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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신은 사역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 (마 16:13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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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16 : 13 - 28절 
제 목 : 헌신은 사역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

우리는 가끔 교회 안에서 장로님 신앙 참 좋다
권사님 예수 참 바로 믿는다 는 말을 합니다.
그럼 신앙 좋다 예수 바로 믿는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24절 말씀처럼
[ 아무든지 나를 따려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는 사람이
바로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주님께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헌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열매가 아니요
나아가 헌신은 사역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입니다.
이 사실에 눈이 뜨여지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에 놀라운 변화와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헌신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에 기초가 되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는데 바른 신앙의 첫 번째가 무엇이겠습니까?

답부터 말씀드린다면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무리들을 떠나
헬몬산 기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에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청빈한 생활로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당시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매섭게 질책하였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되었습니다.
결국 당시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점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닮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선지자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하였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3년 반의 가뭄 끝에 비를 내리기도 하였고
수넴 땅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온 엘리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며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눈물의 메시지를 전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망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온 예레미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적어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회 혁명가, 또는 자선 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들 예수님의 극히 일부분만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 훌륭한 인물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얘기하듯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수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의 헬라어로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원래 인간은 에덴 낙원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낙원과 행복과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와 죽음이 주는 어두움과 절망과 허무의 한계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3:15절에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세주가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라는 신앙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17절에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 라고 했습니다.
왜 복이 있도다 라고 했을까요?

원문에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니 예수님이 감탄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부분을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하면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내가 믿습니다 ] 라고 고백하니 예수님이 깜작 놀라시며
[ 우~ 와~ 베드로야 너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건 너가 안 것이 아니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알았지 ]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감탄을 했을까요?
저도 이 말씀를 듣고는 왜? 그렇게 감탄했을까? 했는데
우연히 영어 성경을 대조해 보다가 예수님이 감탄한 뜻을 알았습니다.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 라는 이 구절을 어떤 영어 성경에는 아름다움이 있도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미덕이 있도다, 특권이 있도다 >
하나님의 은혜가 있도다, Lucky 즉 행운이 있도다.
이 말은 복이란 말속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놀랄만 한 것이 [ 예수 바로 믿으면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복이 있다는 사실 너가 어떻게 알았느냐? 그건 너가 안 것이 아니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알았지 ]
그렇습니다. 예수 바로 믿으면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복이 있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면 교회 나온 첫날부터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른 신앙고백 속에는 예수님도 감탄할 만한 복이 있다는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른 신앙고백을 할 때 복이 있도다 라고 했는데
그 복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처음 시몬을 부르실 때 주신 이름으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누리는 최대의 특권은 하나님의 교회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란 중세 시대 이후 내려오는 뾰족한 첨탑에 십자가와 종이 달린
그런 웅장한 건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의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19절을 보십시오.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이 말씀은 베드로 뿐 만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 특권이 무엇이냐? 바로 천국 열쇠인 것입니다.

[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
이렇게 신앙고백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놀라운 특권과 축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9절을 다시 보세요.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저는 다른 사람보다 열쇠를 많이 매달고 다닙니다.
저의 집 현관 열쇠부터 시작해서 자동차 키, 그리고 교회 현관, 사무실, 목양실 방들의 키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닙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참 부자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제가 제일 아끼고 복되게 여기는 중요한 열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저에게 축복으로 주신 천국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는 제 뿐만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구약 이사야 22:22절에
[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열쇠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천국 열쇠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열쇠를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위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며, 그 열쇠는 교황에게 물려진다고 주장합니다.
고로 교황에게 막강한 권력과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쇠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받은 자녀에게 허락하시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열쇠가 무엇입니까?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잠겨있는 것을 푸는 것이 열쇠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키요, 열쇠입니다.
옛날에는 쇳대라 했지요. 이 쇳대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않습니다.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고대에 있어 집안의 쇳대는 청지기에게 맡겼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천국의 청지기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근사하고 복된 일은 없습니다.
청지기에게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집니다. 힘이 있습니다.
이 열쇠로서 답답한 이 세상에서 문제가 생기고
막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승리하고 성공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천국의 청지기 된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을 하라고 이 열쇠를 주었을까요?
오늘 우리의 본문에 열쇠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는 구원의 열쇠입니다.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구원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열쇠를 못 가진다고 하여도 이 천국열쇠, 구원의 열쇠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의 열쇠입니다.
교회가 천국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의 비밀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할 수 있는 특권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천국의 청지기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 이것처럼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천국 말씀을 위탁받은 것, 그것이 바로 천국의 열쇠입니다.

