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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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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의 교훈   


육체의 가시가 주는 은혜의 교훈

아주 작은 가시일지라도 우리 몸에 그것이 깊이 박혀 쉽사리 빼낼 수가 없으면 우리는 상당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속에 어떤 큼직한 가시가 한 개 박혀 있는데 어떤 수를 써도 도무지 빠지지 않으면 그 가시가 너무나 성가시고 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시만 제거되면 대단히 행복해질 것 같이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그러한 가시가 늘 박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그런 간절한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육체에 있었던 가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 가시가 육체적 질병이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터툴리안과 같은 초대 교회의 교부는 사도 바울의 육체에 있었던 가시가 만성적인 귀앓이 혹은 편두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육체의 가시가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하고 또는 간질 증세가 바울에게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학자들 중에서는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를 신체적인 질병으로 보지를 않고 사도 바울을 늘 따라다니며 핍박을 하던 유대인들이나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을 가리킨다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항상 유대인들의 집요한 방해와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에게 매를 맞기도 하고 또는 무고하게 고소를 당해서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돌에 맞아서 거의 절명을 했다가 깨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복음 전도자가 되고 나서는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바울을 괴롭혔고 집요하게 그를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대인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은 그야말로 육체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이 육체의 가시는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 들어와 있었던 거짓 교사들을 말할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여러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놓으면 꼭 그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슬그머니 기어들어 왔습니다. 그리고서는 바울의 가르침을 반박하며 바울은 가짜 사도라고 그의 사도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참된 주님의 일꾼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도 바울에게는 아닌 게 아니라 육체의 가시처럼 고통스럽고 징그러울 정도로 귀찮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어떤 거짓 교사들을 두고 바울은 그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 다음으로 어떤 분은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는 질병이나 어떤 외부적인 세력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과격한 성격이나 또는 정욕의 유혹을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는 육체의 정욕의 유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도 남자로서의 정욕이 없어진 것은 아니기에 때때로 어떤 성적인 충동이나 유혹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만, 이것도 일리가 없지를 않습니다.

또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바울의 어떤 성격적인 약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는 대단히 강직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유대교 전통 속에서 자라났고 유대교 랍비의 교육을 받았던 그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나 남들에게 대해서도 대단히 엄격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직한 성품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과격함도 있었고 그것 때문에 바울은 더러 후회하기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그 자신의 그런 과격한 성품이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의 성품을 변화시켜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을 괴롭혔던 육체의 가시는 신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고, 유대인들이나 거짓 교사와 같은 환경적인 요소일 수고 있고, 육체적 정욕이나 과격한 성격 등 내면적인 문제나 성격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 되었든지 육체의 가시는 우리에게 심한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아주 귀찮고 싫습니다. 자기 육신에 박혀 있는 가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 우리에게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을 때 그것만 제거되면 나는 한층 더 행복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가시와 같은 존재만 주님이 제거해 주시면 한결 더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의 그런 간절한 기도에 무어라고 응답을 해 주셨는가 하면 9절에 나오는 대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 귀찮고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가 있는 것, 그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은혜도 보통 은혜가 아니라 족한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그 육체의 가시가 어떻게 주님의 족한 은혜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가시 때문에  바울이 더욱 겸손하게 되고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인간적인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12 사도들마저 받지 못한 놀라운 계시도 직접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에까지 갔다 온 신비 체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수많은 은혜의 체험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교만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남보다 조금만 잘난 구석이 있어도 금방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의 약점을 알고 계셨고 사도 바울도 결국은 범죄하기 쉬운 한 인간이기에, 이런 수많은 체험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시고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신비 체험을 하면 뭐합니까? 또 아무리 위대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들 뭐합니까? 인간이 이런 것 때문에 스스로 교만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도 바울을 사랑하셔서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이런 가시의 은혜를 바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런 육체의 가시마저도 주님의 족한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을 오히려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가시가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성도들에게는 만성적인 질병이 육체의 가시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성도들에게는 이웃이나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가시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나약한 의지나 마틴 루터의 설명처럼 정욕에 쉽게 이끌리는 자기의 성품이나 또는 과격하고 혈기를 잘 내는 성격이 육체의 가시처럼 여겨지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가시가 되었든지간에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기다려도 그 가시는 쉽사리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시가 있기에 날마다 주님의 앞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이 사실은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시가 있기에 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13:7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지금으로서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가시가 나에게만 있는지, 또 이제는 가시가 사라져야 할 때도 되었는데 왜 여전히 가시가 남아 있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변함없는 사랑과 깊은 뜻을 가지고 그 모든 일들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주님께서는 때가 되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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