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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자에게 /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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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에게
눅 2:25-33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1. 기다리는 계절에

대강절기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오는 목요일 성탄절을 남겨 두고 한번 더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려 보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길 원합니다. 대강절의 색깔은 보라색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라색은 수줍어하며 연인을 남몰래 기다리는 처녀를 연상케 합니다. 동시에 보라색은 가슴 두근거리며 환희를 꿈꾸는 청초하고 어여쁜 여인을 꾸며주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보라색을 purple로 쓰기도 하지만 violet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명사로는 "제비꽃"인데, 그 꽃의 모양이 매우 청초하고 단아하여 '내성적인' 혹은 '수줍어하는'이란 의미로 형용사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으로 쓰일 때는 거의 여성 이름에만 사용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까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런 마음은 아마도 처녀 총각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으로 쉽게 나타날 것입니다. 대신 이미 결혼 생활 오래하신 분들은 조금 들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영성은 항상 주님을 기다림으로 지낼 수 있는 젊은 영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 아그네스가 지은 찬송 시(찬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기다림의 사람 시므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오늘 설교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위로자 곧 구세주를 기다리던 시므온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그를 두고 "의롭고 경건한 자"라고 했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참 신자의 한 표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신자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오랫동안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빛으로 인도할 자, 죽음의 골짜기에서 생명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자, 억압과 굶주림에서 배부르게 할 자, 병고에서 해방시켜 줄자는 오직 언약대로 하늘로부터 오실 구세주 밖에 없음을 믿고 기다리는 자가 곧 참 신자입니다. 

1) 기다리는 자는 오실 그분을 향해 집중하게 됩니다.

아니 그 분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기다리는 자는 그 날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다리는 자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기다림 그 자체가 곧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는 찬양하며 삽니다.

기다림이 없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노래가 없습니다. 기도 역시 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자는 우울하게 삽니다.

초대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였습니다. 먼저는 성령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곳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결국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을 또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다림은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였습니다.

기다림에서 많은 찬양시가 나왔고 곡이 붙여져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에서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았습니다. 그들은 높은 첨탑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기다리다가 먼저 죽은 이들을 예배당 안 뜰에 매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과 죽음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장례 문화는 통곡이 없습니다. 대신 찬송을 불렀습니다. 기다림은 그들을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뛰어 나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기다림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과학을 진보케 했습니다.

2) 우리 나라 조상들은 본래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음식은 대체로 식은 것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음식은 대체로 더운 음식입니다. 국도 찌개도 더운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장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고, 김치가 익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빨리 빨리" 문화의 창시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차가 조금만 막혀도 참지를 못하고 샛길을 찾아 헤맵니다. 서둘려봤자 몇 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질주를 합니다.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앞의 차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바로 빵~빵 경음기를 울려 댑니다. 성질이 느긋한 사람을 보면 자기 일도 아닌데도 답답해합니다.

상대의 말을 기다려 듣지 못합니다. 흔히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하는데도 중간에 상대의 말을 끊어 버리고 자기 말을 목소리 높여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보는 앞질러 많이 가지고 있지만 기다림에서 얻는 상상력은 잃어버려 새로운 창의적인 삶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여러분 우리는 자녀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옛 사람들은 매우 지혜로운 교육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大器晩成"이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어부였던 시몬을 향하여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변변치 못했습니다. 비린내 나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다렸습니다. 3년을 기다렸고, 성령 받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예전에 신동이라고 신문에 올랐던 천재들이 지금 무엇을 하며 사는가를 조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그런 기사를 다루었던 언론사가 있었는데 대부분 지금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4)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다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립시다.

오늘은 죽을 것 같아도 내일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살기 어렵다고 하여 두 자녀를 데리고 한강에 집어 던져 버린 비정한 아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  아버지가 평소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보도가 나왔습니다만 정말 유구무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자살병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부터 좀 인내합시다. 기다립시다. 순간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맙시다. 히브리서에 이런 교훈이 나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6-39)

3.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6-32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결국 그의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역사 인물중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아본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제 문제가 정말 우리 국민들의 심정을 답답하게 합니다. 정치가 그렇습니다. 경제가 그렇습니다. 청년 실업자의 수효가 갈수록 늘어납니다. 장사가 잘 안됩니다. 그렇지만 지난날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배고팠던 시절엔 '언젠가 우리도 살 밥 먹을 날이 올 것이다'고 하며 기다렸고, 군사 억압정치 시절엔 '언젠가 우리도 자유롭게 말하는 민주화 사회가 올 것이다'고 기다리며 참았고, 외국 여행 자유화 이전에는 '언젠가 우리도 비행기 타고 외국 여행 자유롭게 할 날이 올 것이다'고 하며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던 그 대부분이 지금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기다립시다.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리기보다는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새 해는 올해와 다른 해가 될 것이란 기대로 기다립시다. 기다리는 마음에 하나님은 꿈을 주실 것입니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에 평강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주를 품에 안고 기뻐했던 시므온처럼 우리들에게도 그런 좋은 날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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