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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남은 불빛 / 왕상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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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지막 남은 불빛
본문 : 열왕기상 19:9~18


  우리가 배워온 세상의 모든 역사가 어느 민족이나 전성기가 있는가 하
면 쇠퇴기가 있는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 역사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페르시아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성경에 나오는 대로 애굽의 전성시대, 로마의 전성시대, 징기스칸은 한때 44개국을 점령하는 전성시대가 있었고, 20세기에서는 일본과 독일이 침략자의 전성기를 누린 역사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유대 나라의 전성시대는 다윗 왕 통치 40년과 솔로몬 왕 통치 40년, 이 80년이 그 민족의 장관 역사 가운데 가장 전성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은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다윗, 솔로몬 시절 같은 빛이 나는 나라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 열왕기상 성경에는 최고의 강대국을 이루었던 히브리민족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민족의 역사가 절정까지 올랐던 화려한 역사가 솔로몬의 마지막 시대에 와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는 또 쇠퇴기의 역사, 몰락의 길을 가게된 유대 나라의 형편을 이 열왕기라는 성경이 자세히, 아주 역사서와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특별히 솔로몬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잘했으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솔로몬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성전을 훌륭하게 건축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지금까지도 부르고 있는 그런 건축의 역사를 잘 역사화 했습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영원한 성전이 될 수 있는 궁전을 그렇게 훌륭하게 잘 건축을 해서 이 솔로몬의 건축의 역사와 아주 큰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그 다음에 솔로몬을 가르쳐 아주 지혜로운 왕이었다고 그래서 지혜로운 그의 정치 치적을 성경에서도 많이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영적인 노력도 많이 해서 그 솔로몬의 일천번제라고 하는 것은 1000번이나 계속적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그런 영적인 노력도 그가 아주 훌륭하게 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얼마나 부강했는지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부귀와 영광의 대명사로 지금까지도 쓰여지고 있는 그런 전설이 남아서 예수님도 솔로몬의 영광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솔로몬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잘못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방종교를 솔로몬 시절에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성전건축, 궁전건축에 필요한 인력과 목재 수입을 위해서 이방나라들과 어쩔 수 없이 교역을 열심히 하게 되었는데 그 틈을 타고 이방종교 즉, 발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한 큰 잘못이 이 솔로몬 시절에 생겨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런 강대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다보니까 사생활이 아주 혼란스러워져서 성경에 보면 수백 명의 여인들을 두고 방탕스러운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솔로몬의 안좋은 모습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서 그들이 섬기는 그 당시의 미신 종교인 몰록이나 아스다롯, 밀곰 신을 섬기며 여호와만 섬긴다는 유일 신앙이 솔로몬에게서 흩어져 버리는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 위용을 떨치던 솔로몬 왕국은 날로 문제가 생겨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국민 총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론 분열이 생겨서 솔로몬은 죽으면서 자기 아들 르호보암에게 왕권을 물려주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나라는 우리가 아는 대로 12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후계 정부를 따르는 지파는 두 지파 밖에 남지 않고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새로운 왕국 건설을 했는데 10지파가 그리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와 같이 남쪽나라는 '유다'라 칭하고 북쪽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칭해서 남북이 갈리는 고난의 역사를 솔로몬이 죽은 후에 행해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혼란기 역사가 다시 시작이 되어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되어서 유다는 B. C 586년 바벨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하 게 되고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B. C 722년에 앗시리아국에게 멸망을 당하는 슬픈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마 우리가 유대 민족의 특징을 말하라고 할 때 유대 민족들은 가장 큰 민족을 지키는 신이 선택받은 민족이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다 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이 "선민 사상"이라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철학은 그 민족에게 두 가지 면을 제공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져왔는데, 긍정적인 면은 바로 그러한 선민 사상 때문에 수천년 그 민족을 찾아온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그들은 절대로 멸망당하지 않고 힘있게 자기 민족의 위치를 지켜왔다는 그것이 선민사상 때문에 그렇게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면이 나타나는가 하면, 부정적인 면은 그 선택받았다고 하는 것이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므로 다른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부정적인 면이 찾아왔습니다.

