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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마샤가 주는 교훈 / 왕하 14: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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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가 주는 교훈
열왕기하 14 : 1 - 22

솔로몬이 죽은 후에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양분되었습니다. 여기 열왕기는 역대기와는 다르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번갈아 가면서 기록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남유다의 제 9대왕 아마샤의 통치에 있습니다. 그는 부왕 요아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유다 왕으로 등극하여 예루살렘에서 29년간 치리했습니다. 아마샤는 훌륭한 부왕 요아스와 제사장의 교훈으로 양육받은 경건한 어머니 여호앗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부모의 영향때문에 아마샤도 유다 왕들 중에 비교적 훌륭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마샤의 통치 행적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잘못된 것은 잘못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때는 비운에 죽은 부친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보통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공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이었지만 절대 악하지도 않았고 절대 선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 따라 왕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판단대로 성실하게 행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모든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인간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왕 요아스와의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사백 규빗이나 헐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갔습니다. 아마샤는 라기스로 도망했으나 결국 예루살렘에서 모반한 무리에 의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샤를 그 열조와 함께 다윗 성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온 백성은 16살 된 그의 아들 아사랴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았습니다.
아마샤가 인간적으로 볼 때 특별히 개성이 있거나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면 긴 설명이 필요없이 그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의 통치 생애는 보통 사람들과 거리가 먼 교훈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성정과 너무 닮은, 그야말로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번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효과가 넉넉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앞에 그의 통치 행위는

Ⅰ. 절대주의(絶對主義)가 아닌 상대주의(相對主義)였습니다.

본문 14장 3절에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마샤가 정직히 행했다는 말은 정도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바르게 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병행구절인 역대하 25장 2절에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다고 칭찬 받은 왕은 아사 왕 뿐이었습니다(왕상 15:11).

그렇다면 다윗이 행한 것은 무엇이며 아사 왕이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절대주의입니다. 그 말씀은 우상을 없이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아사 왕은 다윗의 길을 따라 종교개혁을 감행했습니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한 정도입니다.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온전한 영적 길입니다.
우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마 6:24, 눅 16:13).

따라서 인간은 두 절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주의(Absolutism)와 상대주의(Relativism)는 무엇입니까? 전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절대자를 인정하고 그의 추구를 철학의 근본 원리로 삼는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어렵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판이나 연구가 필요치 않는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사상입니다. 반대로 후자는 모든 가치의 절대적 타당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며 모든 진리, 규범, 가치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모든 것이 비판가능하고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 누구든지 사람에게 두 절대가 있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둘 중에 하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고집을 꺽지 아니하면 그는 반드시 혼합주의입니다. 우리는 한 절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샤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는 정직히 행하였으나 영적인 길을 가는데는 미흡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 조상 다윗의 길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역사 앞에 그의 통치 행위는

Ⅱ. 최대주의(最大主義)가 아닌 적당주의(敵黨主義)였습니다.

본문 14장 3-4절에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山堂)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산당』(High place)은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산당에서 드린 제사가 우상 숭배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비합리적인 예배장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들은 호색스러운 산당을 세워 우상을 숭배하고 종교 행위로서 음행을 자행했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드리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민 25:1-3; 렘 19:5).

그런데 솔로몬이 기브온에 산당을 건축하고 여기서 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삼상 3:2-4; 왕상 3:4).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솔로몬이 그의 통치 말년에 완전히 타락하여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왕상 11:7, 8; 왕하 23:13).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립되기 전에는 산당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산당에서 드리는 희생제사까지도 받으셨습니다(대하 33:17).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아사 왕(왕상 15:14)이나 여호사밧 왕(왕상 22:43)과 같은 선한 왕도 이 산당은 제거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산당 제사는 히스기야 시대(왕하 18:4)에 와서 마침내 제거되고 요시야 왕 시대에 예배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을 때 사실상 산당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왕하 23:8). 그렇다면 최대주의(Maximism)와 적당주의(Roughlism)는 무엇입니까? 전자는 퍼펙트(Perfection)한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백가지 중에 한가지라도 반대하면 적이 되고 백가지 모두를 같이해야 동지가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반대로 후자는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대충해 버리거나 대충 되는대로 편하게 해 버리는 생각이나 태도를 말합니다.

