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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진실합니다 / 마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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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합니다 (마5:33-37) 


마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닭고기를 사기 위해서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정육점 주인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머니는 정육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만 닭고기가 조금 필요해서 그런데 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고 정육점 주인은 냉장고로 갔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다 팔고 딱 한 마리의 닭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은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 닭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3kg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것보다도 조금 더 큰 것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그 닭을 들고서 다시금 냉장고로 돌아갔습니다. 주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서 그 닭을 집어넣고 다른 닭을 끄집어내는 듯 하면서 똑같은 닭을 다시금 끄집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닭은 딱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똑같은 닭을 다시금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닭인데도 4kg이 나왔습니다. 주인이 자기의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무게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서 아주머니는 그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싸달라고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지불하고 가게문을 나서더니 갑자기 뒤돌아서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무래도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금 전에 달았던 것 마저 싸 주세요."
그러니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하루는 어떤 어린 아이가 중요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어린 아이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계속해서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주 침착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대답을 잘했습니다. 변호사는 어린 아이의 입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아이에게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얘야, 너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아버지가 너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미리 다 가르쳐 주셨지? 어때 그렇지?"
어린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린 아이를 또 다시 다그쳤습니다.
"얘야, 여기는 법정이란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네가 솔직하게 대답해야 된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너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된다고 가르쳐 주셨는지 어디 한 번 솔직하게 말해보아라."
그러자 어린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증언할 때 변호사 아저씨가 제 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가 그럴지라도 정신만 잘 차리고 언제나 진실된 말만 하면 매번 똑같은 말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자기의 거짓말이 들통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탄로날 때는 어쩔 수없이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21:27과 22:15의 말씀을 읽어보면, 거짓말을 하는 자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까? 그들은 진실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되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거짓될 뿐 아니고 다른 사람들조차도 거짓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거짓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늘 충만해서 우리의 생각, 말, 행동 등 우리의 삶 자체가 언제나 진실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거짓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이따금씩 맹세를 하셨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22:17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냥 말씀하지 않으시고 맹세를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더욱 북돋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맹세까지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약속은 본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맹세를 하실 뿐만 아니고 우리에게 맹세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신6:13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모든 경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맹세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맹세는 제한적입니다. 맹세는 언제 하는 것입니까? 꼭 필요한 때, 중요한 경우에만 맹세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출22:10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기르는 가축을 옆집 사람에게 잠시 맡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출타한 사이에 짐승들이 와서 가축들 몇 마리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또는 몇 마리의 가축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경우에 주인의 가축을 잠시 맡았던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을 훔치지 않았고, 또 자기가 가축에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뚜렷한 흔적이 증거로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는 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무조건 그 맹세를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주인은 이웃 사람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6:16에 보면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 맹세는 지극히 엄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맹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왕에게 맹세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14:22의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종 엘리에셀에게 맹세를 시킬 때도 역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간에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31장을 보면 야곱과 라반이 미스바에서 돌무더기를 세워놓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간에 언약을 맺었습니다. 또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언약을 맺을 때도 역시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 간에 맹세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엄숙합니다.
셋째,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신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만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 수밖에 없습니다. 레19:12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만일 맹세를 지키지 아니하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맹세는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않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 11장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입다는 소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시면 제가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그 뒤 그는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그가 이기고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까?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러니 입다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는 자기가 맹세한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헤롯 임금이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면서 헤롯의 마음을 즐겁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 딸에게 맹세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내가 다 주겠노라."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 헤로디아의 딸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일단 발하면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언제 맹세하는 것입니까? 맹세는 중요한 때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한적입니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맹세는 어떻게 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맹세는 지극히 엄숙한 것입니다.
셋째, 맹세하고 나면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백성들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토대로 살펴볼 때,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맹세의 첫째 원칙을 무시했습니다.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발해서는 안됩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헛 맹세를 하지 말고"라고 가르쳤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하는 맹세가 헛된 맹세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맹세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옳은 것은 그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단순히 아니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에 따라서 일상적인 말에까지 맹세를 덧붙여서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베드로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어떤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계집종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소리에 베드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문쪽으로 나갔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칠 속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번 계집종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베드로를 몰아세웠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왜냐하면 너의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고 있지 않느냐?"
