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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이 들면 / 왕상 17:8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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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열왕기상 17장 8절 - 16절
제  목 : “힘이 들면”


한 집안의 형편을 알려면,
그 집의 쓰레기통을 뒤져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대를 알려면 어떻게 할까요?
평범한 소시민들의 얼굴 표정과 그 입의 말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표정! 어떤가요?
대체로 저기압입니다.

오늘의 말! 어떻던가요?
대체로 어렵다, 힘들다, 죽고 싶다 하여 비관적입니다.

1) 본문 요약

오늘 본문도 시대와 지역과 인물은 달라도 오늘날 우리네의 세상살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어려움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든 때입니다.

수년 동안의 기근으로 경제는 파탄 났고, 자연, 자의반 타의반으로 죽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2) 이해

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옛날 어느 어머니에게 출가한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늘 울상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왜 울상이냐고? 물었더니 어머니의 대답인즉,
날씨가 좋으면 우산 장사하는 큰 딸이 걱정이고,
비가 오면 짚세기 장사하는 작은 딸이 걱정 되어서 그랬노라고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의 생각을 바꾸어 보라고 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짚세기 장사하는 작은 딸이 좋고,
비가 오면 우산장사하는 큰 딸이 좋다고…….
그때부터
그 어머니는 매일 웃고 살 수 있었답니다.

무슨 얘긴가요?
어머니의 힘으로 날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면, 그 날씨에 해당하는 딸 마음을 가지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꾸거나 정세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형통할 때 감사하고, 곤고할 때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언제든,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어렵고, 힘이 드는 역경의 때도,
기독신앙에 있어서는 참 좋은 은혜의 때가 됩니다.

① 주님을 만날 때 입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최근의 신문을 보면,
뇌물사건이 사회면을 가득 채웁니다.
기업인들이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형통했더니, 좋아졌더니, 커졌더니,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몰려 온 것입니다.
결국은 이 일이 덫 되어서 저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형통할 때는, 죽을 기회가 노리고 있는 결국이 된 것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어렵고 힘든 역경의 때는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즉, 낮아졌기에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소록도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누가 충청도 사투리로 「이 큰 은혜를 어찌 갚는 대유, 어찌 갚는 대유 하면서」울며 기도하더랍니다.
나중에 사연을 듣고 보니
이 성도가 문둥병에 걸렸더니 제일먼저 부인이 떠났고, 형제들도 떠났는데,
그런데 주님은 떠나지 않고 여전히 만나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데,
병든 몸, 상한 몸을 갖고 갚을 길이 없어서 그렇게 울며 기도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 때는 더 이상 망하거나 죽을 기회가 아니라 살 기회가 됩니다.

▪ 이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절실하며,
▪ 이때 주님을 만난 것이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인격의 만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작은 아침부터 입니다. 그러기에 저녁이 오거나 밤이 되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성도는 밤부터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니 아침이 된지라」여기에 희망과 내일이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이등분 할 수 있습니다.

▪ 광야의 어려움 삶과!
▪ 궁궐의 풍성한 삶!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곳은 광야였습니다.
궁궐의 삶은 오히려 범죄했던 타락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뭄 시에 요단강이 아닌
마르는 그랫 시냇가에서 안 올수도 있는 까마귀가 갖다 주는 떡과 고기를 받아먹는 어렵고 힘든 지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며

사르밧 과부역시
남편이 살아 있거나 형편이 좋았던 때가 아닌 극심한 가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불신은 오히려 훗날의 로뎀나무 아래 였습니다.
갈멜산의 참 신 내기에서 승리 이후 였습니다.
사르밧 과부 역시,
지금처럼 죽고자 했던 때가 아닌,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게 된 이후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역경은 인간을 인간답게,
성도는 성도답게 만드는 기회와 묘약이 됩니다.

