가에 세워 두고 많은 사람들의 초점을 예수님에게만 두도록 했을 텐데 로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주님은 행악자의 친구가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도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실 때에도 강도들 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최악의 강도들과 함께 공존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주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주님은 우리와 끝까지 동행하십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같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효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가 부부 사랑이 깊다 할지라도 죽음의 현장에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통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애통해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같이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예수님과 동행하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도 같이 비방했습니다.-- 39절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정 반대의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40-41절

그렇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눈물 흘리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었던 두 개의 십자가는 인류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죄인도 없고 덜 죄인도 없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입니까? 비방하는 십자가가 여러분의 십자가 입니까? 회개하는 십자가가 여러분의 십자가입니까?

둘 다 똑 같은 십자가였지만 한 사람은 영원히 죽는 무서운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회개함으로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낙원에 가는 십자가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40-41절에 보면 3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는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책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양심적인 사람과 책임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을 갖기를 바랍니다. 양심과 책임이 구원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 때 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2절에 한 강도가 기도하는 기도를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양심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이 이 사람처럼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양심적인 삶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나의 더러운 삶에 대하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면 우리의 간구를 다 들어 주십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간구 하고 있는 간구를 보십시요.--42절

참 뻔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뻔뻔하게 예수님께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간구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면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립니다. 이 사람이 양심적인 사람이 이었다면 도저히 주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주님께 자기를 부탁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죄를 다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장례하고 돌아와 위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위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집 부인이 저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남편이 지금 예배 드리는 이 자리에서 죽었는데 저는 전혀 두렵지가 않아요. 이 부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있다면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염하는 자리에 참여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돌아가신 분을 전혀 기억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에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가 나를 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교회 나가자고 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갈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내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도저히 얼굴 들고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좀 깨끗하게 해서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구원의 요청이요 구원에 대한 갈망을 주님께 간구 하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그는 자존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에 주님을 확신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라는 마음 만 있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알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만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인생이 너무 너무 고독해서 자살하고 싶습니다. 저는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리지르고 분노하면서 살아 왔지만 평강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혼돈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를 살려 주십시오 간구 하십시오.

우리는 선행이나 사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누구 신줄 알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요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들이 모두 기억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겸손하게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호소하십시오. 나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십시오. 강도는 주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43절

이 사람은 마지막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한번도 교회 문턱을 넘어 본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를 다녀도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예배 시간에 강도처럼 나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때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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