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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분노 / 엡 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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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베소서 4장 26-27
*제목: 그리스도인의 분노
*설교자: 피영민 담임목사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
하게 하라

(서론)
  우리가 역사상 그리스도인은 분노해서는 안 된다 하는 교훈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그리스도인은 화내지 않는 사람이고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인은 분노
의 감정조차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실 좋은 그리스도인들도 화
를 냅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분노를 합니다. 지난 주 구역 예배 중에 성
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며,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분노를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분노를 품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
고자 합니다. 그리고 분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모님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강대상에서는 참 마음이 넓으
시고 인자하신데 집에만 오면 분노를 많이 내신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살림을 차려야
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혹시 지금 분노하는 분이 계
십니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시부모에게 며느리에게 친구에게 목사에게 장로님들에게 
분노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서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선포
되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분노를 해결하시고 새 힘을 얻는 귀한 시간
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럼, 먼저 분노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27절
에 분노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분은 사도 바울
입니다. 이분은 역사상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기질은 대단히 다혈질 적이었습니다. 매우 분노하는 기질이었습
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유대교를 신봉할 때도 바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
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끌어내어서 진멸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
자였던 스데반 집사가 돌로 맞아 죽을 때에도 바울은 돌로 맞아 죽는 사람을 불쌍하
다 하고 본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생각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위대한 선교사의 일을 하면서도 동료 선교사 바나
바 와 대판 붙어서 일을 같이 못하고 갈라섰던 인물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또한 베
드로가 유대인의 환심을 살려고 외식적인 행동을 했을 때에도 베드로를 꾸짖고 분노했
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마 분노의 체험을 많이 했던 사람
이고 분노의 기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에게 분노의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4장 26절~27절의 말씀의 교훈을 간
단히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Ⅰ.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분노는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성경은 분과 죄를 구
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규정한 분노의 시간적 한계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화낼 사람은 낮에 화내기 바랍니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만 내
시고 해가 넘어가면 “하하~하” 웃으시기 바랍니다. 왜 시간 경계가 해 질 때 까지 
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분노는 즉시 해결해야 해야지 오래 쌓아 두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분노를 오래 쌓아두면 마귀가 이용을 하게 됩니다. 분노
를 이용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고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역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즉시 처리해야 하며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도
록 각별한 조심을 해야만 합니다. 
  분노자체는 자연스런 감정 가운데 하나이지 죄는 결코 아닙니다. 죽은 사람에게 한
번 약을 올려 보십시오. 화를 낼까요? 시신을 간지러워 보세요. 웃습니까? 소용없습니
다. 왜냐하면 죽은 시체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희노애
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 또한 자연스런 감정이고 기쁨도 사랑
도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미국의 Southern Baptist Seminary의 앤드류 리스터(Andrew 
Lester) 교수가 분노(anger)에 대해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지금 나누는 말씀은 ‘분
노’라는 책을 한 권 다 읽고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분노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을 하시고 마음 속에 분노가 있는 분 들은 잘 통제를 하시고 성령으
로 체험 바 되시기를 예수님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레스터 교수는 분노는 왜 일어나는 것이냐? 
