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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사랑하시더라 (요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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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더라 (요 13:1~2)

이제부터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요한복음 말씀 전체를 성막에 비유한다면, 1장부터 12장까지 말씀은 성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13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지성소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에 이르자, 예수님의 주변 상황들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12장 말씀까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불특정 다수인 대중에게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나 13장 말씀부터 비공개적으로 선택된 몇몇 사람들에게 설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설교하시다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식사하시는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그에 관한 내용이 13장부터 16장까지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마가의 다락방으로 초청하시고 음식을 나누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을 하시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에겐 비극이고 고통이겠지만, 해당되는 사람들에겐 축복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사람들,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종교 지도자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비밀스럽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한 절이지만 굉장히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자는 자신이 죽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의 한계, 무지, 죽음을 모른 채 산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영원히 살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감정대로 본능대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으셔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기 1주일 전의 상황입니다.

지난해 12월 25일, 우리 교회에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99세 되신 장병두 할아버지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분은 평생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4개월 전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 교회를 소개받은 후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정하시며 세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2월 24일에 이재훈 목사가 세례 문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는 굉장히 떨렸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장병두 할아버님께서 ‘안 믿어’라고 말씀하신다면, 연세가 높고 인생의 경륜이 많으신 분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례 문답은 30분 만에 끝났습니다. 장 할아버지는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장 할아버지는 한의사였습니다. 많은 환자들을 진찰하셨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죽을병에 걸려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충분히 살 병인데도 두려워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도 때가 되어 곧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 궁금하던 차에, 목사님이 가셔서 영원히 사는 문제에 대해 설명해 드렸더니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시기 전에 제 방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바쁘신데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장 할아버지께서 “결혼식보다 중요한 것이 세례식이 아닙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오늘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끝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압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의 조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죽어야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개인의 죽음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 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만약 인간이 70, 80세까지 살다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너무나 허무한 일입니다. 소, 개, 돼지 등 짐승들은 영혼이 없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죽으면 그야말로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인생의 대한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겨 온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둘은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셋은 인생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설계하실 때 죽거나 병들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똑같이 영생하는 존재로, 죽음이 없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짓는 바람에 죽음과 질병과 혼돈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음과 질병과 좌절과 절망을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본래의 존재로, 영생하는 존재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죄, 절망, 질병, 죽음에서 회복되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은혜

셋째,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무한정 사랑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라는 구절에서 시제는 ‘과거 완료형’입니다. 요한복음 12장까지 예수님께서 불특정 다수에게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 말씀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모래알들 중에 하나, 많은 별들 중에 하나 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남자가 ‘나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박애주의자일 수도 있고 난봉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 여자를 위해 나의 인생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녀를 위해 생명을 걸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직장도 조국도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사자인 그녀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무한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엔 조건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잘나고,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줘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사랑은 그냥 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에게 권력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지만, 권력이 떨어지면 찬바람만 붑니다. 이것이 세상 사랑의 이치입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려고 사람을 사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잘나서도, 유명해서도, 돈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도, 능력도, 자랑도 없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엔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선택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못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분의 선택과 은혜엔 해답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목숨을 버리신 만큼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할 때 한계를 그어 놓습니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사랑하지도 않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처럼 이기적인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면 모두 이기적인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조건에 맞추고 이익을 얻기 위한 사랑으로 차있습니다.


한계 없는 사랑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앞서 죽게 되었을 때 ‘저를 데려가고 아이를 살려 주세요’라고 절규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은 과거로 끝난 것일까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은 과거의 이야기일까요?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과거의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고 난 미래에도 그 사랑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1절 말씀을 읽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한 순간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로미오와 줄리엣’, ‘노트르담의 꼽추’, ‘천국의 계단’에서 보는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열정은 영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질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사랑은 감정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한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씀은 세월이 흘러 모든 상황이 변해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나 죄악을 범하더라도 모두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아내가 죄를 지었다면 남편은 용서해야 합니다. 남자의 잘못은 용서 받을 수 있어도 여자의 잘못은 용서받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 모두 용서해야 합니다. 자식의 잘못도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존재하고,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한계가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님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습니다. 모두 이중 인격자처럼 적당히 믿고 있습니다. 겉으로 잘 믿는 척 하지만, 속으로 아무 내용도 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를 용서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사랑이냐 배신이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특별하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 내색도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배신’입니다. 이것은 어떤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라, 주님 최후의 성만찬 주제입니다. 사랑의 이면엔 배신이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 용서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사탄의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배신은 유월절 식탁에 함께 놓인 두 가지 메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입니까, 배신입니까? 교회에 잘 나오는 척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척하지만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신지요? 혹시 교회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신지요? 만약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대한 배신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주님의 사랑에 배신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헌신으로 보답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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