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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예수 / 요 10:22-27, 행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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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작은 예수
성경본문 요한복음 10:22-27, 사도행전 3:11

설교내용 

작은 예수라는 이 개념은 크리스티아노스 라는 크리스찬을 지칭하는 말로서 예수를 따르는 자, 작은 예수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믿는 사람이다 라는 그런 개념의 존재보다도 우리 존재의 실체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이 곧 내가 예수를 믿는 하나의 개채로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예수처럼 보이는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전절의 논쟁

  오늘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 설교와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 두 곳을 보았는데 여기에 솔로몬 행각이 나옵니다. 이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솔로몬 행각이 오늘 설교와 연관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3절에도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고 벽이 없는 그런 집입니다. 예수살렘 성전 바깥뜰에 동서로 행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행각을 솔로몬 행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매 때는 겨울이라”고 했습니다. 이 수전절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흥미있는 절기입니다. ‘수’자는 수리한다고 할 때 수(修)자입니다. ‘전’은 성전(聖殿), 즉 성전을 수리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그런 뜻입니다.

  주전 200년경에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를 마카비 형제가 일어나 가지고 BC 165년에 물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이 마카비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념해서 축제를 하고, 이것이 수전절이라 해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데 겨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추운 겨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대광야와 요단강 바람이 마주치는 잠깐동안 싸늘한 그런 절기라고 합니다. 이 수전절 때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 오셨는데 24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도전을 합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요. 당신이 메시야 맞소. 당신이 메시야 라면 정말 바른 말을 하시오. 아니면 아니라 하든지, 맞으면 맞다고 하든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이렇게 의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소.’ 이렇게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고 주님 앞에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을 하십니다. 25절-29절까지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뒤에도 계속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무슨 반응을 일으켰느냐 하면 31절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아멘이 아니고 돌을 들어서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전통을 아주 정면으로 대항하는 그런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생을 주러 왔다. 나와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내가 곧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본을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당신은 참담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간에 끊임없는 살벌한 전도집회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는데 유대인의 반응은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합니다. 얼마나 살벌한 전도집회장인지 우리가 연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감회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어립니다. 영적으로 유치합니다. 예수님을 도와줄 수 없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 홀로 유대인들과 상대를 하지, 여기에 무슨 베드로가 역할을 하고 요한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께서 이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할 때 ‘주님, 여기서 왜 그렇게 긴 설교를 합니까? 유대인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간단하게 합시다’ 제자들의 심정이 그런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제자들은 도무지 예수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도와줄 수도 없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 용감하게 복음을 전했던 그 솔로몬 행각에서 이제는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서서 외치던 그 솔로몬 행각에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예배를 마치고 나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옵니다. 그때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 서서 사람들 앞에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아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의 권능과 우리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그 예수가 이 사람을 살렸느니라. 그 예수를 믿으므로 그 예수가 이 사람을 살렸느니라.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우리는 바로 그 일에 증인이다” 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 베드로의 이 모습을 우리는 작은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유대인의 도전 앞에서 솔로몬 행각에서 외친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메시야의 메시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던 주님, “나는 목자라.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도 모르고 너희들은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다. 진정한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따르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렇게 주님은 목자론을 가지고 메시야를 증거하셨는데 바로 그 예수님을 베드로가 지금 솔로몬 행각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존재의 본래 모습을 한번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믿고 산다는게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느끼도록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작은 예수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작은 예수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믿는 것을 남들이 보아야 되고 느껴야 됩니다. 지금 이 베드로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은 주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아, 몇 달 전에 예수가 여기서 외치고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기억을 할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작은 예수상입니다. 베드로 안에 계신 예수가 솔로몬 행각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인도의 성현 마하트마 간디는 크리스찬이기도 하고 때로는 크리스찬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분이 남긴 말을 우리가 한마디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안보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믿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간디의 눈에 비친 영국의 크리스찬들, 인도에 와서 사랑과 박애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폭행을 하고 탄압을 하고 무자비한 폭도로 변한 영국의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간디가 이렇게 날카로운 지적을 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여져야 되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는 이것이 보여져야 됩니다. 과연 예수믿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 보여져야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일편단심의 자세, 충직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했고, 유대인의 살기가 등등한 그 솔로몬 행각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그 예수님을 그대로 재현하는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솔로몬 행각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의 충직함, 그의 곧은 믿음의 자세는 우리 주님 앞에 쓰임받는 위대한 설교자로 등장을 한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돗개는 그 탁월함과 영리함이 세계적으로 입증이 되었다고 하는데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렇게 영리하고 싸움 잘하고 민첩한 진돗개는 경찰견이나 군견은 안된다고 합니다. 안성맞춤이다 싶어서 시켜도 안된다고 합니다. 진돗개는 주인을 못 바꾼다고 합니다. 군대나 경찰에서는 한 사람이 한 평생, 그 군견과 경찰견과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에는 세퍼드나 다른 개는 삼일만에 친해질 수 있답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주인을 바꾸지 않는답니다. 그 충성심 때문에 진돗개는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훈련을 못시킨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제자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지조가 진돗개 이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인을 바꾸는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나 내게 주인으로, 주되심으로 나타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솔로몬 행각에서 위대한 설교를 계속 해 나갑니다. 그의 설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유쾌하게 된다는 이 말은 우리나라말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이 원문의 말을 보면 두 말이 합해져 있습니다. ‘아나’ 라는 말인데 위를 향한다는 뜻이고 ‘푸쉬코’는 숨을 쉰다는 말입니다. 아나푸쉬코, 즉 위를 향하여 숨을 쉰다, 하늘과 호흡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나면 몸은 땅에 살아도 우리의 호흡은 하늘과 호흡한다, 하늘의 공기를 마신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마신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성령의 언약을 베드로는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유쾌하게 된다는 이 말이 그냥 기분좋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과 교통하는 영의 호흡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호흡입니다.