분노는 밖에서 위협이 올 때 일어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밖에서 위협이 오면 사람
이 편안하다가 갑자기 불안해 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불안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
면, 안으로는 두려움이 되고 밖으로는 분노로 나타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의 정
의는 위협이 올 때 사람들이 밖으로 표출하는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입니다. 이 분노
는 언제 일어납니까?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하는 행동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
이 나의 귀중한 것을 위협할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내게 있는 귀중한 것은 무엇입니
까? 첫째 생명이나 건강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면 좋다고 웃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운전하면 보통 화가 잘 안 나는데 한국에서 한 열흘 운전하면  아
무리 성인군자라도 입이 거칠어집니다. 갑자기 끼어 들고, 뒤에 쫓아오고, 빨간불에
도 지나가고 도저히 인내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
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약국에 갔습니다. 약사가 약을 지어주는
데 “설사약 주세요” 했더니 설사가 나는 약을 줬습니다. 실제로는 설사 고치는 약
을 달라고 했는데 설사가 더 나는 약을 줬어요. 그래서 설사가 더 심해집니다. 그래
서 가서 이 사람이 약사에게 따졌습니다. “왜 설사약 달라고 했더니 설사가 더 심해
지는 약을 지어 줬느냐?”라고  따지니까 이 약국의 약사가 “아니! 당신이 나에게 설
사약을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그 약을 지어줬을 뿐이요!” 이 
말을 들은 손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설사약이 고치는 약인지 더 나게 하는 약인지 
얘길 안 했어요. 따라서 약사의 변명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가 더
나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또 의사가 병을 치료해야 하는데 병을 더 도지게 하면 얼마
나 분노합니까? 우리의 생명이나 건강에 위협을 받게 되면 이처럼 분노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이러한 관계가 위협받
게 되면 분노하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밖에 
나가 나쁜 행동을 하면서 지점을 차리고 죄를 짓고 바람 피우고 했다 한다면 아내가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아내가 “아이고 우리남편은 능력도 좋아, 아주 훌
륭한 사람이야!”하고 좋아할 아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가 직장생활 끝
나고 집에 오면 아내와 밥도 먹고, 대화도 하고 해야지, 집에 와서도 공부만 하면서 
연구만 하고 아내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남편은 결국 아내
가 분노하게  되고 “저 사람과는 더 이상 못살겠다”하고 이혼소송도 하게 되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와 같이 사랑의 인간관계에 위협을 받을 때 분노
하게 됩니다. 
셋째,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나쁘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가 끝나고 나면 사모님이 시비를 건다고 합니다. “여보 이런 말
은 빼지 그랬어요! 여보 그때는 좀 힘을 줘서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러한 잔소리
도 한 두 번이지 자꾸 듣게되니까 목사님이 나중에 성질이 나서 사모에게 “니가 
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저의 경우는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행한 행동에 대해 분노가 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양심의 거스르는 짓
을 했을 때 죄책감이 옵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분노하게 됩니
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안될까!” 또 자기 자신에 대해 이상향
을 세워놓고 “나는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어떻게 현실이 이상과 같
아질 수 있습니까?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는 왜 스스
로 생각하는 이상향과 다른  인물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수치심이 생겨서 스스
로 분노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뿐 아니라 자신의 확대된 자아, 자신의 교회, 자신의 속한 
사회 국가가 위협을 받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아내가 어디서 위협
을 받았다 하게 되면 그 남편은 분노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 유학할 때 제 아내가 학
교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의 덩치 큰 학생이 내 아내에게 따지
고 막 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히 기사도를 발
휘해서 그 사람한테 가서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한 마디를 했습니다. 이와 같
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이 위협 받으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
리 믿음의 성도는 자신이 속한 교회를 다른 사람들이 욕하면 분노합니다. 우리 강남중
앙침례교회를 누가 나쁘다고 욕하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니네 교회는 낫
냐?”라고 따집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가 위협을 받아도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
다. 우리나라가 축구만 져도 그날은 화가 납니다. 그래서 어떤 남미국가에서는 축구 
지고 오면 축구선수는 국가에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는 
월드컵에서 자살 골 먹었는데 결국에는 그 나라에서 총에 맞아서 죽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밖에서 위협을 받을 때 분노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에베소서 말
고도 성경에는 분노에 대한 다른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최초로 살인한 사람이 누굽니
까? 가인입니다. 가인에게는 동생 아벨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창세기 4장에 보
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아벨은 “하나님 제가 죄인이니까 제가 죽어야 하는 대
신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립니다. 고로 이 피를 보시고 내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기
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내가 농사해서 농산물을 드리니 주여 잡수시
요”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제사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즉,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셨습니
다. 동생인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형인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안받으시니까 가
인이 분노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분노를 동생 아벨에게 퍼붓습니다. 그때에 하