  아마 이와 같은 이 히브리민족의 삶의 스타일은 현재를 살고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간혹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믿음이 우리 현실이 아무리 고난스러워져도 그 믿음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만으로 연결이 되면 불신자들에 대한 멸시적 반응을 나타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에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이 혼란기를 틈타고 들어오는 이방 종교, 특히 바알 종교의 세력이 순수 아브라함 후손의 정신사를 흐리게 만들었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역사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참지 않으시고 인간 역사에 관계하시는 심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배경은 그러한 혼합 종교 바알의 세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대의 가장 절망적 역사 한편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6번째 왕인 이 오므리라고 하는 왕은 외교정책에 밝은 정치가였습니다. 그래서 이웃나라인 베니게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무역을 증진시켜서 국가의 물질적 번영을 공헌한 왕이 됩니다. 이 왕은 아주 정치적으로 탁월한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베니게와 왕족간의 혈맹을 만들어 놓으면 서로 침략하지 아니하고 피차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에 의하여 이웃 나라의 공주 이세벨을 며느리로 맞이했습니다. 문제는 오므리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세벨이 국가를 자기 마음대로 뒤흔드는 실세가 되어서 자기 고향의 종교인 바알을 이 나라에 끌어들여서 바알 성전을 세우고 이 국권을 이용해서 아브라함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바알 종교를 믿도록 아주 포교정책을 강력하게 행사했다는데 히브리 민족의 고난이 왔습니다. 이 국민들은 이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 당하고 바알 종교가 지니고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 물리적 힘과 바알 종교가 주는 위력에 눌려서 하나님 믿는 것을 다 버리고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바알 종교 국가가 되어 버리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 꺼져가는 암흑기 역사 속에서 마지막 꺼지지 않는 불빛 하나가 있으니, 오늘 성경 말씀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가 엘리야라고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이 열왕기라고 하는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사건과 사람 가운데 가장 중심적 사건이 엘리야 사건입니다. 이 작은 불꽃 하나가 결국 야훼 신앙, 재건의 기초가 되고 선민 히브리 민족의 정신사를 새롭게 하는 희망의 불빛이 되었다는 것을 이 성경이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 엘리야와 하나님과의 대화 내용을 아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일종의 투정을 부리고 원망스럽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뭐냐하면 나를 빨리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이세벨의 바알 세력에 의해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죽게 되겠습니다.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투정스러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호렙산에 가서 동굴 속에 숨었을 때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래서 여기 숨었나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죽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심으로 빨리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투정 섞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이세벨의 핍박에 다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때려부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을 칼로 살해하고 국가에 아주 처참한 비극 역사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엘리야의 죽여달라는 심정의 이유를 우리가 영적으로 밝혀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그토록 열심히 해온 선지자 사역의 실패가 주는 회의 때문에 죽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무슨 출세를 하려고 노력한 사람도 아닙니다. 무슨 사업을 잘하려다 몰락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라면 하나님에게 그토록 원망스러운 요청까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일을 자기가 대신해서 선지자 사역을 지금까지, 자기의 말대로 "열심이 특심하오니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일을 내가 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 이 선택받은 선민의 생명인 야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토록 힘을 쓰고 있는데, 내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할수록 점점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만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왕실까지 오염되어 버린 바알 종교의 퇴치를 위해 목이 터져라 내가 외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가장 나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도와주고 계시니 내가 어떻게 이 일을 하겠습니까? 나를 빨리 죽이시면 그들의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었습니다. 이 마지막 남는 하나의 불꽃마저 꺼버리십시오. 그리고 온 세상이 다 바알의 세계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때로 우리는 이렇게 엘리야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유력한 탈북자가 지금 서울에 살고 계신데 미국 국회에서 청문회에 그를 초청했습니다. 당신이 와서 북한의 실정을 미국 국회에서 증언해 달라고 그래서 미국 국회로 가는 도중에 로스앤젤레스에 일단 하루 이틀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제가 그를 만나서 미국 국회 청문회에 나가서 할 말을 미리 여기서 한번 간증하고 가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저희가 초청을 해서 세웠어요. 