  시편 104편 29-30절에 보면 매우 실감나는 성구가 있습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표준새번역을 보면 더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호흡을 주장하시는데 이 호흡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버리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위로 호흡하는 우리는 육신은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서 계속 하늘나라 공기를 마시면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작은 예수로 사는 크리스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이라는 개념과 작은 예수라는 개념은 좀 다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믿는 사람으로만 존재하면 안됩니다. 어떤 때는 작은 예수처럼 나타나야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메시야 성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위대한 은사입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할 때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보여지는 것이 메시야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예수님처럼 보여져야 됩니다. 작은 예수님처럼 일을 해야 됩니다. 내가 어떤 영혼을 붙잡고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할 때는 그가 그 순간이 바로 작은 예수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예수로서의 메시야적 인격성, 메시야적 온전함 그것이 우리 믿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의 삶으로

  이것을 비유해보면,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고 있을 동안에는 태아입니다. 태어나다가 죽어도 그 생명은 태아입니다. 출산하다가 죽으면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태아가 죽었다고 합니다. 태아의 죽음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법적으로 사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아입니다. 아직 사람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또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기 1초 전까지는 사람인데 죽어버리면 사람이 아닙니다. 시체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격체입니다.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건 살인이 됩니다. 인간의 인격성이라는 것은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입니다. 인간이 인격성을 지니는 기간입니다. 코로 숨쉬는 그 기간이 사람입니다. 코로 숨쉬다가 그 숨을 거두면 시체가 되는 것입니다. 태아는 태어나서 호흡이 터지기 때문에 아기가 으앙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숨쉽니다. 이제는 태아로서의 그 생명력, 태아로서의 호흡과 태어나서 숨쉬는 것은 다릅니다.