나님이 가인의 안색이 변하니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뇨 네가 안색이 변함이 어
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는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 찌니라”.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이 분노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분노를 그냥 두면 죄가 마치 고양
이나 사자처럼 마음 문 밖에 구부리고 있다가  마음속으로 탁~ 튀어 들어갈 것 같으니
까 “너는 죄가 문밖에 구부리고 있으니 죄가 들어오지 않도록 잘 다스려라. 너는 분
노함으로 죄에 넘어갈 가능성이 많으니까 죄를 잘 통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
나 가인은 죄를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아벨을 죽이고 첫 번
째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분노에 대한 교훈이 특별히 많이 나옵니다. 잠언 14장 17절을 보시면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도다”. 그리고 잠언 14장29절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도다”. 또한 잠언 16장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하였으며, 잠언 19장11절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
기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하
기는 하되 더디 하고 노를 속히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분노를 잘 다스리고 잘 해결
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
니다. 구약성경에도 455번, 심지어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3-16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가보시니 거기 장사꾼들이 있었습니
다. 그들이 성전 안에서 양도 팔고 비둘기도 팔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비둘기를 다 쫓아내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
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대단히 큰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3장 1-5절에서
는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보시고 안식일이지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십니
다. 손이 펴지고 글씨도 쓰고 하니까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슬
슬 시비를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게 옳습니
까? 거룩한 안식일을 왜 어기십니까?”라고 따졌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너희 마
음에 완악함으로 인해 내가 분노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바
리세인의 완악함으로 인해 분노를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셨고, 예수님도 분노하
셨으므로 우리 인간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상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분
노가 죄이므로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마태복음 5장 
2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
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 ‘노하는 자’라는 헬라어 자체
가 현제 시제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현제 시제는 ‘반복적으로 노한다’는 뜻입니
다. 한번 노하는 것은 좋지만 또 노하고, 계속해서 노하고, 과거에도 노하고 현제에
도 분노하고 앞으로도 분노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잘못입니다. 왜
냐하면 오래도록 그리고 반복적으로 품은 분노가 죄가 되고 나중에는 마귀에게 이용당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5:22은 오늘 에베소서의 교훈과 완전히 일
치하게 됩니다. 
분노는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유익도 있습니다. 분노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위
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개가 와서 짖을 때 우리는 화를 내서 쫓아냅니다. 그때에 
사나운 개가 물러가면 생명이 안전하게 보존이 됩니다. 또 자신의 죄에 대해 분노하
면 회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또 분노하므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
이들이 잘못하면 어른들은 분노해야 합니다. 따끔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교
를 다닐 때에 고려대학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는 김형배 교수님이 계셨는데 대학 4학년 
때에 노동법 시험을 치는 시간에 시험 문제를 놓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학생
들이 문제를 몰래 떠들어 보다 교수님께 걸렸습니다. 제가 그분 제자이고 조교였습니
다. 몇 년을 모시고 있었어도 화내시는 것을 한번도 못 봤는데 그걸 보시더니 벼락을 
치시며 “너희들이 4년을 공부하고도 나를 이렇게 실망을 시키느냐? 이 나쁜 놈들
아!” 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이직도 그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화내시
는 것이 참 불의 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학생들을 진실로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때로는 유익도 있습니다. 
 
Ⅱ. 분노를 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성도 여러분 화나십니까? 그것은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화는 오래 품
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밤을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오랜 시간 동안 쌓
아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분노가 나면 화가 안 나는 것처럼 분노를 부
인(denial)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억제(suppression)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가 어떻게 됩니까? 무의식 층으로 내려가고 분노의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분노
의 창고가 차게 되면 기도해도 은혜받기 힘듭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받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분노의 창고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 많
고 용서보다 복수심이 많고 결국 이 분노의 창고가 가득 차서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
면 그것은 죄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분노의 창고가 차게 되면 사람들은 위장된 분노
의 표현을 합니다. 빈정거리면서, 사람의 성의를 거부합니다. 밥을 먹으라고 해도 
“밥 먹기 싫어!”, 배가 고픈데도 “배 불러!”라고 합니다. 또 바가지를 긁습니다. 
며칠씩 말을 안 합니다. 집을 나갑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전부 다 위장된 분노의 
표현입니다.