아마샤는 부왕 요아스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만 섬겨야 될 유다 민족이 산에 가서 우상에게 절하도록 방치했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여론이 분분하거나 신경쓰이는 일은 관례나 전통을 핑계 삼아 대충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가 비교적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무탈하게 치리했는지 몰라도 종교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부왕 요아스가 신하들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25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사실상 실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앞에 그의 통치 행위는

Ⅲ. 신본주의(神本主義)가 아닌 인본주 의(人本主義)였습니다.

본문 14장 10절에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25장 14-16절에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나아가 가로되 저 백성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선지자가 오히려 말할 때에 왕이 이르되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가 그치며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가 등극한 후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부왕 요아스의 원수를 갚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왕하 14:5; 대하 25:3). 그러나 그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했습니다(왕하 14:6; 대하 25:4). 다행스럽게도 아마샤는 여호와의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나라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에돔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30만의 군대를 소집했는가 하면 북조 이스라엘에 많은 돈을 주고 용병 10만을 빌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마샤에게 말하기를 북조 이스라엘의 용병을 구한 것에 대해 책망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말하기를 은 일백 달란트를 주고 큰 용사 10만을 삯낸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마샤는 그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이스라엘의 용병 10만과 은 100달란트를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아마샤의 위대한 점입니다. 마치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하게 했을때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는 다윗의 인본주의에 대하여 징계한 것을 연상케 합니다(삼하 24:1-17). 그러나 그가 에돔을 정복한 후에 취한 태도는 지금까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무모한 행위였습니다.

그가 세일 자손 약 1만을 죽인 뒤에 포로로 잡은 1만을 바위 위로 끌고가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 25:11-12). 아무 저항할 힘이 없고 이미 싸울 의지가 없이 항복한 나약한 포로를 죽인 것은 살인행위입니다. 이 또한 아마샤의 교만한 보통사람들의 인간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에게 찾아온 교만을 그는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북조 이스라엘의 도움 없이 자신의 군대로 에돔과 싸워 승리했다는데 대해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전쟁승리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는 없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교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서부터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에돔 족속의 우상도 전리품인양 예루살렘에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의 권고가 바로 세 번째 대지에 기록된 본문 성경입니다(왕하 14:10, 대하 25:14-16).
그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는 인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에돔과 싸워 패하여 포로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나을 뻔했습니다. 마침내 아마샤의 그 교만한 마음이 일을 내고 맙니다. 그는 선지자의 경고도 무시한 채 자신의 분에 맞지 아니하는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엉뚱한 전쟁입니다.

그는 북조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백향목과 가시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그의 무모함에 대하여 경고를 해왔으나 그는 듣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교만은 인본주의화 되어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아마샤는 원수의 손에 이끌려 그가 다스리는 예루살렘에 포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가 목숨만을 구했지만 그의 인본주의와 교만이 가져온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경우였습니다.

그렇다면 신본주의(God-centerism)와 인본주의(Humanism, anthropocenterism)는 무엇입니까? 전자는 자아의존을 배제하고 계시의존의 삶을 살며 이 세상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그를 의지하고 믿고 따르며 그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나님 절대 주권을 신봉하는 하나님 절대주의 사상과 태도입니다. 후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활동의 대상을 인간 스스로 선택하며 인간 중심 주의로 모든 것을 일관하는 사상과 태도를 말합니다.

특별히 인본주의는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 계시, 성경, 예수 그리스도보다 인간의 이성, 의지, 양심, 감정 등에 두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마샤는 지극히 인간 본능이 작동하는 대로 아무런 여과 작용 없이 행하는 인본주의 사고를 가진 자입니다. 이른바 인간본능이 아무런 통제나 여과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버려두는 렛 잇 비(Let it be)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도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처럼 아마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영적기능이 무디어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상대가 아니고 절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적당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최우선, 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자신을 위한 인본주의적 삶을 지양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계시의존적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잘되지 아니할 때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잘되고 형통할 때 겸손이 더 중요하게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잘되지 아니할 때는 잘 될 수 있다는 소망과 기대가 있지만 잘 되고 형통할 때 교만하여 망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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