  또 하나 관찰을 합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한 평생 태아처럼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믿었으면 빨리 태어나야 됩니다. 예수믿고 바로 학습받고, 바로 세례받고, 바로 은혜받고, 바로 신자노릇을 해야 됩니다. 태아는 평생 보호받는 대상입니다. 태아는 사람노릇을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영원히 태아처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끌어주어야 되고 밀어주어야 되고 그저 위로해 주어야 되는 그런 신앙생활은 빨리 벗어나야 됩니다. 태어나서 빨리 자라서 사람노릇을 해야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시체같이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인인데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 뜻도 분별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도 가질 줄 모릅니다. 교회가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하나님의 교회에 무엇이 고민거린지 우리 교회에 정말 해야될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시체같은 교인이 많습니다. 시체는 관심이 없는 대상입니다. 동작동 저 동네는 고민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는 교통사고도 안 나는 동네입니다. 시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물체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고 “성령이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태아처럼 하는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기 바랍니다. 시체처럼 하는 불행한 신자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사람노릇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노릇을 해야 됩니다.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야 됩니다.

  또 한가지 더 관찰을 하면 태아는 태어나면 탯줄을 끊는 순간이 나옵니다. 탯줄을 끊어야 됩니다. 탯줄을 끊어야 완전히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탯줄 끊을 때 반드시 아기를 눕혀놓고 끊습니다. 언제나 애를 눕혀놓고 끊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그렇습니다. 염을 하든지, 관에 안치할 때 시체를 엎어서 안치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눕혀서 합니다. 나는 이것도 상징성이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탯줄을 끊을 때도 위를 보고, 죽어서 묻힐 때도 위를 봅니다. 하나님께로 났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메시지가 거기 있습니다.  인간의 호흡을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 우리 인간의 호흡의 스위치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스위치를 넣으면 이 땅에 나는 것이고 스위치를 꺼버리면 돌아가 버립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

  요한복음 10장 27절에 이런 말씀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작은 예수가 되는 비결을 주님이 말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양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주님을 따르는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되고, 목자의 아는 바가 되어야 하고,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음성을 듣는 행복한 양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를 줄 아는 순종의 양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만 내가 어떤 순간에 어떤 결정적인 일을 할 때 내가 작은 예수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소유화가 되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또 남겼습니다. 29절에서 “저희는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시면 “내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가 나를 소유하고 나면 이제는 나를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 때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 조금 어려운 말입니다만 내면화, 외면화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이 물이 내 안에 들어갑니다. 내면화가 됩니다. 내 안에 들어간 물은 물이 아닙니다. 내 몸의 일부입니다. 그 물은 내 몸의 기능과 직접 연관됩니다. 내가 마신 그 물을 빼내려고 하면 내가 고통스럽습니다. 내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물이지만 이것이 내 안에 들어가면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나하고 같은 내면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들어오셔서 나와 예수가 내면화되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내면화가 되면 물을 먹고 내 안에 이 물이 들어와서 내 안에서 내 몸에 영향이 되면 이제는 외면화가 됩니다. 이 물을 먹고 이제 기운을 차려서 내가 힘있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위에 지쳐서 일을 못하는 내가 물을 마시고는 힘을 얻고는 이제 외면화가 된다, 이 물이 내 안에서 들어가서 힘으로, 에너지로,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믿는 게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는 이 말씀, 내가 받아들이는 이 말씀이 내 안에 내면화를 이루면 이 말씀이 내 생각을 움직이고 내 손과 발을 움직이고 내 삶을 다스리는 외면화로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작은 예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내면화부터 안 되는 단계도 있고 외면화가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면화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알프스의 눈이 녹아 가지고 지하로 스며들어서 이것이 지하수가 되어서 생산하는데 까지 200백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땅위의 물이 땅 밑으로 스며드는 이 과정이 있어야 땅 밑에서 지하수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지하수도 결국은 땅위에서 들어간 물입니다. 수천년을 두고 이 땅에 물이 스며들어 그것이 지하수로 개발이 되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면화가 될 때 그것이 언젠가는 내 생활 속에 외면화로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작은 예수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은총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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