  어떤 때는 잘못된 분노의 표출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책을 합니다. 화를 간직해
서 한국 사람들은 화병이 생기지 않습니까? 화병이 심해지면 심장병, 위장병, 피부
병, 관절염, 우울증 이런 것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 많은 것이 분노가 원인이 되서 
일어납니다. 때로는 분노가 쌓이면 죄 없는 대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합니다. 집에 가
서 강아지를 발로 차버리고 애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부인을 괴롭히고 음식솜씨가 없다
느니, 너는 생긴게 왜 그 모양이냐느니 자꾸만 구박을 합니다. 또 분노가 쌓이면 남
도 나에게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피해망상증에 걸립니다. 또 때로는 분노의 창고
가 가득 차면 폭발적인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늘 매 맞고 자란 사람은 자기의 자녀도 때린다고 합니다. 시어머니에게 핍
박받고 자란 며느리는 나중에 자기 며느리에게도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분노
의 창고가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강간을 연구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간은 성도착적
인 표현이 아닌 여자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
자를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은 조심하시고 밤에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런 폭발적인 분노는 죄라고 했습니다. 말고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
로는 칼을 뽑아 그의 귀를 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
며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폭발적인 분노를 망하는 칼로 예수님께서는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노의 창고가 
가득 차면 남이 작은 잘못해도 크게 분노합니다. 남편이 칫솔질을 하다 제자리에 놓
지 않으면 화가 난 아내는 “갈라져, 너 같은 인간과는 더 이상 못산다”고 분노합니
다. 왜냐하면 분노의 창고에 쌓인 것들이 에너지화가 되어서 폭발이 되기 때문입니
다. 바로 이러한 분노의 마음이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본거지가 됩니다. 

Ⅲ. 그러면 분노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첫째는 분노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화가 안 난 것처럼 하지 말고 “내가 분노가 
가득 차 있구나”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내가 왜 분노하고 있는가?”에 대
한 해석과 평가를 내리고 분석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어떤 위협 때문에 분노하고 있
는가? 차분하게 그 위협을 평가해야 합니다. 또 분노를 느끼는 그 위협이 어떤 것인
지 이름을 붙여 봐야 합니다. 상처 분노냐, 시기 분노냐, 실망 분노냐, 좌절 분노냐, 
자존심에 상처 난 분노냐, 애정결핍 분노냐 진단해보고 위협의 해결방안을 생각해봐
야 합니다. 
먼저 자기에게 위협을 준 사람을 직접 대면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해서 내
가 화가 났고 그래서 내 분노창고가 가득 찼다 어떻게 할거냐 하면서 내가 이러이러
한 사정으로 이렇게 되었다라고 대화하면 문제의 90%는 풀리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
이 지하철을 탔는데 나른 사람의 아이들이 너무 뛰어다니고 난리를 치니까 너무 화가 
나서 그 아이들의 아버지를 부르며 “여보시오? 애들 교육 좀 잘 시키시오!” 라고 말
하니,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내버려 두시오 오늘 저 아이의 엄마가 죽
어 장례 치르고 오는 길입니다” 말하니,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
면서 “네, 그러세요~”하고 이해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면 대부
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분노를 대처하는 방법은 대면할 수 없을 때 나누는(share)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누
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속에 이러한 분노가 있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
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우리의 짐을 들어 주십니다. 분노만큼 무거운 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아뢰시
고 친구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고 목사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얘기하고 나누
면 분노는 휠씬 가벼워지고 분노의 창고는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또 분노의 창고가 가
득 차서 강한 경우에는 분노창고를 청소해야 합니다. 어떤 부인의 16살 난 딸이 임신
해서 오니까 너무너무 화가 나서 상담가를 찾았는데 상담가가 가만히 보니까 그 여자
가 너무 화를 내더랍니다. “당신 왜 화내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니 자신이 16살에 
난 딸이 바로 그 딸이라는 겁니다. 결국 분노의 원인은 엄마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엄마의 분노 창고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분노할 때 정상적인 반응과는 다른 반응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은 “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보통사람
은 그냥 가서 분노하는 것인데 왼뺨도 돌려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굉장히 어
려운 수준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여 완전히 다른 형
태의 반응을 시도할 때에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자연스럽게 수그러지는 하나님의 은혜
와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잘 관리해서 죄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
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오래 동안 우리 분노의 창고에 쌓여있으면 결국 폭발합니
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로 말미암아 나의 인생에 더 나아가서는 저 천국의 영원한 삶
을 준비하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큰 장애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확실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분노의 창고를 청소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성령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에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상한 심령을 회복시켜 주시고, 마
음속에 성령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듯 충만하게 임하는 역사가 날마
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풍성하게 일어나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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