그런데 그분은 아주 북한 사회에서 실세로 실력이 있던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 탈북을 해서 성공을 해서 남한에 와서 살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이유로 북한에서 성격이 험악하기로 소문난 죄인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거기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만 잡아다 놓고서 가장 험악한 고문과 어려움을 주고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 계산으로 약 6,000명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기 있는 사람들 하나씩 하나씩 본보기로 죽임을 당하는데 죽이는 방법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예를 들어 쇳물을 끓여서 머리에 부어 죽인다든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자기가 거기에 끌려가서 그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을 보고 자기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을 그때부터 믿게 되었노라고, 그들은 그 무서운 죽음 앞에서 누구도 반항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쇳물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은 "네가 이번에는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이유를 들어서 한사람씩 끌어다가 본보기로 죽음을 시키는데 모두가 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라고 나를 먼저 죽이라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자기가 먼저 죽어야 된다고 저 형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내가 한 일이라고 왜 내가 했는데 저 사람을 죽이냐고 하는데, 자기가 거기서 그런 일을 보고 "당신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그렇
게 말하는 그 실상을 교회 안에서 전부 보고서 '아! 이것을 보니까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정말 계신 하나님이구나!' 그래서 그가 한 말입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하나님'이라는 소리를 내게 자주 들려주셨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하나님은 지금 이 북한 땅에 마지막 남은 이 불꽃을 끄지 아니하시고 지금 이렇게 유지하고 계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이 땅을 탈출하여서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리라"고 그렇게 자기가 마음먹고 그때부터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서 탈출에 성공을 하여서 지금은 이렇게 미국 국회 청문회에 요청을 받아들여서 가고 있는 중에 있다고 우리에게 간증을 하고 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그가 다닐 때 필요한 도움을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엘리야와 같이 기도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는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 무한한 고통을 50년 이상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금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지 아니하시고 왜 우리에게 점점 더 고난만 주십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고 선하게 열심히 사는데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점점 더 어려운 일만 만나는 그런 때도 우리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엘리야와 같은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아, 차라리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열심히 생명을 바쳐가면서 이 땅에서 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하시나이까?" 그렇게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시는데 저더러 그 부흥회 기도를 해달라고 그러셔서 가서 기도를 하고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꽤 인상깊게 들었습니다. 자기가 이민을 와 가지고 이렇게 이민 현장을 살피니까 이민자들이 많이 고난스럽고 어렵고 스트레스가 많고 좋은 게 하나도 없어서 자기는 이 목회를 교인들을 기쁘게, 행복하게 또는 재미있게 그렇게 해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야단치고 때리는 설교를 하지 말고 어쨌든 교인들을 재미있게 사회적으로 받는 이 스트레스를 교회에 와서 다 해결할 수 있도록, 교인들을 재미철학을 기초로 해서 교인들을 좀 잘 해줘야 되겠다고 결심해서 교인들이 재미있어 하는 일이라면 목사가 뭐든지 다 봉사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로 열심히 하는데 이게 약간 인간적인 방법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하면 할수록 교인들이 재미없어 하는 겁니다. 재미없어 하고 "뭐, 목사님이 목회를 저렇게 하시나?" 교인들이 점점 떨어지고 나중에는 8명밖에 남지 않더래요. 그래도 이 목사님이 말씀 중심, 영적 중심보다는 이 고난 당하는 형제를 재미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변하지를 아니하고 8명 교인을 놓고 설교하고 '아! 오늘도 우리 교인들 8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재미있게 해줘야 되겠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사택으로 다 들어오라고, 그래서 빙 둘러 앉혀놓고 뭐, 재미있게 해줄게 별로 없어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나마도 안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야! 이거 재미 위주의 목회가 안되는 것이구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 아주 영적인 깊이로 들어가서 지금은 몇 천명 모이는 교회 목사님으로 되셔서 그렇게 부흥회를 하시고 그러는 겁니다. 어떤 때는 목회자들도 참 선하고 좋은 생각을 해서 열심히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을 열심히 하는데 엘리야와 같이 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일을 해야 되겠다는데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고 이렇게 고난스럽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투정을 부릴 때가 우리 인간들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동역자가 없는데서 낙심이 왔습니
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핍박이 심해져서 죽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니까 생명 유지를 위해 모두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쪽으로 붙어서 살 길만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모두 도망을 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위인들 가운데 그들이 만났던 가장 괴로웠던 순간이 언제인가? 그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겠다고 아브라함에게 통보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에 가장 심각한 기도를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결국 자기와 같은 동역자 10명을 찾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해 보려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의인 10명을 찾을 수 없는 소돔은 심판이 내리고 아브라함은 황무지 벌판에 새로운 역사를 향해 외로운 길을 떠나는 그런 역사를 성경에서 볼 수가 있잖아요? 