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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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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문 : 사 6:1~8


독일 중부에 보름스란 조그마한 도시에 옛날 독일 의회 건물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비석이 놓여져 있는 데, 그 비석에는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이 말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독일 의회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의회 앞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려고 나섰던 루터는 엄청난 시련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이사야의 말을 기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에게 죽음의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순종하는 의지를 보시고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인 종교개혁을 성공리에 끝내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사람을 찾으시던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며 지금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응답하여야 합니다.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사야는 그가 의지했던 웃시아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우상처럼 여기며 의지하던 것이 있다면 반드시 무너져야 합니다. 없어져야 합니다. 내 안의 웃시야가 죽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간절히 불러도 내 안에 하나님보다 크게 보이는 웃시야가 존재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웃시야가 죽어지고 사라져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은혜 받는 삶,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끊임없이 내 안의 웃시야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올 한해에는 내 안의 웃시야를 죽이고 영적으로 준비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하며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가 되려면,

첫째로 마음이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소록도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통성기도 시간에 옆에서 한 형제가 통곡하며 충청도 사투리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기에 저리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나 하며 그 형제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문둥병으로 한쪽 눈은 없어졌고, 귀와 코는 문드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입은 돌아간 상태였고, 손가락은 다 없어져 뭉뚝한 두 팔뚝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팔뚝으로 예배당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느냐?"고 울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그분은 감동을 받고 그 형제를 붙들고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그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그 형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드니까 제일 먼저 아내부터 나를 버리고 도망갔고, 형제들도 나를 버렸고, 나중에는 눈물 짖던 부모님도 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펼칠 때마다 저를 반겨 주셨고, 성경을 펼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주셨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고, 저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갚습니까?". 그 형제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분은 자신의 마음의 상처가 다 녹아 내리는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저 형제가 그렇게 은혜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더 크게 고백해야 합니까?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불뚝거리며 나타나는 우리 자신이 가려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여지며, 우리의 마음의 상처도 다 씻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스랍인 천사가 보였습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았습니다.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모두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얼굴을 가리었다는 것은 내 자신이 사라지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의 얼굴이 드러나면 안됩니다. 인간의 모습은 겸손함으로 가려져야 합니다. 봉사할 때도 헌금할 때도 섬길 때도 얼굴이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에 항상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 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모습을 자꾸만 드러내려고 합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야 자신은 작게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적 모습이 가려진 겸손한 자가 되어 주님이 부르시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고백하는 준비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입술의 말이 정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남을 헐뜯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까요?". 목사님께서 닭 털 한 웅큼을 바구니에 담아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헐뜯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문간에 이 닭털을 하나씩 놓고 오십시오." 부인은 그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문간마다 갖다 놓은 닭털을 다시 모아 오십시오." 한참 후 여인이 풀이 죽어서 돌아왔습니다. "닭털이 바람에 다 날아가서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이 엄숙히 말했습니다. "동네방네 다니며 남의 험담을 하는 자매님의 말은 바로 그 닭털과 같습니다.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없답니다. 나중에 다시 주어 담고 싶어지는 말은 입밖에 아예 내지 않도록 처음부터 주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인은 목사님의 말을 들으며 뼈아픈 뉘우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말을 위한 기도'라는 시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한 마디의 말도 기도하면서 해야하는 진지한 마음이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입술이 정결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말이 좋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도 사용하시지 아니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할 때 하나님께서 초대교인들의 입술을 붙잡아 천국의 방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천사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해졌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입술도 성령으로 변화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말로 바뀔 때 그 안에서 능력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말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사랑의 말, 감사의 말, 위로의 말로 바꾸어지면 인생도 반드시 바꾸어집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은 믿음의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믿음의 말을 하는 입술이 정결한 사람들에게 그 말한 대로 축복하여 주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여야 합니다

마일즈(C.A Miles)는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서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고 찬양하였습니다. 청각장애자인 농아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보이는 장애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농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보지만 듣지 못하기에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길을 건널 때 아무리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도 듣지 못하기에 알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다른 장애인들 보다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 현대 교회에 영적인 농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농아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감동과 기쁨을 잘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좋은 음악과 비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혜의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세상에 많은 은혜가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에 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둔하게 만드는 영혼의 굳은살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됩니다. 목욕탕에 가서 면도날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벗기곤 합니다. 그러면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경이 죽어버린 굳은살을 벗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귀를 후비다 닿지 않아야 할 곳을 조금 살짝 스쳤는데 온 몸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귀 안에는 굳은살이 없어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신앙은 발뒤꿈치의 굳은살처럼 되지 말고 귀의 속살처럼 예민하게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에 예민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해야 합니다.

왜 시험이 많고 실망도 많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보다는 내 심정만 생각하니까 시험도 많고 실망도 많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을 둔하게 만드는 영혼과 마음의 굳은살을 떼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민감해져야 합니다. 섭섭한 일에 대해서 민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영혼이 침체된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준비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정결한 입술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예민하여져 언제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며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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