찰스 카우먼이라는 여자분이 애벌레 한 마리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관찰했습니다.
고치 속에서 나방이 나오는 것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 안타까운 장면을 보다 못해 그녀는 가위로 고치에 구멍을 내 주었습니다.
나방은 퉁퉁 불은 몸을 뒤뚱거리면서 기어 나왔습니다.
이제 곧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나방은 날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한 것입니다.

한 마리의 나방이 날기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며 때로는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고통에서 지혜와 힘을 얻는데, 이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듦의 역경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나 꼭 필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애3: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러므로 이 역경의 진리, 고난의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우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이 되며
푸념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② 믿음과 순종을 배웁니다.

앞서 역경에 대한 이해였다면,
지금은 역경에 대한 자세입니다.

어렵고 힘든 산길을 가거나 짐을 진 사람은
어렵고 힘든 만큼 허리를 굽힙니다.
역경은 겸손을, 온유를, 심습니다.

시인 테니슨은 그의 시집 「용광로」에서 우리 신앙과 인격을 용광로에서 벌겋게 달아지고 망치로 맞는 쇠붙이에 비유했습니다.

용광로에서 녹아질 때 쇠의 불순물은 제거되고, 망치로 맞을 때 새로운 형상을 빚습니다.
대장장이는 쇠의 녹아짐과 쇠의 맞음과 쇠의 찬물에 들어감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도하는 형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하여 녹이고 반복하여 때리고 반복하여 찬물에 넣습니다.

이 일에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열 자녀가 죽는 어려움과 전 재산이 날아가는 상실감과 병까지 들어야 했던 처절한 힘듦의 역경 속에서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즉, 자신의 미래상을 확신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마르는 그랫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갖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는 그 힘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믿음이 자라 두 번째의 명령인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자태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모습입니다.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를 공궤하라! 는 말씀에 믿고 순종합니다.
생명과 같은 떡,
피와 같은 기름을 갖고 과연 아들보다 먼저 공궤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은 어디서 온 것인가요?
힘이 들 때 배운 겸손과 온유함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만큼 어렵고 힘듭니까?
과연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가 살던 그 시대의 기근시 만큼 힘듭니까?

여러분의 개인 사정은 어떻습니까?
엘리야처럼 누구에게 동정 받고 있습니까?
사르밧과부처럼 곧 죽고자 할 만큼 입니까?

왜 어렵습니까?
타인이든, 본인이든, 섭리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든, 관계이든, 직장이나 사업이든, 자녀이든 어렵고 힘들다면 마찬가지 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힘듦의 이해입니다.
믿음입니다.

꽃은 아침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 밤중에 준비합니다.
아름다운 봉오리를 터트리기 위해서 밤새 이슬을 머금습니다.
아마 밤이 없었더라면 꽃은 낮에 활짝 필 수 없을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주님도 돌아가심이 없었다면 부활 영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세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지 못한다면,
인생의 꽃,
신앙의 꽃은 피지도 못할뿐더러 곧 시듭니다.

즉 자기 교만과 자기 사랑과 세상 정욕 취하여 비극으로 마감합니다.
인생이 보는 인생의 성공은
생전에는 「소유」이고,
죽어서는 「묘지」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성도의 성공은 「믿음이요 순종」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누굴 믿습니까?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르밧과부는 가루와 음식이었고 아들이었지만,
훗날에는 그녀 역시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붙들었습니다.

왕상 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노라”

인생의 습성은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어금니를 깨물고 더욱 움켜지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지금 쥐고 입는 것을 놓고 주님 주시는 것으로 바꾸어야 삽니다.

길을 가던 소경이 헛발을 짚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난간을 붙잡았습니다.
발이 닿질 않았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비명에 가까운 부르짖음으로 「살려주세요」했습니다.
난간을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이 「난간을 놓으세요」「그러면 삽니다.」
발밑이 10cm도 안되어 땅바닥입니다.

죽을 것 같이 붙들고 있는 모습,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히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나이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사르밧과부는 이 믿음이 있었기에 마지막 양식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를 붙잡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힘이 들면, 들수록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과
주님 닮은 겸손을 이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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