셋째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나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고 응답 받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이 열쇠를 만능키라고 합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기도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아무리 단단히 잠겨진 문제라도 이 열쇠로 열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굳게 닫힌 어려운 환난과 시련이라도 이 열쇠로는 열 수가 있습니다.
열쇠가 아무리 많아도 그 문에 맞아야 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이 당하는 여러 문제는 이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안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는 단 한번에 '철컥'하고 열려지고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기도의 열쇠'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렘33:3절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넷째는 용서와 축복의 특권입니다.
19절에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풀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 너희가 용서하면 그 용서가 그대로 하늘에서도 용서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대로 매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축복하면 그대로 하늘에서도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축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매여 있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미국 최대 감리교회인 휴스턴 감리교회의 <찰스 알렌> 목사는
성공자들을 연구해 본 결과 다음 다섯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1)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2)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
3) 다른 사람에게 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4)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운다. 5) 대인 관계의 화평을 이룬다

한마디로 인간관계의 성공자를 말합니다.
<나폴레옹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다른 요인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성공자는 성공자를 칭찬하고, 실패자는 성공자들을 비난한다."

<지그 지글락>은 100명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공통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70%가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고,

둘째는 타인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졌고 칭찬하고 축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 특권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 열쇠를 사용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우리에게 이런 열쇠를 맡겼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섬겨라고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한다해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만 한다해서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받으신 후 처음으로 당신이 당하실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조금전의 칭찬이 무색할 정도로 책망을 합니다.
23절에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앞에서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고 특권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바른 자세가 무엇입니까?
주님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생각에 옳은 데로 [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 라고 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마음에 사탄이 넣어준 생각이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는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교회에 주어진 열쇠 즉 특권은 바로 십자가를 질 때 주어진 특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구원과 축복이 주어졌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모든 특권과 축복이 주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2:2-3절에
[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 ]
이 십자가에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바른 신앙생활 즉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바른 신앙고백과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 즉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너무나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서 예수님은 신앙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순간, 순간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때 자기 생각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 더 사랑하다 보니 따르는 모든 불이익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자기 것 하나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 섬기듯이 교회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인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바로 헌신입니다.
오늘 주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헌신을 각오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헌신은 우리의 사역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임을 아셔야 합니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중국에 선교할 때에 한 청년이 [ 진정한 신자가 되는데 몇 년이 걸립니까? ] 물으니 [ 등불의 심지에 얼마 동안 불을 붙여야 빛을 발합니까? ] 반문하자 청년이 하는 말이 [ 그야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에 빛을 내지요 ]
테일러 선교사는 청년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 [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 내가 헌신되어지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내 속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생애에 새로운 빛을 발할 것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빛이 타오르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께 헌신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눅9:57절에도 주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열심 있는 제자 지망생에게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처음부터 고난의 각오, 생명의 각오, 헌신을 각오하라고 합니까?
25절에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기 중심, 이기적인 신앙은 결코 남는 것 없이 다 잃어버리지만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각오 즉 헌신을 각오하면 잃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막10:29절 이하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잃어 버린 자는 ]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그 진가는 내세에 즉 영원한 세상에서 확실한 보상을 받지만 그러나 현세에서도 십자가 지고 가다가 잃어 버린 것은 주님께서 100배나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금방 [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요 ] 하고는 26절에 [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합니다.

뭔가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은 앞에 목숨하고 뒤에 목숨하고는 다른 목숨인 것입니다.
즉 육신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 사랑하다 보면 영적 생명 잃어버리고 마는데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영적 생명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영원한 생명은 이 땅에서는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때는 영원히 값진 것으로 행한 대로 갚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희망은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수고하고 충성한 사람들을 크게 위로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 결론> 바른 신앙고백과 헌신의 각오가 있는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챤 뉴스위크](2003년 2월 8일)
제목 [ 저 예수 믿는 놈들부터 없어져야 해 ]
작년 1월 26일 주일 저녁 서울 충신교회 제직헌신예배
설교를 맡은 임택권 목사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의 설교 중에 어느 식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임 목사님이 식사를 하기 위해 뷔페식당에 갔는데 아이들이 식당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난장판을 만드는데도 부모들이 한번도 제지하질 않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 아이는 감기로 기침을 하는데 음식 앞에서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침이 음식 안으로 들어가고 그 음식을 손가락으로 뒤적이기까지 하는데도 부모들은 전혀 개의치 않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교회 직분자라는 것입니다.
집사들이 자리를 잡고 그 교회 담임목사가 오기까지 기다리면서 하는 말, "아직 김 목사 안 왔어?" 목사님도 아니고. 그냥 목삽니다.
그리고는 다른 직분 자들의 흉을 보며 맞장구를 칩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담임목사가 오자 태도는 180도로 달라집니다.
"아이구, 목사님 오셨습니까? 차가 많이 막히지요?" 그리곤 옆자리의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옆 좌석까지 생생하게 들립니다. 게다가 대화하는데 정신이 팔려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옆 좌석에서 식사를 하던 50대 중반의 두 신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하는 말이 "저 예수 믿는 놈들부터 없어져야 해" 하는데 목사님이 할 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예화용으로 지어낸 이야기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나와서 신앙고백은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르겠다는 헌신의 고백이 없는 교인은 세상에 나가면 여지없이 추태를 부리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왜 주님께서 신앙고백 하는 우리에게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지, 왜? 헌신을 각오하고 나를 따라 오라 하시는지, 그 의미를 잘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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