베드로는 너무나 다급해진 나머지 이번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위해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맹세를 너무나도 쉽게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의 둘째 원칙도 어겼습니다. 맹세는 본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하늘로도 맹세를 하고, 땅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자기 머리로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대로 성전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또는 성전의 제단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좋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맹세의 엄숙성을 완전히 손상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맹세를 하면서도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쉽게 맹세를 하는 지경에 이르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맹세의 셋째 원칙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맹세를 하면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변치 말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는 것은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33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들의 강조점은 "주께"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그 외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일없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하늘로, 땅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천지는 언젠가는 폐하여질 날이 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가피한 경우에나 사정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천지가 폐하여질 수 있는 것처럼 천지를 두고 한 맹세도 폐하여질 수 있다고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그 좋은 실례가 마23:16-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큰 것으로 맹세하는데도 지키지 않아도 일없다고 가르치고, 더 작은 것으로 맹세하는데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강요하고, 자기들에게 별반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식적입니까? 이런 의를 가지고 어찌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율법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34절 중반부입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기에 대한 맹세도 거부하고, 법정에서의 선서나 심지어는 결혼식에서의 서약조차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도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맹세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5:17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따라서 예수님이 맹세 자체를 죄악시하면서 모든 맹세를 금하셨다고는 우리가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실제로 예수님도 맹세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 그러면 그렇다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여라!"
만일 예수님이 맹세 자체를 금하셨다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맹세하라고 말하는 가야바를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언급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여러 번 맹세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맹세 자체를 죄악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 식의 잘못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맹세의 모든 원칙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편법으로 자기들의 편한 대로 백성들에게 잘못된 맹세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를 오늘 본문에서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34절하-35절 말씀입니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여기서 발등상은 발을 올려놓는 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탄다든지 비행기를 타면 좌석에 발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발등상입니다. 35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여기에 기록된 "큰 임금"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특정한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큰 임금"은 만왕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6절 말씀입니다.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염색약이 발달해서 흰 머리카락은 얼마든지 검게 물들일 수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빨갛게 물들일 수 있고, 노랗게 물들일 수도 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흰 터럭은 노인을 상징하는 것이고, 검은 터럭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수명은 자기가 임의로 단축하고 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들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7절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일상적인 대화에 쓸데없이 맹세하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다닐 때 들고 다닐 가방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방을 사기 위해서 잠시 가방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주인에게 그 가방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목사님을 보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 실례지만 혹시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목사님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그러자 주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애교를 떨었습니다.
"제가 딱 보니까 알겠는데요, 뭐! 목소리도 부드러우시고 인품도 아주 훌륭해 보이시는 데요.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저의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 가게 주인은 목사님에게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목사님에게까지 이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27,000원에 파는 건데 7,000원은 관두시고 원가인 20,000원만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은 순진했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분 좋게 가방을 사들고 왔습니다.
며칠 뒤에 어떤 모임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목사님도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친구 목사님에게 자기가 며칠 전에 아주 싸게 그 가방을 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목사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진한 사람 다 보겠네! 자네는 장사꾼이 본전에 판다고 말하는 것이 공인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깜빡했구먼. 나는 똑같은 가방을 15,000원 주고 샀는데?"
그러면서 친구 목사님은 소위 말하는 3대 거짓말이 무엇인지 다시금 목사님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 장사꾼이 본전에 팔든지 밑지고 판다는 것일세. 둘째, 노처녀가 시집 안간다는 것일세. 셋째, 나이 드신 분이 얼른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일세."

요즘 그런 것은 거짓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거짓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으로 거짓의 어두움을 몰아내야 될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위선이 난무하는 이런 세상에서 진실되게 산다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손해를 감수해야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더 큰 것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늘 성령으로 충만해서 모든 거짓된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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