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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례주일] 나를 기념하라 (마 26: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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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를 기념하라
일시 : 2003년 10월 12일 성례주일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6장 17-30 절

예수님은 그의 사역이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만 지나면 유월절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넘기어진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힘 있는 자들(대제사장장로)의 음모는 이루어졌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때에 돈에 눈이 어두운 가룟유다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스승 예수를 팔 계획을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화 30개를 세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먹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열 두 제자가 다 모였습니다. 물론 그 중에 가룟유다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예수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자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매우 서글펐습니다.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때에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 사람이 바로 나를 팔 사람이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지만 나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이를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아픈 고백이었습니다. 뻔뻔스러운 배신자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적어도 그의 진실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만사가 때가 있습니다. 만사가 결단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역사적 순간은 침묵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철저한 봉사였습니다. 살 깊은 사랑 나눔이었습니다. 끝까지 희생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도 위대한 설교를 해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만찬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입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의 청산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죽은 목숨이 사는 길입니다. 죽은 이스라엘이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됩니다. 이는 그 민족의 최대의 축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했습니다. 오늘밤 만찬은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밤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수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꼭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떡(누룩 넣지 아니한 딱딱하고 맛이 없는 빵)을 떼어줍니다. 포도주를 나눕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살이라 했습니다. 이 잔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내가 올 때까지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오늘 성례주일 즈음해서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I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시들지 않는 상록수 같은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의 길잡이입니다. 삶의 등대지기입니다. 마지막 만찬에 제자들만 초대했습니다.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밤 깊은 다락방에 사랑의 불을 켰습니다. 그는 떡을 나누셨습니다. 잔을 돌렸습니다. 이 일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인간은 악합니다. 또 연약합니다. 곧 잘 실패합니다. 또 낙망합니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에디슨은 발명의 왕이었습니다. 지금 전깃불도 그 분의 연구의 열매입니다. 그는 인생 낙제생이었습니다. 도무지 쓸모없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길에 뒹구는 돌멩이 같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그를 사람다운 사람 되게 했습니다. 끝내 별명의 왕 과학자가 됐습니다. 헬렌켈러 여사도 그랬습니다. 그는 참 답답한 아이였습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장애자 중의 장애자입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믿음은 그를 일으켰습니다. 설레벤 선생님의 희망의 가르침이 그를 위대한 사람 되게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참 가엾은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은 원한의 벽을 헐어버립니다. 원수의 쇠사슬을 녹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을 앞지르는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권력보다 강합니다. 돈과 권력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끝과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사랑은 원자폭탄보다 더 강합니다. 폭풍우보다 더 힘이 셉니다. 문화의 가족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도 강하고 따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난이라는 밭에서만 자랍니다. 참사랑은 고난이란 나무에서만 꽃이 핍니다. 사랑은 고난입니다. 희생입니다. 자기 버림 입니다. 바람이 없다면 연을 띄울 수 없습니다. 고난 없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피 흘림이 없는 사랑은 헛소리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허무합니다.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삶은 묘지의 행진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바람 찬 이슬을 겪은 인생의 사랑만이 참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배신,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은 연령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늙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병들지 않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 분의 사랑은 인생의 가장 지극한 축복입니다. 사랑은 희망입니다. 오늘의 만찬은 사랑 나눔 입니다. 영생의 약속입니다. 소망의 잔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 기업합시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 미쳐버리자고 합니다.

그 분의 사랑에 빠져버립시다. 이 사랑만 제대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사랑만 변변히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우리 사랑의 승리자가 됩시다. 그리스도 사랑을 바로 이해합시다. 이 사랑에 감격합시다. 우리는 정말 사랑의 영양실조에 고생하지 않습니까? 이 사랑만 깨달으면 세상은 틀림없이 달라집니다. 이 사랑이 부족하면 골칫덩이입니다. 가정이 깨집니다. 원망과 시비가 일어납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랑을 바로 이해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땐가 저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얼마쯤 이해하십니까? 우리는 그 분의 숭고한 사랑을 간직하며 삽시다. 이 사랑은 희생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 중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한 줌의 소금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인생은 재탕이 없습니다. 인생에는 왕복표가 없습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여행입니다. 이 인생들에게 새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세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게 살자는 것입니다. 보람 있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II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소중하다. 무엇이 귀하 다해도 인간의 생명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을 둘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아낍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남의 생명은 업신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 최대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이를 구속의 종교라고 압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었습니다. 이는 유월절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입니다. 딱딱하고 맛이 없는 떡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구속의 제물 됨을 비추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떡을 가지 사 “축복하시고”했습니다. 이는 감사기도입니다. 그 원뜻은 “세상의 떡을 주시는 이를 찬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 하셨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그의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떡덩이는 곧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를 “제자들을 주시며” 이 뜻은 “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손에 각기 제 몫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 뜻 깊은 설교의 말씀에 제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떡을 받을 때에도 여전히 서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편히 기대앉아서 떡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받아먹으라”는 두 마디 말씀뿐입니다. 마가복음은 “너희는 먹으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이 5천명과 4천명에게 떡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제자들은 이 성만찬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쉽사리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 다음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습니다. 둘째 잔을 듭니다. 때에 유월절 역사가 낭송됩니다. 시113:~118: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둘째 잔을 마십니다. 이때부터 모두 손을 씻습니다. 이때부터 유월절 잔치가 무르익습니다. 그리고 셋째 잔을 돌립니다.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돌리신 잔은 곧 마지막 세 번째 축복의 잔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 자리는 제자들과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잔입니다.


맺은 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만찬을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명합니다. 그는 얼마 후에 잡히십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한 밤입니다. 흔들리는 제자들의 속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은 잡히십니다. 고통을 당하십니다.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 다루는 법정에 섭니다. 그나마 가장 큰 죄를 지었다는 재판장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나마 명절에 특사의 혜택도 살인강도에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큰 밑바닥을 헤매게 됩니다. 그는 끝내 십자가에 처형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이 전에 지켰던 그러한 유월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밤은 매우 중요한 밤입니다. 그는 떡을 떼어줍니다. 잔을 돌립니다. 이는 내 살이다. 내 피다. 이를 내가 올 때까지 기념하라 했습니다. 오늘 성례주일에 즈음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늘 사랑과 화평으로 전진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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