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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 롬 9: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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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본문 : 롬9:14-33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하다 보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됩니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특별히 그 상대가 믿을만한 분인데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안타까움은 한층 더해집니다. 한편 우리 마음속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믿지 못하는 예수를 나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 소수의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적인 명칭 하나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절에 등장하는 '남은 자'라는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 남은 자란 말속에 두 가지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남은 자'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둘째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원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역사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가 이 남은 자의 반열에 참여하여 인생을 살수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당신은 남은 자의 반열에 끼어 있다고 믿습니까? 이 시대에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있는 남은 자들 속에 나도 한 사람이라고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지금 대부분 자신의 동족이 불 신앙의 길로 가고 있는 안타까운 정황을 지켜보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매우 소수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이 수원의 영광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놀라운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에 있어서 노예가 되었던 애굽 땅에서 떠나는 출애굽의 경험은 일종의 구원의 경험, 해방의 경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들의 실수 때문에 노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내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노예가 된 자리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사건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은 것은 그들이 구원을 호소했기 때문이 아니요, 그들이 모세를 따라 나섰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가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끌고 가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구원을 보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하나님이 그 구원을 지키시고 보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서서 구원의 영광을 누림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 때문인 것입니다.
도 하나의 비유는 21절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한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고 나머지 한 그릇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토기장이에게는 어떤 그릇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본문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22절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흙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 된 그릇을 만들었을지라도, 혹은 진노의 대상으로 예비 된 그릇을 만들었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보다는 긍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의 그릇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그릇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우리 자신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24절).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로 주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대상으로 작정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고 잇습니다. 하나님을 불의 하다 할 수 없고(14절), 그 뜻을 대적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19절). 인간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20절). 그는 창조자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둘째로 남은 자가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 해도 , 혹은 관용하신다해도 우리가 시비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이 진노를 작정하신다 해도 이 진노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사랑을 보십니까? 진노는 사랑입니다. 이 진노가 사랑이라면, 선택은 더더욱 사랑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웠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자라 부르리라"(25절) 호세아의 사랑의 드라마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두 번이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께 한탄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를 데려 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가슴 아파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해 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 범죄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당하지 않았을까요?(29절) 그러나 우리를 남은 자로 남겨 두신 이유는 그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를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다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벌써 나를 작살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께서 주의 공의대로 우리를 처리 하셨다면 벌써 우리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남은 자로 남겨 두신 이유는 그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끝없는 용서를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의 밑바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 조건 없는 긍휼의 풍성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아직도 남은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셋째로, 남은 자로 우리가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한가지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인간들은 아무도 '의'를 얻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30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나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0-31절) 율법의 행위를 좇아 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강조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 시대의 신앙적인 혼란은 믿음이란 단어 그 자체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믿음은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 최선의 행위로도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의롭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혈을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를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반면에 자기 행위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그가 작정하신 자녀들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먼저 찾은 바 된 성도들을 통해서 사랑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끊임없는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며 그 사랑을 누릴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먼저 사랑 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의 보혈의 의미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지금도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은혜의 세계로 이끄시길 원하신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일과 증거 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남은 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인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사랑 때문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한 평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내가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은 자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 받아 쓰임을 받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영광스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 앞에 내려진 주의 은혜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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