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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교의식을 버리자/딤후 2: 2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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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의식을 버리자

본문: 디모데후서 2장20∼21절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덩굴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게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거죠.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았고 나무에서 추락했습니다.그런데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가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호랑이가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았습니다.마침 한 농부가 무더운 한여름 날씨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아도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겠는가?”하고 팔자타령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이 농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만족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이웃과 비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자기 교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방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니까 행복하지?”그러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대학에 다니면 뭐해요. 지방대학교인데요”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한 청년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 다니면 뭐해요. S대도 아닌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S대에 다니는 청년을 붙들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S대에 다니는 청년은 “S대에 다니면 뭐해요. 학과가 좋지 않은데.”
얼마 후 그 목사님은 S대에서 좋은 학과를 다니는 청년을 만나 물었습니다. “넌 정말 행복하지?”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과에 있으면 뭐해요. 수석도 못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 한 계단 올라가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우리 위에 또 다른 계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비교의식은 우리를 끝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쉴 새 없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의식이 우리 가운데 너무 만연돼 있어 우리는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넓은 집, 큰 차, 학벌 등 우리는 남보다 조금 더 낫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사람도 비교의식 속에서는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을 항상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교의식이야 말로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압사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 각자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에서 우리는 큰집에 많은 그릇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등. 질그릇보단 나무그릇, 나무그릇보단 은그릇, 은그릇보단 금그릇이 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가치 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비교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각 그릇들은 그 재질에 맞는 용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질이 아니라 그릇이 깨끗한 가입니다. “나는 금이다”“ 넌 은이다”식의 싸움은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2. 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말하면 사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을 때는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릇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금그릇이라도 그 속에 오줌이 있다면 그것은 오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라도 귀한 보약이 담겨있다면 주인은 그 그릇을 소중히 다룰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비교의식 속에서 오늘도 낙담하며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려고 치열하게 싸우지만 그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비교의식을 벗어날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있는 모습 그대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교의식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광야의 삶과 먹을 것이 조금 더 넉넉했던 애굽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광야의 삶이 노예로서 누리는 애굽의 배부름과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불평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귀중한 자산은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저렇게 큰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집이 커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집이 작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교의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첫째, 불행하게 됩니다.
마라를 지나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양식이 부족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애굽기 16:2∼3)
그들의 불평은 홍해 앞에 설 때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할 때도 계속됐습니다. 결국 이 불평과 원망의 무리는 시체가 되어 광야에 뉘어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빼앗기고 맙니다.
비교하면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면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성하고 있을 때, 하루는 누군가가 책을 한 권 보내 왔는데, 그 당시 스테반 빈센트라는 사람이 남북 전쟁을 노래로 하여 쓴 "존 브라운의 시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미첼 여사는 그 작품의 훌륭함에 비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빠져, 쓰다만 자신의 원고를 옷장 안에 6개월 동안 쳐박아 두고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사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저런, 이것은 당신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성공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측량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위에서 노력하시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도록 하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름하기 전에, 남이 갖고 있는 능력만을 먼저 보고 그 때문에 쉽게 실망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조금 못하거나, 여러 가지 활동에서 부족함을 보이면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너는 못하니 하는 식으로 꾸지람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고무하기보다는 위축하게 하거나 용기를 잃게 하기 쉽습니다. 남으로부터 타산지석의 교훈뿐만 아니라 좋은 장점을 본받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남과 자신을 비교만 하는 것은 자신의 성공요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 자기 자신이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셋째, 우월감과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심, 열심...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실 때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고 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시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그는 12제자 중에서도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더 드러나 보입니다.
참말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포기) 열심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찬에서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을 예언하시자 완강이 부인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충성했던 베드로, 그는 어쩌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동료인 요한을 보았을 때 슬며시 그와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못 박혀 순교할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요한이 어찌되든 그것이 너 베드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 베드로는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완수해야겠다고 열심을 다하여 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베드로와 같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경험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한 일을 계획할 때 혹은 직분을 맡을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낫다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 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를 사랑합니다."하고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구속하신 주의 자녀입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넷째, 낙심과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람을 한번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태어난다"는 말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태중에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에 의존한 삶을 살았지만 태어난 날부터는 자신의 코와 입을 통해 공기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다시 한번 태어나고 스스로의 힘으로 공기와 영양분을 섭취하는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제 아들 중에는 학창시절에 상장이라고는 비슷한 것이라도 받아 본적이 한 번도 없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녀석은 우등상은 물론 개근상이나 정근상 같은 것도 없었죠. 그런데 그 동생들은 그 아들과 다르게 모든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고, 우등생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집 사람이 저에게 "어떻게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 저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라고 형과 동생들을 비교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교 때문에 그 아들은 가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실의에 빠지곤 했다고 합니다. 그때 저와 그 아들에게 위로를 준 것이 바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을 거북이라고 생각하고 "거북이처럼 부지런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토끼를 따라 잡을 수 있다"며 그 아들을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기 전까지는 저도 이 이야기를 통해 상당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을 갖게 된 후부터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뭍에서 뛰어다니는 토끼와 물에서 사는 거북이가 달리기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지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공평하게 되기 위해서는 거북이는 근처의 섬까지 헤엄쳐 갔다 오고 토끼는 토끼대로 산까지 달려갔다 오는 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공정한 달리기 시합을 붙여놓고 중간에 토끼가 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가 이길 수 있다고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중간에 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몰래 지나쳐 가야 한다는 비겁한 논리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만 봐도 잊지 않고 다 외우는 동생들과 그렇지 못한 아들을 "공부"라는 경주에서 비교하는 것이나 천하장사 씨름선수와 저를 "씨름판"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것, 그것은 모두 불공정한 시합을 사람들 사이에 붙여놓고 그릇된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시합에서 뒤 처지는 사람을 점점 더 심약한 낙오자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절대 그릇된 기준으로 사람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유하고 건강하고 약삭빠른 사람들보다는 죄인과 병자들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불공정한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경쟁논리에 끌려 다니지 않고 각자의 소중한 색깔과 향기를 내며 사는 것, 나보다 남을 높여 주기를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 얻는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헝거리 정신>으로 잘 알려진 영국 경제학자 찰스 핸디는 최근 그의 책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에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29명을 분석하고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등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남을 따라하지 말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자신을 믿고,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아무도 가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가라"
다섯째, 감사를 잊고 불평과 원망을 낳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놀고 섰는 사람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 씩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는데 삼 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육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구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똑 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주자 먼저 온 자들이 집주인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주인과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므로 불평할 수 까닭이 없는데도 남과의 비교의식으로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비교의식은 감사를 잃게 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여섯째, 소외감과 결핍감을 갖게 합니다.
고등학교 윤리책에 보면 '상대적 결핍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생활의 기본적 필수품을 획득할 수 없어 최저의 생활수준도 유지하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의 상태가 아니라, 타인들과 비교함으로써 갖게 되는 심리적 결핍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상대적 결핍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일곱째,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됩니다.(고후10:12)
자기와 다르다고 쓸데없다 하거나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보라 네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4)
결국 비교의식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들을 가져다 줍니다. 낙심, 열등감, 원망, 우월감, 비판 등은 모두가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만 홀로 외롭고 고달프게 숨이 차도록 힘든 고생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비교의식에 쌓여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역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사명의 사람인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맡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면서 한 비장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살았기에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흐뭇한 평가를 자신에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쓸데없이 앞뒤좌우 바라보고 비교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5)
* 기도: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복을 따라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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