모세는 지치고 지쳐서 어느 날 군중들에게 사라져 실종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 외로움의 투쟁을 하기 위해서 시내 산을 올라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데,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모세는 그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죽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민중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출애굽 사건은 다 무효가 됩니다. 왜냐하면 벌써 그 밑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 사건이 이루어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동역자가 필요하여서 제자들은 선택하셨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온 세상에 나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동역자를 구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동역자가 얼마나 필요한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한 시간만이라도 나와 함께 동역할 수 없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혼자 남은 고독의 세계!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그런 시간이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됨을 이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불빛의 마지막 남은 불꽃은 절대 끄지 않으십니다.

  어느 사회나, 어느 나라나, 어느 교회나, 어느 시대나 이 마지막을 비치는 불빛만 살아있다면 절대 회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가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차 대전 이후 침략자였던 독일 사람들이 좌절에 빠졌습니다. "이제 온 세계가 미워하는 나라가 되었고, 이제 전쟁에 실패했고 큰일났다!" 이제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다가 세계인이 무서워졌고 절망 속에 주저앉고 잿더미에서 울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국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영혼을 깨우는 요한 피테 목사의 조용한 설교가 그 패후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그는 자기의 설교를 "독일 국민들에게 고한다." 그 작은 목소리가 활자화되어서 집집마다 돌려가며 읽혀지게 되어서,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재건은 바로 요한 피테 목사의 그 작은 불빛으로부터 재건이 된 것을 누구든지 말하고 있습니다. 덴마크가 전쟁에 패하고 본 국민이 거지 떼와 같이 굶주리며 초점을 잃은 눈빛을 하고 있을 때 그룬드버 목사가 조용히 나타나서 이제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 이 길 밖에는 우리 민족이 갈 길이 없다!" 고 외쳤습니다. 저는 그룬드버 목사가 목회 하던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열심히 심어서 녹화 운동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하고 소박하게 흙으로 돌아가서 흙을 만지며 살자고 그래서 덴마크가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도 "지상의 낙원"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히브리 민족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똑같습니다. 성경에도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불빛이 마지막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되어서 온 백성이 저주받은 군중 같이 되어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 어떤 누더기를 걸친 사람 하나가 그 잿더미 위에 조용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들이 만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상론의 설교를 했습니다. 뭐라고 설교했느냐?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그것들이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저는 사슴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이라.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의 잿더미 위에서 그 거지같은 누더기 옷을 입은 그가 누군가 바라봤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그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제2의 이사야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50년 암흑기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 택한 백성은 그 의미조차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광야에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요한이 별안간 나타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끄지 않는 불꽃 하나를 남겨두심으로 새로움의 역사를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불꽃으로 살리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해야할 사명을 지시합니다.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을 삼으라.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네 후계자를 삼으라." 이 말은 뭡니까? "나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불꽃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 절망하여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살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를 이 고난 속에 두십니까?"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사는데 어느 때는 우리의 믿음이 암흑기의 역사를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떡해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자녀로 살수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내 손에서 뺏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암흑가를 걸어가는 내 영혼의 마지막 남은 불꽃을 절대로 끄지 아니하시고 살리시기 때문에 그 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성 있는 삶을 순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암흑이 많아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때로 암흑의 세계를 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내 영혼의 마지막 불빛을 끄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살려주셔서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이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새 역사를 바라보면서 오늘 내가 가고 있는 이 암흑의 터널을 이기고 견디시면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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